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佛法) 수호하고 붓다 호위하는 천신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고통받는 우리는 가끔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도 한다. 이전에 쌓은 선업의 결과인 것이다. 이런 우리의 마음 상태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불교의 세계로 표현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란 결국 마음(의 수행)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계는 욕망이 지배하는 곳이자 그러한 마음 상태, 색계는 형상을 대상으로 얻게 된 세계 혹은 그 마음의 경지, 무색계는 형상 없음으로 얻게 된 세계 혹은 그 마음의 경지를 말한다. 불도는 당연히 이 삼계를 벗어난 경지에 있다. 불교의 모든 존상은 결국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 즉 궁극적으로 불도를 이루는 데 도움 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 인간을 포함해 육도를 윤회하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천(天)은 모두 욕계의 중생들이다. 사천왕은 육도의 최상위에 해당하는 천의 존재다. 천은 다시 여섯으로 나뉘는데 사천왕천은 그중 가장 아래, 불교 우주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 중턱 동서남북에 위치한다.
사천왕은 각 역할에 따라 동방천왕은 지국천(持國天), 서방천왕은 광목천(廣目天), 남방천왕은 증장천(增長天), 북방천왕은 다문천(多聞天)의 이름을 가진다. 동서남북 네 방위를 수호하는 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생들의 선악을 살피는 신들이다. 원래 인도 고유의 토착신이었으나 불교 안으로 들어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천신이 됐다.
금강역사는 그 기원이 분명하지 않다. 금강역사의 모습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석가모니 일생의 중요한 장면을 표현한 미술인 불전도(佛傳圖)인데 주로 간다라에서 나타난다. 사자 가죽을 쓰고 곤봉을 든 모습으로도 표현돼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에서 기원한다고 보는 의견이 강력하다[도판 1]. 금강역사의 모습이 간다라와 달리 인도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결국 그리스 신화의 기원과 관련된다.
이외에 구불구불한 곱슬머리에 하의를 두르고 장신구 없이 한 손에 몽둥이 혹은 금강저를 들고 있는 모습도 있다.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하는 붓다의 우측 뒤에 보이는 금강역사가 그러한 예이다[도판 2]. 금강역사는 붓다를 호위하는 역할을 하는데 간다라 불전도에서 보듯 늘 붓다의 지척에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경에서는 법에 맞지 않는 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을 타파하는 역할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금강역사와 사천왕 어떻게 구분할까?
동아시아 불교미술에서 금강역사와 사천왕은 늘 붓다와 함께했다. 사리기나 탑, 석굴, 사찰의 전각 등은 인간의 형상을 한 붓다(불상)를 안치한 성스러운 공간이다. 이 공간을 수호하는 존재가 금강역사와 사천왕이다. 금강역사는 미술상에 모습을 드러낸 시작부터 붓다를 호위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사천왕은 어떨까? 사천왕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은 붓다의 사리를 봉안한 바르후트 불탑의 문에서였다[도판 3]. 역시 미술의 시작부터 붓다(의 사리)와 함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금강역사와 사천왕의 모습은 어떻게 구분할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이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차림새가 우선한다. 우리나라로 한정 짓는 이유는 중국 이서의 서역에서 금강역사와 사천왕은 한때 그 차림새를 공유했던 적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차림에도 변화의 흐름, 역사가 있으니 이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인도에서 사천왕상은 더운 기후 때문에 상체는 시원하게 노출하고 하의로는 도티(dhoti)라고 하는 짧은 치마 모양의 옷을 입었다.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했다[도판 3]. 금강역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바르후트 탑에서 이 탑을 건립했거나 이 탑의 동문을 세운 왕, 혹은 석가모니 붓다의 사리를 받아 가는 어느 나라의 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사천왕의 모습과 흡사하다[도판 4]. 사천왕은 천의 지위에 걸맞게 인간계의 가장 존귀한 존재인 왕의 모습을 빌어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다라의 금강역사는 사천왕상과 모습도 다르지만 늘 혼자서 붓다를 호위하기 때문에 사천왕과 구별할 수 있다.
서역에서의 사천왕은 인도에서와 달리 옷을 잘 갖춰 입고 있는데 얼핏 갑옷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는 서역 왕공 귀족의 옷차림이라 하는데, 인도에서 천신들이 왕공 귀족의 차림을 따랐던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역에서는 사천왕뿐 아니라 금강역사[도판 5]와 태양신, 용신, 달의 신 등 모든 하위의 신들이 사천왕과 비슷한 용모를 하고 있다. 금강역사는 이제 혼자가 아닌 둘로, 사천왕도 넷이 아니라 둘씩 나타나곤 해서 구분이 매우 애매해진다. 따라서 연구 초기에는 금강역사를 사천왕으로, 혹은 사천왕을 금강역사로 잘못 알아보기도 했었다.
