동요와 방황의 현 시점에 서서 우리의 진로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사를 입체적으로 더듬어 올라가 확고불발한 역사의식 속에서 뚜렷한 목표와 방향을 찾고 여기에 모든 국민이 단결하고 전진하여야 한다.
미래지향성(未來指向性)이 가지는 의미
작금 수년 이래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온 세계 국제사회가 급격한 변혁기에 처해 있다. 사상적으로나 현실 정치면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방황하면서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 하겠다.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와 같은 처지에 있어서는 모든 국민이 문자 그대로 진로를 확고히 설정하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그르침이 없도록 하여야만 될 중대한 고비에 처해 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방향과 진로를 설정할 것인가. 우리는 흔히 미래지향의 방향을 설정하여야 된다. 하나 이점에 대하여는 누구나 이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고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역시 선현 말씀대로 민족이나 나라 역사를 무시하고 미래지향의 새로운 방향이나 진로가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오늘날에 있어 우리 민족 국가가 나아갈 뚜렷한 목표와 방향과 진로를 설정함에 있어서 역시 민족사를 입체적으로 더듬어 올라가면서 확고불발(確固不拔)한 역사의식 속에서 우리의 방향과 진로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느 계층만이 아니고 지성을 가진 모든 국민들이 이런 역사의식으로 공통한 방향을 찾고 힘을 모아 단결하여야 될 것으로 믿는다.
불교(佛敎)는 우리 민족의 국난(國難)을 이기는 힘이었다.
이런 전제 밑에 생각할 때에 우리 한국의 불자들의 의무는 어느 면으로 보나 가장 핵심적인 임무를 스스로 느껴야하고 높은 사명감을 남달리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 민족사를 더듬어 보면 국난이 있을 때마다 전국민에 앞장서서 국민과 함께 이를 극복하고 나간 핵심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핵심 세력이 무엇이냐 하면 역시 불교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시대 이후 이 나라 불교인들은 모든 국민에 앞장서 이끌면서 올바른 방향과 진로를 찾아 밀고 나갔던 것이니, 여기서 국난은 그때 그때 극복되었고 오히려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불교는 우리의 역사에서 국난을 이기는 힘과 예지의 핵심이라고 역사가 말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통일의지(統一意志)와 힘이 나오는 곳
역사를 돌이켜 보자.
삼국(三國)시대의 저때에 신라 고구려 백제가 서로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겠다고 외치고 나섰다. 당시 초창기의 국력으로 보아서는 고구려가 제일 강하고 그 다음이 백제 신라의 차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7세기 중엽까지 이른 삼국의 격심한 경쟁 과정에서 가장 간궁하고 약하다고 보아진 신라가 마침내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무엇이 이와 같은 영광을 신라에 안겨 주었던가.
이에 대하여는 정치, 군사, 경제, 모든 면에서 신라 국민의 비상한 노력을 인정해야 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신라 국민들이 불교 정신을 토착화 시키면서 신라불교 자체가 「호국불교」로서 국가민족에게 기둥과 초석같은 역할을 감당한데서 이루어진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잡다(雜多)와 전일(全一)을 살리는 원리(原理)
삼국 통일 이전의 신라 국민 사상이나 정신을 보면 잡다한 다신교적인 신앙에서 국민의 사상이 공통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따라서 국력을 하나의 방향으로 집결시키지 못하고 조직화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대체적으로 지증왕 이후 신라의 국가적 목표를 뚜렷이 하고 법흥왕 진흥왕의 양대에 걸쳐서 불교를 수용하되 이를 착실하게 한국적인 불교로서 수용하여 문자 그대로 호국 불교로 승화시킨 이것이 신라로 하여금 다른 두 나라를 이길 수 있었다고 나는 본다.
특히 원효대사 같은 분이 불교정신 속에서 통일 대업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그런 기본 정신을 발굴해 내고 이를 승화시킴으로 해서 가능했다고 보는 바이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원융회통(圓融會通) 회삼귀일(回三歸一)--」이 두 가지 큰 목표를 설정하고, 이 원리로써 이 갈래 저 갈래로 분열됐던 국민정신을 하나의 통일정신으로 승화시킨 데서 신라가 만난을 배제하고 대업을 달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겼던 것이며 그러면서 신라의 모든 청소년들이 화랑도의 조직적인 훈련같은 놀라운 수련을 통하여 확고한 국가관과 가치관을 세우고 통일을 지향한 데서 더욱 빛나는 성과를 거뒀던 것이다.
歷史를 前進시킨 原動力
신라 시대에 통일을 지향한 국민 사상을 보면 기술한 바와 같이 불교의 「회삼귀일(回三歸一)」의 대발전적 원리를 근간으로 하여 화랑도의 모든 조직과 정신을 합일시키므로써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게 되었다고 나는 보는 바이다.
