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태조가 고려조의 유습을 계승하여 불사를 존중하였지만 태종, 정종을 지내오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불교교세를 압박하여 불교는 큰 시련을 겪는다. 함허선사는 이런 때에 나서서 현풍을 진작하고 이조불교의 기초를 굳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 출생과 그 시대
함허선사는 고려말(우왕 2년, 서기 1326)에 지금의 충주에서 태어났다. 선사의 문인 야부가 지은 함허화상행장에서는 함허스님의 생애가 자세히 보인다. 「함허」는 스님이 머물었던 당의 이름이고 스님의 이름은 기화, 호는 득통, 송성은 유씨였다. 어머니 방씨는 아기가 없어 관음보살께 기도했더니 꿈에 성인이 아기를 안고 와서 주더라고 한다.
그때는 선왕 공민왕이 2년 전에 살해되었고 신왕 우왕은 12세. 사뭇 선대 이전부터 창궐했던 왜구는 더욱 격화하였다. 이태조가 고려왕조의 문을 닫은 것이 함허선사 십칠세 때다. 선사는 태종, 정종 대를 거쳐 세종 15년에 입적한다. 태종 대에 종래의 불교 11종을 7종으로 폐합하더니 세종 대에 이르러 이를 다신 선교 양종으로 폐합하였다. 유생은 불교를 질시하여 고승을 죽이고자 하고 배불의 기세는 나날이 기승을 부리던 그 당시 현풍을 진작하여 조도를 중천한 것이 함허득통선사다.
2. 출가 수학 오도
선사는 일찌기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뛰어난 자질을 촉망받았다. 21세에 벗이 죽는 것을 보고 세간무상을 느끼고는 생사해탈을 구할 뜻을 내어 마침내 1396년 관악산 의상암에 이르러 축발했다. 다음 해, 양주 회암사에 이르러 무학존자를 찾아 법요를 듣고 그 후는 제방을 유력하면서 오로지 근수 정진하였다. 태종 4년 회암사에 돌아와 한 방에 틀아앉아 거래 시청을 끊고 정좌하더니 드디어 홀연히 깨치고는 『걸음마다 홀연히 고개돌리니 봉우리는 구름 속에 솟아 있구나.』 하고 『이 한 사실뿐이다. 다시 또 있다면 그것은 허망한 것.』이라 하였다. 그 뒤 2년이 지나 대승사에서 4년동안 머물면서 반야경을 강하였고 그 후는 관음굴, 불선사, 인봉사 등에서 조풍을 드날리고 크게 교화하였다. 함허당은 연봉사에 있던 한 당에 붙인 이름이다. 이때 선사의 도명을 크게 떨쳤다. 선사 45세때 오대산에 이르러 공양하고 나옹선사의 영을 예천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신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스님의 이름은 기화, 호는 득통이라 하시오」한다. 그때까지의 이름은 수이, 호는 무준이라 했었다. 꿈을 깨고 나니 신기가 상쾌하여 허공에 오른듯 하였다고 한다. 그때는 세종 2년이었다. 세종대왕은 선사를 왕실 원당인 개성 대자사에 머물게 하고 선비의 추천법회를 청하였다. 종실, 왕자, 부마, 대군 등이 향을 받들고 법을 청하였던 것이다. 선사의 현묘한 설법에는 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4년이 지나 사퇴하고, 선사 48세 이후는 제산을 두루 다니며 인연따라 교화하였다. 하루는 교법을 진작하여 불일(佛日)을 다시 빛나게 하리라 생각하고 선사 56세 되는 세종 13년 화양산 봉암사에 들어갔다. 사우를 준수하고 크게 흥법할 것을 기약하더니 58세가 되는 4월 1일 암연히 떠나셨다. 임종에 이르러 탁연히 정좌하여 이르기를 『맑고 공적하여 한 물건 없고, 신령한 빛 밝고 밝아 시방에 사무쳤네. 다시는 생사를 받음이 없으니 거래 왕복에 걸림없어라.』 하였다. 선사의 저서는 퍽 많다. 어록 외에 원각경소ㆍ금강반야경오가설의ㆍ현정론 그 밖에 여럿이 있다.
