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본것 처럼 향가는 거의 전부가 불교의 진귀한 사상과 배경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 까지에서 든 것은 삼국유사 소재의 향가만을 대상한 것이다. 즉 유사에 실린 향가 14수를 거의 다 언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가 중 가장 오래된 서동요만을 빼놓고는 다 언급한 셈이다. 물론 전부를 다 똑같이 음미하지 않고 불교 사상이 짙은 것이나 승려들의 작, 또는 이론 전개의 편의를 따라 중점적으로 감상해 왔다. 그러니 경우에 가서는 소홀히 다룬 것들도 없지않다. 그러나 불교적 관계만은 빼놓지 않았다. 서동요도 김동우씨같은 이는 이를 관음사상으로 까지 보고 있기 따문에 앞에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가요이기도 했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배경이나 사상 내용에 있어서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이어서 여기서 유일하게 제외한 것이다.
향가 전부가 일단은 불교적 측면에서 감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유사향가 전부가 일단은 다 불교적 측면에서 감상해 볼 수 있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다음 향가 25수 중 11수에 속하는 균여의 보현행원가는 다 균여전에 의한 것들이다. 이것은 물론 한 승려의 화엄사상에 입각한 가장 결론적인 가요라고 해도 좋기 때문에 불교 사상이 가장 짙은 것이기도 하는 것이다.
균여는 향가의 형태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가요를 지은 스님으로 국문학상, 불교사상 그 미친 영향은 크다. 신라 경명왕 7년, 고려태조 6년(923) 황주의 북쪽 형악에서 태어나 나이 15세에 형 희균사를 따라 복여사의 식현화상에게 득도, 다시 영통사의 의순사에게 수학한 한국에서 의상을 이은 대화엄사상가다.
의상이 최치원에 의해서 알려지고 균여가 혁연연에 의해서 알려졌지만 이들은 다 한국 화엄사상의 2대가임은 틀림없다. 균여는 수현방궤, 교분기석, 삼보장기, 법계도기 등 무려 60여권의 화엄관계의 저술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균여는 이 방대하고 심오한 화엄사상을 정리하고 기술하는데 있어서도 다만 사상 자체의 규명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사상의 대중 전달에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대화엄긍좌원통양중대균여전」의 <입의정종분>이나 <해석제경분>, <가행화세분> 등을 보아도 대사의 화엄사상이 현실성에 입각한 대중에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사는 이 60여권의 화엄논서를 기석함에 있어서 그것을 일반의 서민이 알아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당시의 방언문자로 이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보현행원가도 역시 이독문으로 일반 서민에게 신(信)을 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작가(作歌)한 것이다.
때문에 균여는 대화엄사상가 이상으로 민족문학가로서 또한 대중문학가로서 국문학상 더욱 혁혁한 공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사(師)는 오직 <홍법이인>을 위하여 서민이 알기 쉽게 이두문으로 경론을 주석하였고 11수의 보현행원가도 지었다. 당시 균여의 사뇌가가 얼마나 일반 대중에게 보급되었는가는 <가파재인구 왕왕제장벽>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이 보현행원가는 모든 사람의 입에 불리워 졌고 또 모든 책장이나 담벽의 이곳 저곳에도 붙어져 그 성행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보현행원은 화엄경 제40권에 설한 보현보살의 10대원이다. 대사가 이 보현행원을 화엄종가로써 대중에게 보급시킨 것은 이 보현행원이 선재동자가 만난 53 선지식의 결론적인 사상이기도 한 때문이다. 즉 이 행원은 중생에 임하는 실제 행으로써 대중의 구제에 직결되는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사의 이 목표는 그대로 적중 되었다. 이 가요는 질병도 낫게 하고 재앙도 없애 주는 신비적 대 위력을 가지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외워졌던 것이다.
이 이독체의 보현행원가가 한림학사 최행수의 손에 의하여 7언8구의 한시체로 번역되었을 때 중국인이 비로소 이 훌륭한 내용을 알게 되어 송조의 군신은 이 사뇌가는 반드시 진불이 출현하여 지은 것이라고 고려에 곧 예사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조에서는 대사의 용모가 너무 험상하게 생겼었기 따문에 그들의 면회를 꺼려함을 알고 대사는 이 예방을 피해 만나주지 않았던 것이다. (대사는 태어났을 때 용모가 너무 추해 낳자마자 부모의 손으로 거리에 버려졌으나 두 마리의 새가 날아와 날개로 이를 보호하는 것을 보고 행인이 부모에게 알려 다시 찾아와 길러졌다.)
이리하여 송사(宋使)들은 <어느 곳에 가서 부처를 만나 뵈올까.> 눈물을 흘리며 돌아 갔다는 담화가 그 전에 나오고 있었다. 실로 균여의 덕망이 얼마나 높고 그가 지은 보현행원가가 얼마나 격조 높았는 가를 알 수 있다.
여기 보현행원가의 첫째 예경제불원만을 들어보면
마음의 붓으로 그리운 부처님전에 절하옵는 이몸
법계 끝까지 이르거라.
