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뜻을 이으려는 원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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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뜻을 이으려는 원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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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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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모 (欽慕) - 용성 스님의 제자 동헌 스님

화엄사로 가는 길, 섬진강 물결 위로 문득 메마른 음성 하나가 일렁거린다. “동헌아. 나는 내일 새벽에 가련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구나. 더욱 더 수고해다오.” 용성 스님의 마지막 음성이다. 격동의 세월을 함께 하며 스승을 따라 기꺼이 가시밭길을 걸었던 제자 동헌 스님을 그렇게 마른 눈빛으로 쓸어안으며 용성 스님은 금생의 인연을 회향했다. 1940년 2월 24일, 세수 77세, 법랍 61세셨다. 참으로 치열했던 삶과 수행이었으나, 당신이 그토록 간절하게 서원했던 조선의 자주독립과 전법도생(傳法度生)의 원력, 그 어떤 결실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길이었다.
용성 스님은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고 동헌 스님 또한 용성문하에서 오도송을 터트렸으니, 이별을 당함에 있어 선사들의 마음자리가 어떠했을지 어찌 섣부르게 짐작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동헌 스님은 당시의 슬픔이며 회한을 누구에게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오랜 세월을 묵묵히 걸어 그 절절한 회한과 흠모의 마음을 비춰보였을 뿐이다.
“승사원중(承師願重: 스승의 뜻을 이으려는 원이 무겁다)! ‘동헌 노스님’ 하면 전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스승의 뜻을 잇고자 하는 원이 한없이 크고 무거웠던 어른, 참 지극하셨거든요.” 손상좌 되는 학담 스님(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의 회고이다. 1983년 동헌 스님을 떠나보내고 학담 스님은 찬게(讚偈)를 썼다. 쓰고자 애쓰지 않았고 기교를 부리려 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생전의 모습이 한편의 시처럼 단출했고 그 뜻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용성문하의 빛이요, 용성의 뛰어난 장수
동헌 스님은 화엄사 조실로 주석하며 선객으로서 당신의 선지를 뚜렷하게 드러냈지만, 언제나 용성 스님의 제자로서 당신의 자리를 삼았던 어른이다. 동헌 스님이 용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던 것은 1924년, 스님 나이 스물아홉 때였다. 그러나 실제로 용성 스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17년이었다. 경술국치로 일제의 서슬 퍼런 총칼이 이 땅의 말과 글과 생각의 어로마저 끊어놓았고, 종교동화정책으로 한국불교는 그 명맥마저 장담키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무렵 용성 스님은 대각사에 주석하며 새로운 시작과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찍이 23세에 오도견성하고 30여 년을 수좌로서의 길로만 걸어왔던 선객이었지만, 한일합방을 당하여 스님은 오랜 산중생활을 정리하였다. 서울로 입성하여 구국의 길이요, 불교개혁의 첫발을 내딛는 참이었다. 그 시절 용성 스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으니, 동헌 스님이 가야 할 수행의 길이 어찌 평탄할 수 있었겠는가.
“수행하려고 스님이 됐는데 매일 독립운동 자금 전달하랴, 스님 역경 불사 도우랴, 내 공부는 언제할까. 그것이 큰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다.” 동헌 스님은 언젠가 상좌 도문 스님(죽림정사 조실)께 그렇게 당시를 회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저하고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용성 스님은 33인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곧바로 1년 6개월간의 옥중생활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동헌 스님은 매일 서대문 형무소을 찾아가, 만나뵐 수 없는 스승을 그리워하며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홀로 예를 올리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중에 일본인들의 획책으로 스님이 주석하시던 대각사가 일본인들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으니 제자의 마음은 끊어지는 듯했다.
“1921년 3월 용성 스님께서 출옥을 하셨는데 막상 모시고 갈 곳이 없는 겁니다. 동헌 스님 마음이 얼마나 죄스러우셨겠습니까? 그렇게 3년여 동안 은사를 모시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절치부심한 끝에 빼앗긴 대각사 바로 옆에다 다시 대각사 현판을 걸었으니, 그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도문 스님의 눈물 젖은 회고였다. 그날 동헌 스님은 용성 스님께 다시 계를 청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24년 정식으로 계를 받게 된 것이다.
도문 스님은 동헌 스님을 만나려거든 용성 스님을 먼저 보라고 말했다. 화두가 따로 없는 말이었다. 용성 스님은 어떤 분인가. 동헌 스님의 손상좌 되는 보광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은 말했다. “만약 용성 스님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지 않았다면, 만약 1년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한국불교의 비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만큼 용성 스님은 옥중생활 동안 많은 자극을 받았고 그 결과로 경전의 한글화, 도심포교, 찬불가 보급 등 새로운 불교를 향해 큰 걸음을 내딛었다. 뿐이랴. 일본의 종교정책에 강력히 항의하는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해, 마침내 봉암사 결사정신으로, 또 불교정화운동으로 회향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고단했던 여정이었겠는가. 당신의 삶과 수행도 그러하겠고, 그 제자들의 고단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용성 스님이 날마다 쏟아내는 원고며 번역글을 감당할 수가 없어 어느 제자는 스승 몰래 원고를 불태워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출판비를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원고들이며 노래집들, 그리고 스님의 모든 뜻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겼던 제자가 바로 동헌 스님이다.
그런 중에 동헌 스님은 용성 스님에게서 틈틈이 치문, 사집, 사교, 대교까지 경전 공부를 마쳤다. 1926년 건백서가 제출되던 그 해, 마침내 오도송을 터뜨렸으니 스승에게 올리는 최고의 답가였고 찬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후로도 동헌 스님은 양평 수종사에서 10년 동안 묵언정진 등 끝없는 보림(保任: 깨달은 경지를 잘 보호하며 닦아가는 것)의 기간을 거듭, 수많은 납자들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 용성 스님 진영