3. 선사의 사상
선사 입적 이후 문인들이 함허당어록을 간행하여 그 판을 봉암사에 두었는데 오늘날 우리는 오대산 월정사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록에는 경찬ㆍ보설ㆍ천령법어 그 밖에 경계를 노래한 시귀를 수록한다. 실로 뛰어난 보문들이다. 법화경찬ㆍ원각경찬ㆍ대승기신론석제ㆍ영가집찬ㆍ미타찬 등을 보더라도 선사가 한갓 치우친 고선자가 아님을 넉넉히 보여준다. 특히 각지 산사에서 읊은 송은 선사의 진면목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에서 많이 보여지는 여러 추천ㆍ공양ㆍ법어 등은 선사가 지은 바로써 생사일여의 뜻을 밝게 나타내고 있음을 본다.
사는 도를 구하매 먼저 자성의 진면목을 구하여 이를 파득하고 마침내 심신의 경계를 벗어나 불과 법과 이가 통연히 일체를 이루는 경계에 이르고 다시 여기에서 뛰어나 이를 종횡으로 굴리고 노래하였던 것이다. 수행에 있어 오로지 참선하여 자성의 밝고 고요한 본래상을 파지하고 반야의 묘심이 나타나 대지가 그대로 정토가 되는 대자재를 이루는 것을 주창한다.
반야가 끝에 이르기를 『다만 눈의 티끌이, 자성의 밝고 빈 것을 막음으로 인하여 부질없이 허공에 꽃비를 보누나. 다만 눈 속에 헛 티끌 제하면 허공은 본래로 걸림없이 통했네. 손이 꿈깨고 원숭이 울음 그치니 온 눈이 청풍명월 가득하여라. 몇 사람이나 팔고 다시 또 샀던고. 끝없는 풍류가 여기에서 이누나.』 하였고, 『한 물건이 여기 있으니 형상과 이름이 없고 고금을 꿰뚫고 벗어났다. 한 티끌에 머물어 있되 5합을 두루했으며 안으로 온갖 묘한 것을 모두 갖추었고 밖으로 모든 기틀에 응하네 하늘과 땅과 사람에서 인군이 되고 만법의 왕이 되니 탕탕히 걸림없이 견줄 바 없고, 우뚝 솟아 더불어 짝할 바가 없네. 신이라 하랴. 그러나 아니니 우러러 보는 사이에 밝게 밝게 드러났고 보고 듣는 곳에 은은히 나타나네. 玄이 아닐까? 그러나 하늘 땅에 앞서 있어 그 시작이 없고, 하늘 땅에 뒤 하였으니 그 끝이 없는 것을. 그러면 空이냐? 有냐? 나는 그 도리를 알지 못할러라.
우리 부처님이 이 사이 도리를 얻으시어 널리 중생을 보시니 동품이로되 미(迷)했을 뿐이라. 탄식하여 이르시되 「기이하도다」 하시더라. 생사바다를 향하시어 밑이 없는 배를 저으시고 구멍없는 피리를 부시니 묘한 가락은 땅을 흔들고 법의 훈기는 하늘에 가득하네. 이에 이르러 미련한 멍청이가 모두 깨우치고 마른 나무 윤택하게 물 올랐으며, 온 천지 중생들이 모두가 제 자리 얻어 편안하네.
이 반야경은 묘한 가락의 흘러남이며 법의 바다 바로 그곳이로다…….』
이것은 저 유명한 금강경오가해설의 첫 구절이다. 너무나 유명한 글이다.
선사는 앞서의 반야가에서 본 바와 같이 천진명월을 귀히 여기고 종사의 본분을 피력한다. 모든 경을 강론하고 경계에 응하여 짓되 문자와 사량을 여의어 실로 격밖의 한 물건을 자재 희롱하여 경의 진의를 드러내고 숨은 뜻을 밝게 보여준다. 여기 금강경서를 보라. 선사가 말을 하고 생각하고 경을 논하는 자세가 이러한 것이었다. 또한 선사는 계행을 존중히 여겼으며 경전수행과 염불수행도 크게 권장하였다.