일체진진의 모든 불찰이 찰찰마다 모시옵는
법계에 가득 찬 부처님,
구세에 다하도록 예경하고 싶소이다.
아, 이 몸과 말 뜻은 쉼 없이 오로지,
부처님께 사모하고 싶소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보현행원가는 모든 고려인의 마음을 적시고 이웃 송나라에 까지도 극찬되어 애송되었다. 대사의 깊은 철학과 함께 문학적 소양이 어떠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균여는 대화엄사상가, 민족문학가, 대중문학가로 공적을 남겼다.
한편 대사는 이러한 깊은 화엄의 사상과 문학적 감흥으로 서민 대중을 이끌려는 것만이 아니었고 실제 행동으로서도 당시 분쟁을 계속 해 오던 파쟁을 해소 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신라말 가야산 해인사에는 관혜를 중심으로 한 남구파와 희명을 중심으로 한 북구파의 두 화엄종파가 있었다. 균여는 북구파의 법손으로 이들 파벌의 심한 알력을 무마시키는데 진력했던 것이다.
당시 관혜공은 백제 견훤의 복전이 되고 희명공은 고려 태조의 사사가 되었는데 이들의 반목 대립이 너무 심했다. 고려 건국 후에 그 풍조가 가시지를 않았던 것이다. 균여는 이를 개탄한 나머지 수좌 인유와 함께 명산대찰을 돌아 다니면서 설득 작업에 나섰다. 또 민간에도 순방하여 열심히 설교한 결과 승속이 다 이를 이해하게 되어 오랫동안 고질화 되어 온 종파간의 알력과 분쟁은 완전히 종식된 것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기틀이 불교가 된 것처럼 이 후삼국의 난세를 평정하고 새로운 통일 국가를 세운 고려가 다시 불교적 치국의 이념에 의해서 다스려 졌다. 이를 위하여 균여가 나타나 다시 분파 분쟁으로 복잡했던 불교계를 정화하고 보현행원가를 지어 불교를 대중화하였으며 방언문학으로 민족정신을 불러 일으키게 한 그의 공적은 참으로 의의 있다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찬란했던 신라의 불법이 신라말에 접어 들면서 쇠잔했던 그 시점에 민족과 정세들을 새로 통일한 고려대업의 기초, 다시 이러한 대중을 일깨우는 고승 균여가 나타나 그들을 이끌었다는 것은 한국불교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전(傳)의 변역생사분에 보면 대사의 전신은 비파시불로서 삼국통일 후에 불교가 미여한 것을 보고 송악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신 일본으로 전생해 간다는 에피소드가 나오는 것을 보아도 이 대사의 출세 목적관이 어떤 것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다음 균여의 향가는 보현행원가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이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이 균여의 향가로 인해서 사뇌의 뜻이 분명해 지고 그 의의도 확실해 진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사뇌는 향가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이 뜻을 傳에는 분명히 <의정어사고운뇌야>로 밝혀왔음에도 현대의 국문학자 들은 대부분 이 어의와는 아랑곳 없이 오직 차음적 해석에만 급급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이 사뇌는 향가에 있어서 가장 발달된 형식으로 하나의 훌륭한 시격이 되기도 한 것인데 이 훌륭한 시격은 대사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야인희락지구 보륭수행지추>로써 <사청구려>하여 얕은 데서 깊은 데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점차 근기를 맞춰 중생을 제도하는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 사뇌의 어원에 대해서는 당초 원효의 「시수뇌」와 일본 가상천황은 서기 946년에서 966년 사이니 균여보다 앞설 수는 없다고 해도 원효의 「시수뇌」는 당초의 것으로써 이 시수는 결코 어떤 차음적인 원류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 수뇌 문자 자체에 의미를 가지고 하나의 문학론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그 내용도 가요 형식에 대한 이론으로서 이것은 가요 형식을 주로 한 논리 정연한 가론이라는 점에서 일반 가요의 뇌수가 되는 중심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균여는 분쟁으로 복잡했던 불교계를 정화하고 불교를 대중화 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가 형식의 이론도 전개되어 있다는 점에서 수뇌는 가장 발달된 가요 형식의 수뇌라는 이론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더욱 최행수의 말에 <호칭사뇌가기정관지사>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사뇌는 당초정관의 시, 원효의 수뇌의적 시론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균여의 사뇌가 이 당초에 써진 수랍에서 온 것이라 생각되며, 수뇌, 사뇌는 그 어감도 뜻도 비슷하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사를 <의정>이라 주한 것을 보면 이 가는 곧 의정체인 수로서 사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오히려 사뇌는 수랍보다 더 한층 발전된 문학적 용어가 아닌가 생각된다. 향가 25수중 균여의 보현행원가 11수가 10구체로서 가장 발달된 대화엄사상가 민족주의자이면서 대문학을 낳고 향가를 결론 지어준 위대한 스님이다. 다음 직접 그 보현행원가를 음미해 보기로 하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