“내 명이 다하는 날까지 스님을 모시고 그 명을 받들리라”
용성 스님 생가를 복원해 새롭게 단장된 죽림정사를 찾았다. 용성 스님의 기념관으로 들어서니 스님 유품들이 나란히 줄지어 지난 세월을 비춰 보인다. 주장자, 염주, 그리고 빛바랜 친필 원고들….
“용성 스님의 모든 유품들은 다 동헌 스님이 간직해온 것들입니다. 원고 하나, 글씨 한 줄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한결같은지 곁에서 보면서 아니까, 그 뜻을 잇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도문 스님은 훌훌 수좌로서의 길을 떠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고 했다.
“동헌 스님은 일거수 일투족이 선으로만 이어졌습니다. 어쩌다 말문을 여셨을 때는 용성 스님의 유지를 전하셨구요. 참으로 적적한 어른이셨습니다. 그래도 1969년 대각회를 창립하던 날, 그 날만은 좋은 마음을 내색하셨어요. 오랜 짐을 내려놓으시던 날이었으니까. 우리가 다 기뻤죠.” 용성 스님 열반 30년 만에, 독립된 이 땅 위에서 스님의 대각사상을 다시금 밝힌 것이다. 동헌 스님의 승사원중, 그 무게가 조금은 덜어진 날이었을 것이다. 화엄사 염화실에서 마지막 가시던 날도 동헌 스님은 당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부처님과 조사가 다 말했는데 더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도문 스님도 그렇게 스승을 떠나보내던 날 다시 옷깃을 여몄다. “대각사를 잃고 애통하시는 용성 스님을 뵈면서, 동헌 스님은 마음으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내 명이 다하는 날까지 스님을 모시고 그 명을 받들리라. 그리고 그렇게 가셨습니다. 우리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분명해지는 순간이었죠.”
실제로 동헌 스님의 상좌며 손상좌들은 모두 용성 스님의 대각사상을 알리는 데 전념해오고 있다. 상좌인 도광 스님은 동헌 스님이 주석하셨던 화엄사를 화엄도량으로 장엄했고, 도문 스님은 용성 스님의 유지를 따라 초전법륜지를 성지화하는데 전념해왔고, 손상좌되는 학담 스님은 용성 스님의 각운동을 실천하고, 보광 스님은 강단에서 용성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전하고 있으니, 용성 스님에게서 동헌 스님의 체취를 보라던 뜻을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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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스님 _ 1864년 출생. 1883년 오도 이후 선풍을 크게 떨쳤다. 1910년 이후 독립운동가이자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안으로는 깨어있는 불교를 주창했던 불교개혁의 선봉장으로서, 한국불교 근현대사 최고의 선지식이요, 선각자였다.

동헌 스님 _ 1896년 출생. 1924년 용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26년 오도견성했다. 1969년 대각회를 발족하며 용성 스님의 유지를 발현하였다. 종단의 원로의원이자 화엄사 조실로서 수행자들의 사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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