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교학자도 아니요, 승적을 가지고 있는 승려도 아니다. 돈독 탁월하게 불심을 지닌 사람도 아니요, 부처님의 대자 대비한 은혜와 슬기로움과 위대함을 아직 다 느끼고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심오한 불교의 교리도 연구 터득하지 못하고 있는 아주 풋내기 평범한 불교신자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러한 주제에 감히 한국불교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겠는가? 정말 주제넘는 일이요, 외람스럽기 그지없는 가소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만 어려서부터 부처님께 귀의하려고 애를 써왔고, 수많은 사찰 법당을 찾아다니며 부처님과 가까이 하고 부처님을 정성껏 섬기려는 심정에서 내 나름대로 무척 고뇌의 심해를 헤매기도 하였다. 거기에서 이루어진 듯한 심신의 가느다라한 실마리와 한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주변 국가인 일본, 자유중국, 월남 등의 불교 숭앙의 나라를 다니며 불교에 대한 상황을 바라본 일과 그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불교를 깊이 연구하지 못한 사람의 측면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소견을 펴내는 것도 한국 불교의 중흥과 장래 시책에 있어서 다소 참고가 되리라 믿고 감히 외치는 바이다.
그런 뜻에서 한국 불교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를 간추려 사견을 펴 볼까 한다.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이다. 문헌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 이전에 전래 보급된 것으로 안다.
1600여년 면면히 그 생명을 유지하고 전통과 역사를 이룩하여 온 불교는 한 때, 억불숭유의 정책으로 천대와 가진 억압을 당한 일이 있으나 그것은 오히려 불교의 잠재력을 더욱 길러 불심은 더욱 두터워지고 불제자는 늘어 오늘의 한국 불교의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불교의 심오한 교리와 사상은 한국민족의 사상과 감정과 의사에 뿌리깊이 배고 스며들어, 뼈와 살이 되고, 그 근원이 되어 민족 고유의 찬란한 문화를 형성 발전시켰으니 불교야 말로 한국민족 문화의 모체요, 민족 중흥의 원동력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원래 원시적인 무속적 금기적 신앙에서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종교 신앙으로 이끈 것도 불교요, 유교와 도교 의식을 습합(習合)시켜 ( 유, 불, 도교 습합) 정당한 그리고 한국의 풍토와 민족의 생리에 맞는 불교 의식 또는 불교로 정립 정착시킨 것도 불교의 위대한 힘이다.
고승 대덕들이 나와 겨레와 국가를 교화 수호하고, 대내 대외적으로 불교 문화를 전달 보급하여 국위를 떨쳤으며, 신라의 호국 불교가 삼국을 통일하고, 밸제의 불교 문화 전달이 오늘의 일본 문화를 형성시켰으며 고려의 국교로서의 불교가 차지한 역사적 업적이며, 이조의 승병이 왜적을 물리치고 그들을 싸늘하게 한 것은 현대의 우리를 마련한 혁혁한 공적이요, 찬란한 빛이다.
이렇게 위대한 전통과 역사를 유지, 전승, 발전시킨 것은 말할 나위 없이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다. 이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스님이다. 심산 유곡 그윽한 속에 파묻혀 오로지 수도에만 힘쓴 수도승이며, 가두에 나와 포교에 한 평생을 바친 포교승이며, 불제자를 양성하기에 온갖 정력을 다 쏟은 교화승이며, 일단 유사시에 의연하게 출전한 의승이며, 사찰의 건축과 증축, 보수에 힘써 불교의 전당을 마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스님, 천재 지변을 당하거나 환난을 당하고 있는 불쌍한 겨레를 구하기에 진력한 스님 등 수많은 훌륭한 스님들이 때로는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때와 장소와 대상과 상황을 불문하고 희생적으로 스님의 사명을 다하여 왔고, 현재도 그렇게 실천하고 있기에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손을 모아 경건히 스님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공적과 빛내임을 자랑하거나 현실에 안일해서는 아니된다. 과거를 냉정하게 분석 평가하고, 현실을 통찰하며, 미래를 원시안적인 면에서 바라보아 좋은 점은 더욱 유지, 보존, 실천하고 개혁할 점은 가차없이 영단을 내려 고쳐나가야 한다.
이하 한국 불교계의 당면 과제를 제시해 본다.
1. 불교의 대중화
현재 한국 불교가 대중화 되어가고는 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눈에는 아주 미미한 존재요 움직임이다. 왜 전국 방방곡곡 마을마다 절이나 법당이 없느냐 말이다. 동리마다 없으면 면 소재지나 군청 소재지에는 적어도 하나씩은 있어야 하지 않은가? 기독교나 천주교 등의 서양의 신교가 들어온지 100여년밖에 되지 않는데 그들의 교회는 거의 동네마다 서 있지 않은가? 불교는 우리 나라에 들어온지 1600여년이 되었다고 그 전통과 역사의 오래됨을 자랑하고 있는데 반하여 교세조직에 있어 잛??역사와 전통을 가진 신교에 뒤떨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고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고 하겠으나 하나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지도층에 있는 스님들의 무엇인가의 알력 다툼, 스님들의 안일한 정신자세, 불신도들의 소극성, 불교 행정력의 빈곤, 불교계의 대동 단결력의 결핍, 대중 속에 파고 들어 갈 수 있는 추진력의 빈곤, 포교, 교화, 설교, 선전, 포섭, 체제의 일원화 부족 등을 열거할 수 있다.
불제자가 되라고 하기 전에 여건을 조성하고 시책의 능동력이 필요하다.
가까운 일본에는 각 가정마다 부처님을 모신 불단이 설치 되어 있고, 가는 곳마다 사찰이요, 불당이 있다. 중국에 가 보아도 그렇다. 80여년이나 전쟁 속에 살고 있는 월남에서는 어떠한가? 집집마다 불단이 있고, 시가의 곳곳에 법당이 있어 신자들의 조석 예불은 물론이요, 수시로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염불 찬불을 하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먼 여행자를 위하여 도로변 곳곳에 조그만 불단을 설치하여 나그네들로 하여금 분향 합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네들은 우리의 처지보다 우리의 여건보다 월등 나아서 그럴까?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넓히고 불교의 보급 진흥을 도모하려면 먼저 그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절이나 불당 법당같은 것이 있어야하고 가정마다 불단(아주 간소한)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한 환경과 여건을 만들고 불신도의 확충과 교화 포교의 태세를 확립해야 된다. 말로만 불교를 믿어라. 불제자가 되어라 하지말고 그러한 여건을 조성하고 대중 속에 뛰어 들어가는 용감한 시책과 능동력이 긴급히 필요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