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도 근육이 있다. _
무자(戊子)년 새해, 새날, 새벽, 한강에서 중랑천까지 나는 죽음처럼 고요한 신 새벽 한강 고수부지를 혼자서 걸었다. 새벽 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 길과 나만의 외로운 조우. 그리고 긴 동행. 그 네 시간 동안의 고독한 걷기는 마침내 죽어 있던 내 길의 근육을 되살렸다. 새해, 새날, 새벽의 그 고독하고 혼곤한 걷기는 내 몸의 피톨에 인생이란 모험의 생기를 다시 불어넣은 것이다.
그 새벽, 나는 도루코 면도날처럼 볼때기를 에는 칼바람 속을 발바닥으로, 허벅지로, 온 몸으로, 온 가슴으로 걸으며 흘러가는 한강물에 다짐했다. 올 한 해는 아무리 추워도 너처럼 얼지 않은 근육으로 흘러가겠다고. 그 동안 가정과 사회에서 짊어졌던 모든 의무와 책임을 강물 위에 부리고 나만의 길을 나만의 두 발로 당당히 걸어가겠다고. 그리하여 그 동안 반(反) 생명으로 억눌렸던 내 몸과 마음의 모든 체면과 형식도 길 위에 모조리 부려놓고, 걷고 싶을 때 당당히 걷고 쉬고 싶을 때 당당히, 그러나 편안히 쉬겠다고.
그렇게 내 여정의 지도책과 나침반은 마련되었다. 길과 몸이 지도책이 되고 마음이 나침반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그 나침반이 가리키는 한 방향만을 좇아 열심히 걸어가면 되었다.
침몰하기 직전의 배가 닻을 던지듯 _
첫 여정은 전남 여수 돌산도 향일암(向日庵)이었다. 10대 소녀의 초경(初經)처럼 비릿하면서도 아스라한 몸과 마음의 관능을 향한 첫 여정으로 향일암 길을 택한 것은 15년 전 그 길의 싱싱하고 통통했던 육질(肉質)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1993년 겨울, 알코올의존증과 우울증이라는 반(反) 삶의 늪에 깊이 빠져 있던 나는 침몰하기 직전의 배가 닻을 던지듯, 새로 뜨는 해를 안아보기 위해 간장 종지만한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던 터였다.
삶. 지난 1993년 이후,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행운이자 기적이었다. 지난 15년 동안 나는 몸과 마음의 무게에 짓눌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면서도, 때때로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의 기특한 행운에 즐겁게 노래하고 춤출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 삶에 거미줄처럼 가느다랗게 살아 스멀거리는 권태의 희망과 생의 희열에 기꺼이 뜨거운 눈물을 머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30년 넘게 우울증을 앓아왔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내 삶에 대한 우회적인 사랑의 표현방식이기도 했다. 피에르 쌍소의 축원처럼 ‘삶, 그것은 마치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다가오고, 햇살처럼 좍 퍼져 나갔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세차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이거나 거세게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이기보다는 섬세한 물방울 같은 것이고 부드러운 빛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15년 전의 체험 때문일까? 향일암 가는 길의 육질은 많이 성겨 있었다. 지독한 알코올의존증과 우울증이 내 삶의 무게중심을 흔들어놓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임포 바닷가의 근육은 지금보다 훨씬 싱싱하고 연했다. 임포 바닷가의 짙푸른 보리밭과 동백숲, 목선은 아날로그적 풍성한 속살과 부드러운 졸깃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임포는 밴댕이 젓갈 고린내 고소하던 그 깊은 민박집과 보리밭 고랑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거대한 대게 껍질 같은 디지털로 잘 포장된 숙식업체와 갓김치 등 토산품 판매장으로 완전히 변신해있었다.
그러나 육질이 바뀌었다고 길의 관능마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금오산 향일암(金鰲山 向日庵)’이라 쓰인 일주문을 지나 297개의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내 마음의 근육세포가 한려수도의 맑은 갯바람을 마시며 몸 바깥으로 새록새록 생명의 새순을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108염주 세듯 나는 돌계단을 하나하나 세며 올랐다. 돌계단 한 알에 나의 형식을 부리고, 또 돌계단 한 알에 나의 체면과 허위를 부리고, 또 돌계단 한 알에 나의 허세와 지위와 욕망을 부리고 해탈문 앞에 이르렀을 때, 뚱뚱했던 내 마음의 비계 덩어리는 연소한 지방질만큼이나 체중감량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향일(向日). 이 신 새벽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아직 뜨지도 않은 해를 저리도 열심히 바라기하고 섰는가? 대웅전 앞에도, 관음전과 종각과 삼성각 앞에도 해뜨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게 바구니를 엎어놓은 것 같다. 나 역시 한 마리 농게가 되어 대웅전에 합장한 뒤 거북이 잔등을 타고 대웅전 뒤편 원효 스님 관음전으로 오른다.(참고로 향일암에는 관음전이 대웅전 앞쪽과 뒤쪽 두 군데 있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전이 원효 스님이 기도했던 관음전이다.)
1,364년 전 원효 스님은 이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일망무제 끝에서 떠오르는 시뻘건 해를 기다리며 마음속의 근육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그날 신 새벽에도 저렇게 금오산 돌 거북의 긴 목을 끼고 돌아 출항하던 고깃배들은 수평선 아래 가라앉은 해를 투망으로 건져 올리려 했을까? 온몸에 동백꽃 붉은 선혈을 뚝뚝 흘리며 그날 아침에도 돌 거북은 더 이상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임포 바닷가에 묶인 채 목을 늘여 빼고 버둥댔을까?
생생지락(生生之樂)이라. 향일암에 오르는 동안 나는 정말 내 생의 모든 껍데기를 돌계단 위에 부려놓고 왔을까? 내 생의 모든 의무와 책임과 체면과 형식과 허세와 욕망의 허물을 297개의 돌계단 위에 아낌없이 벗어두고 왔을까? 그때 문득 포말로 부서지는 내 마음의 근육 위로 박두진 시인의 시뻘건 ‘해’ 한 덩어리가 패러디 되어 선혈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고운 얼굴로 향일암 붉은 해야 솟아라. 수평선 너머 수평선 너머서 내 마음의 어둠을 살라먹고, 수평선 너머서 밤새도록 내 어둠의 근육 도 살라먹고, 이글이글 싱싱한 얼굴 동백꽃 같은 붉은 해야 솟아라.
아픔이 싫여, 아픔이 싫여, 어둠 같은 눈물의 골짜기에 아픔이 싫여, 아무도 없는 수평선에 아픔이 싫여…
해야, 향일암 시뻘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향일암이 좋아라. 훨훨훨 돌 거북 헤엄치는 향일암이 좋아라, 향일암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
해야, 향일암 시뻘건 해야. 향일암 시뻘건 해야 솟아라. 아픔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돌 거북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앳되고 고 운 날의 맑고 밝은 행복을 누려보리라.’
원효 스님 좌선대에 앉아 박두진 시인의 ‘해’와 놀고 있는 동안 금오산 8부 능선의 경전바위(흔들바위)도 맑은 갯바람 속에 연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팔만사천 중생을 위한 관음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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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_1986년 서울신문에 시와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각각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수렵도』 『퍽 환한 하늘』 『아무도 너의 깊이를 모른다』 등과 동화책으로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발가락이 꼬물꼬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