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숲과 신비로움이 공존하는, 실크로드의 거점 우루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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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숲과 신비로움이 공존하는, 실크로드의 거점 우루무치
  • 관리자
  • 승인 2008.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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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실크로드를 가다 11 / 중국 우루무치

▲ 새벽의 천산천지 풍경. 적요로 가득 차 있어 신비로웠다.
카슈가르에서 우루무치(鳥魯木齊)까지 기차를 타면 하루 종일은 달려야 한다. 남은 일정을 생각하면 시간과 에너지를 비축해두어야 할 것 같아,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우루무치 시가지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주도(主都)답게 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다.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의미를 지닌 우루무치는 당나라 때부터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서역 초원을 거침없이 질주하던 유목민족의 터전이었고,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칭기즈칸 제국의 중심 무대였다.

▲ 유목민이 되어 게르에서 하루 밤 잤다. 게르의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밤새 별이 쏟아졌다.
실크로드는 불평등 교역의 주범일지도…
숙소에서 밖을 내려다보니 홍산(紅山)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운 거리라기에 걷기로 했는데, 묻고 물어서 1시간이나 걸려 홍산에 도착했다. 그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산 정상에는 아편전쟁을 촉발시킨 임칙서(林則徐)의 동상과 9층의 진룡탑(鎭龍塔)이 있다. 산 정상에 서니 우루무치 시내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옛 실크로드의 정취야 찾아볼 수 없지만, 수많은 빌딩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으니 실크로드의 거점이었던 그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리석으로 조각된 임칙서의 동상 앞에서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을 떠올려 보았다. 영국으로 들어간 홍차(Black Tea)는 영국 상류층을 시작으로 일반서민들도 마실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영국의 차 소비량은 폭발적이었고 무역 적자를 가져왔다. 영국은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하였다. 중국에서 아편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아편중독자의 증가로 인해 나라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아편이 중국에 들어오는 그 가격만큼 중국의 은(銀)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갔는데, 은은 당시 청나라의 화폐로 사용되었기에 여러 문제점이 생겼다.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몰리자 황제(道光帝)는 강경한 아편 금지론자로 알려진 임칙서를 광저우에 파견하였다. 임칙서가 영국 상인으로부터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운 것이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은 이로 인해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게 되었다. 중화사상에 젖어있던 중국인들에게 치욕과 굴욕을 안겨주었던 전쟁이었지만, 대영제국을 향하여 포효라도 해보았으니 임칙서를 길이 추켜세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을 출발하여 그 중간에 크고 작은 오아시스 도시국가를 거쳐서 로마의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게 되는 길을 말한다. 당서(唐書)의 회흘전(回紇傳)에 의하면 7세기 후반에는 당나라와 위구르 사이에 견마(絹馬) 교역이 성행하였다. 그때 말 1마리는 비단 40필에 해당하는 시세로 거래되었는데, 준마가 필요했던 당 조정은 매우 고심하였다고 한다. 말과 맞바꾼 비단은 위구르에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아랍인들의 손을 거쳐 로마까지 가게 되었다. 비단무역의 실권을 쥐고 있던 위구르가 얼마나 막대한 이익을 얻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 당시에도 그런 불평등의 무역이 이루어졌듯이, 현대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있겠는가 싶다. 지금도 자유무역이라는 깃발 아래 지구의 어느 곳에서 아편전쟁처럼 불평등무역이 자행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 홍산에서 내려다 본 우루무치 시가지 전경. 빌딩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 위구르인의 주식인 낭을 우루무치에서도 볼 수 있었다.