그뒤 고려 오백년의 역사를 보더라도 13세기 초엽부터 후엽까지 즉 1,220년대부터 1,260년대까지의 40여년동안 북방대륙의 거창한 세력인 몽고의 침략을 견디어 낸 것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고려 때 조상들이 어떻게 국권을 유지하고 강토를 유지할 수 있었던가. 당시의 역사를 보면 세계를 제패한 몽고에게 동서 제국에 제대로 버틴 나라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고려만이 무서운 국난을 능히 이겨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우리 조상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려 불교인들은 확고불발한 신념을 가지고 추호의 동요도 없이 외적에 대치할 수 있었다.
文化를 꽃피운 佛子精神
타처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 수난의 40년 동안에 참으로 놀라운 문화적 창조성을 발휘하였던 사실은 실로 주목할 일이다.
역사상 가정 우수한 청자기를 만든 것도 이때였다. 세계를 놀라게 할 미술 공예의 특색을 발휘한 것이 이때였다. 금속활자를 사용해서 「상정예문(詳定禮文)」50권을 간행한 것도 이때며 그보다도 더 위대한 일은--이 전쟁중에서 팔만대장경을 재 조각해낸 사실이다.
이 모든 사실은 불자정신이 전통화된 고려 사회가 얼마나 문화 창조성이 풍만하였던가를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국난을 이기는 힘의 원천을 불법이라는 높은 진리정신에서 구했다는 고려인의 예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 자세는 확실히 무서운 고난을 이겨내는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세계를 정복했던 당시의 몽고족도 고려를 무력으로 정복할 것을 체념하고 마침내 평화적인 국교로 나올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만일 당시에 우리의 조상들에 약동하는 불자정신이 없었던들 40년의 국난을 극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으리라. 이것은 고려에 전통화된 불자정신과 그리고 훌륭한 불자들의 위대한 사상 위대한 신앙력의 기초에서 비로소 가능했다고 보는 바이다.
內的 平和와 魂의 安息處를 제공했던 시절
근세 조선 왕조에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을 썼던 것이 사실이지만 역사가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지난 천여년 동안 깊이 뿌리 박아온 깊은 부처님 신앙--특히 삼국시대 고승대덕들이 확고하게 체계 세워 민족 번영의 원리로 토착화 시킨 바 있는 호국불교의 신앙은 누구도 잡아 흔들 수 없었다. 따라서 억불숭유의 정책은 표면상의 일일뿐 오히려 「내불외유(內佛外儒)」즉 속내면에는 부처님 숭배고 겉 모양으로는 유교를 행세하는 그런 경향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왕조 후기에 와서는 불교 탄압도 심하기는 하였지만 그중에서도 1894년 이후의 갑오 동학 혁명에 있어 불교는 그 사상적 배경을 형성했던 것이다. 「草衣대사」같은 분은 전봉준등 동학의 창당 간부급에 깊이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갑오 동학 혁명에 조금 앞선 개화당의 갑신 정변 배후에 있어서 「이동인 스님」의 활약은 실로 놀라운 바가 있다. 그 당시 개화 독립당 배후에서 얼마나 용감하게 뒷받침했던가. 그의 풍부한 근대적 지식은 당시 가장 어려운 국제 외교면에 있어서 남다른 슬기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실로 사가의 안목으로 볼 때에 「이동인 스님」과 같은 젊은 스님의 존재는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880년 이후, 갑오 동학 혁명을 거쳐서 그 다음 1919년의 기미 독립운동에 이르는 동안 불교 화랑도는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이어 항상 힘을 모아 오다가 마침내 동학 천도교의 세력과 불교는 합쳐서 기미 독립운동의 주도 세력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다.
現代史를 方向지울 者
한국 불교가 민족과 국가의 기본 생존권을 보호하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여 왔다는 사실은 역사를 하는 사람으로는 누구나 부인 못할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오늘의 세계사적인 격동기에 처해서 우리의 민족이 어떤 방향을 잡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역시 원점에 돌아가서 살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빛나는 역사 속에서 조상들의 확고 불발했던 자주의식 주체의식을 올바로 계승하여 그를 오늘에 되살리면서 우리가 처한 국난을 타개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주동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광대 무변한 큰 포량(抱量)을 가지고 대처하여 능히 세계의 흐름을 방향지울 수 있는 불멸의 불교 정신을 발휘하여 세계를 이끌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금강경(涵處序)에 「처일진위육합(處一塵圍六合)」이라는 말씀이 있다. 「한 티끌에 처해 있되 동시에 六合을 갈무리고 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세밀할 때는 티끌 속에 들어가 있지만 클 때는 삼천대천세계, 우주를 한 품에 감싸 안을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이런 광대한 포응력, 전 인류를 상대한 무변대해 같은 아량을 가져야만 인류 사회의 미래가 그래도 불행을 면하고 처참한 전쟁을 면할 수 있어 평화 지향의 희망찬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 불자들이 얼마나 역사의식에 투철하냐의 여부는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 국가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가지며 또한 인류 문화 내일의 명암을 판가름 할 만큼 중대하다.
여기서 우리 불자들은 민족의 역사를 빛낼 숙명적 책임이 주어져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