대개 고려조의 선종이 중국 원나라에서 정토염불문이 성행한 영향을 받아서 염불도 선종내 수행으로 받아들였떤 것이다. 그래서 선종 종사로 자타가 허락하는 나옹선사나 태고선사 어록에도 염불을 권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있었다.)
대개 선종에서 정토염불문을 받아들인 것은, 염불의 가르침이 평이하고 또한 간명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기 쉬웠던 것을 원용한 것을 넉넉히 알 수 있다. 선문이 그 단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하근기 사람을 섭수하지 못한다는 점을 염불문으로 보한 것이라고나 할까. 당시의 선이 대개 임제선을 중심하였는데 이것은 자력수행에서는 극치에 속한다. 타력수행의 극치라 할 정토염불문을 선종이 섭수한 것은 종분에서 일찍부터 종종 있어 온 일이나 이때만큼 선과 정토가 융합한 것도 드물 것이다. 정토 타력 수행은 아미타불을 밖으로 찾은 것이며, 선종의 정토염불은 아미타불을 안에서 본 것이다. 그리고 종사가 안팎을 보지 않는 입장에서 이를 기틀과 인연따라 활용하는 것이었다. 함허 선사도 건화문에 있어서 정토를 십분 활용하였던 것이다. 범부근기로써 참선하다가 공업을 이루기 어려움을 느낀 자는 교도 수행하고 다시 염불에 힘써 내생 인연을 지으며 죽음을 당하여서 염불하여 왕생을 기역한 것은 당시의 선문중에 있어 범상인의 수행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어록 가운데에 나오는 爲尙愚上菴和尙下語에서도 역력히 보는 바이다.
함허선사도 이와같이 염불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미타찬도 이런 입장에서 지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선사는 염불을 권하되 단순한 서방근락의 아미타불을 부른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인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선사의 염불관이다.
미타찬에는 『10선과 5계를 가지더라도 오히려 고를 면치 못하며, 10악을 범하고 5역죄를 지으면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지나 아미타불 명호를 잠깐 부르면 지은 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모두가 삼계고해에서 벗어나니 이 어찌 희유한가.』한 점은 보통 염불가의 주장과 같지만 미타찬 끝부분인 高超圓證에는 『대용맹이시며 대세력의 왕이신 무량수 무량광 아미타불. 그 무량공덕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은 사람마다 누구나 원래로 구족한 것, 부처님이 먼저 두렷이 이루시니 아! 희유하여라. 마음이 정토여, 자성이 미타라. 마음이 정토요 자성이 미타라. 부처님과 깉이 나도 함께 이루리.』 하여 자성미타 유심정토를 역설한다. 앞서의 上菴화상을 위한 법어 끝머리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염불하며 부처님을 따라 왕생하는 생각을 짓는데…… 염불 소리는 멈추고) 『이와 같은 생각을 할 떄를 당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 지극한 데 이르면 이제까지의 화두를 가져 참선한 공력과, 몰든 성인께서 도우시는 힘을 의지하여 자성이 미타임을 보고 마음이 정토임을 깨달을 것이다. 만약에 자성이 아미타불이며 마음이 정토인 것을 깨달은 즉, 신통이 자재하여 대천세계를 노닐고 결정코 오고 감에 자재하리라. 만약 이와 같은 경계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아미타불의 대자비원력을 힘입어서 극락세계 9품연대에 왕생할 것은 결정코 의심할 바가 없느니라. 상암각령이여, 만약 대천세계에 자재하게 노닐 신력을 얻었거든 생사거래의 막힘이 없을 것인즉, 다시 몸 받아 이 땅에 오시라. 그리하여 평소 소원대로 중생들을 제도하시라. 만약 9품연대에 태어나거든 아미타불을 뵙고 친히 묘법을 들어 무생의 도리를 크게 깨달아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다시 사바세계에 돌아오시라. 그리고 정각을 이룸을 보이고 큰 법의 수레바퀴를 굴려서 미한 무리들을 널리 제도하시라……』
여기서도 선사의 본분종사로서의 염불관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대개 선사가 항상 격밖의 도리를 농하면서도 교화의 마당에서는 아미타불에 대한 찬이 극진하고 염불공덕을 간절히 말한 것은 선사의 한 특색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선사의 선풍은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시대의 경향과 교화접인을 위한 선교 방편으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