머리에 깃털을 꽃은 누란의 미인이여!
2005년 9월에 신관을 오픈한 우루무치 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의 보고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당대의 문화유산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내에서 사진 촬영이 일체 금지되어 있으니 가슴에 담아올 수밖에 없다.
풍속관에는 위구르, 키즈키르, 타지크, 카자흐, 몽골, 러시아 등 신강성 12개의 소수민족들의 생활상을 사진, 모형, 실물 등 다양한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동서교역을 이끌면서 독특한 서역문화를 꽃피웠을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국가들이 중국 역사로 편입되어진 채 박물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역사관에는 신강 지역에서 발굴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간다라미술양식을 띤 불교조각들이 많았다. 기억에 남는 전시품은 아스타나 묘지에서 발굴된 당나라의 과자와 낭 등 먹을거리다. 정교한 꽃무늬가 찍힌 과자에 붙여진 이름이 ‘화식(花式) 점심(點心)’이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점심’이 당나라의 과자에서 유래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덕산 스님의 점심 일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2층은 미라관으로 특히 ‘누란의 미인’은 이 박물관을 대표하고 있다. 군인출신의 남자 미라, 눈 위에 까만 돌을 올려놓은 아기 미라 등 8구의 미라가 전시되어 있다. 전설 속의 나라로만 여겼던 누란(樓蘭) 왕국을 1899년 스웨덴의 ‘스벤 헤딘’이 발견하였다. 누란국의 멸망 원인은 두 가지인데, 오아시스의 부를 탐내는 한나라와 흉노의 끊임없는 침공으로 망했다는 설과 로마노프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물이 말라버려서 멸망했다는 설이 있다. 해오라기 깃털을 머리에 꽂고 털실로 짠 옷을 입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마흔 살의 ‘누란의 미인’은 이름과 달리 예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 당시 누란의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은 깃털을 머리에 꽂고 있는, 사랑을 받은 여인이었기에 사람들은 미인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 같다.
수천 년을 떠돌다가 지금 이곳에서 수천 년 전의 내 육신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면 시간은 빛을 잃는다.

천산천지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온 몸에 받고자
칠흑 같은 밤하늘에 하현달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담요로 온몸을 감싸고 천산천지를 향하였다. 일출을 보겠다는 욕심보다는 영산(靈山)이라 일컫는 천산천지의 새벽 기운을 느껴보고 싶었다. 밝지 않은 달빛을 이용하여 천천히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을 찌를 듯 위로 치솟은 가문비나무들이 어둠에 어둠을 더하고 있다.
가파른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는 듯 모든 소리를 삼켜 버렸다. 천산의 중턱쯤에서 침엽수림에 둘러싸인 소천지를 만났는데, 진초록의 물빛과 함께 태고의 신비를 느낄 수 있었다. 만년설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물결은 등산로를 점령하면서 거칠게 흘러내렸다. 신발을 벗고 계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건너고 작은 개울을 건넜다. 발목이 끊어질 듯 차가웠지만 만년설 녹은 물에 발을 적신다는 것이 신성한 기운을 받는 것이라 믿기에 기꺼이 견디어냈다. 어둠이 옅어지면서 동녘하늘이 서서히 밝아왔다.
천산천지는 어제의 분주함을 다 잊은 듯 태고의 적막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보코타 봉을 한참동안 마주하였다. 천지의 물결은 잔잔하였고, 그 위로 햇살이 내려앉아 생명을 더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주나라의 목왕이 서역을 둘러보고 가던 중 서왕모가 천지에서 목욕하는 자태를 보고 반해 같이 놀다가 돌아가지 못했다는 전설이 어려 있다. 한 노인이 말을 타고 유유히 천지 주변을 지나가고 있다. 아, 저 노인이 새벽에 말을 달려 서왕모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은 아닌지….

▲ 천지의 일출은 화려하고 장엄하지는 않았지만 생명 에너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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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정 _ 1998년 「수필공원」으로 등단하였고, 현재 지하철 ‘풍경소리’작가이자 편집위원, 현대불교신문 객원기자, ‘사진집단 일우’ 회원이다. 저서로는 인도 네팔 기행집 『신들의 땅에서 찾은 행복 한 줌』, 금강경 에세이집 『마음의 눈』, 『당신의 아침을 위하여』, 『잣나무는 언제 부처가 되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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