중국으로 와서 금강역사와 사천왕은 그 차림새를 다시 바꾸게 되는데, 특히 당나라 때 그 모습이 굳어진다[도판 6]. 당나라식의 차림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금강역사와 사천왕에서도 볼 수 있다. 쌍으로 나타난 금강역사는 서역식의 옷을 벗고 인도에서처럼 하의만 입게 된다[도판 7]. 간혹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종아리 근육이 드러나도록 아랫단을 둘둘 감아올리기도 한다. 근육은 옷을 벗어버린 상체와 두 팔에도 두드러진다. 한 손에 금강저를 들기도 하며 한 팔을 들어 올리고 상체를 구부려 무술의 대련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사천왕 역시 알록달록한 컬러에 화려한 문양이 가해진 서역 왕공 귀족의 옷 대신 중국식의 진짜 갑옷을 착용하게 된다. 이들은 손에 칼이나 창, 탑과 같은 물건을 받들고 있다[도판 8]. 북방천왕은 대체로 탑을 들고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 북방천왕의 공통된 지물(持物)이다.
사천왕의 지물은 고려 말 조선 초를 지나면서 이전에는 없던 비파, 용과 여의주가 추가된다. 원대 황실에서 번성했던 티베트불교의 영향이다. 이 지물을 들고 있는 사천왕상의 이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예를 들어 탑을 든 천왕을 북방천왕이나 서방천왕으로, 비파를 든 천왕을 북방천왕이나 동방천왕이라 보기도 한다. 아직 논의가 더 필요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지역이 바뀔 때마다 존상들의 모습이 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미술이 전해진 지역의 풍토와 문화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상식이 불교미술에도 적용된 셈인데 이는 진리를 대하는 탄력적인 불교 교리와도 통한다.
우리나라의 기후는 무더운 인도나 서역과 달리 중국과 대체로 비슷하며 일본과도 유사하다. 한중일 세 나라는 인도, 서역과 비교하면 한자 문화권이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세 나라에서 금강역사와 사천왕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지역문화에 따른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우리나라 금강역사는 대체로 탑에서는 다른 존상들과 섞이지 않고 단독으로 나타난다. 사천왕이 때로는 팔부중과 함께 나타나는 것과 차이가 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8세기 중반의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12세기 초 고려시대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이다. 화엄사 탑 1층에서는 금강역사가 탑의 한 면을 차지하고 다른 두 면에는 사천왕상, 나머지 한 면에는 제석천과 범천이 새겨졌다[도판 9]. 개심사 탑에도 1층에 금강역사, 기단부에 팔부중이 나타난다.
금강문과 사천왕문
조선시대가 되면 금강역사는 사천왕과 함께 사찰 입구에 배치된다. 사찰의 경계인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과 (사)천왕문이 순서대로 나타나고 여기에는 각기 금강역사상과 사천왕상이 봉안된다[도판 10]. 금강역사를 봉안한 문은 간혹 해탈문으로 이름 지어지기도 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거쳐 붓다에게 나아가게 되는데 이는 경주 석굴암에서도 나타나는 배치다. 금강역사는 비법(非法)한 무리로부터 붓다(불상)께서 상주하신 공간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사천왕보다 하위의 신이기 때문에 붓다로부터 더 멀리 위치한다. 같은 이유로 사찰의 전각 안에 모셔진 붓다의 바로 지척에는 보살들이 모셔져 있다.
일주문을 포함한 산문 혹은 삼문(三門)의 배치는 대체로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만들어진 체계라고 하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조선 초기로 올려볼 수도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금강역사상과 사천왕상의 완전한 형태는 대체로 17세기 이후인 조선 후기의 작품들이 전하고 있다. 금강역사상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이 전하며 사천왕상은 19곳 정도의 사찰에 전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시대 금강역사는 바지를 입고 천의를 두르기도 하지만 사천왕상처럼 갑옷을 착용하는 변화를 보이며 손에 검과 같은 물건을 들기도 한다. 이전의 금강역사상과 완전히 다른 차림새다. 명부전이나 응진전에도 금강역사상을 배치한다. 이들은 장군상이라 불리기도 한다. 머리에는 대체로 상투를 틀어 올리며 가슴에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를 가로지르는 낙액(珞腋, 혹은 조백條帛)이라는 천을 느슨하게 묶어 배를 가리고 손목과 팔꿈치는 팔찌로 장식했다.
금강역사는 금강문을 좌우 한 칸씩 사용하지만 때로는 좌우 각각 두 칸을 두고 안쪽에는 사자에 올라앉은 문수동자상과 코끼리 등에 올라앉은 보현동자상을 봉안하기도 한다[도판 11].
4~6m에 이르는 대형의 사천왕상은 화려하게 치장한 갑옷을 입고 앉아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신장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도판 12]. 대체로 자리에 앉아 비파를 켜거나 두 팔로 칼을 휘두를 준비를 하는 모습, 한 손에 용과 다른 한 손에 여의보주를 잡은 모습, 한 손으로 힘있게 창을 세우고 다른 한 손으로 보탑을 받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발밑에는 사람 형상의 악귀가 표현된다. 금강역사도 갑옷을 착용했지만 금강문과 사천왕문의 위치, 두 존상의 숫자와 크기, 손에 든 지물, 악귀의 유무를 통해 쉽게 구별이 가능하다.
사천왕은 육도 최상위 천의 존재인 만큼 삶의 조건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다. 일단 수명부터 달라 눈 깜짝할 새 삶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우리와 달리 죽음의 순간이 인간의 시간으로 300년이란다. 수명이 얼마나 긴지 상상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며 그만큼 다른 조건들도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육도윤회를 거듭하는 우리와 같은 중생들이라는 점이다.
금강역사와 사천왕 같은 신장들은 불보살처럼 직접적인 가르침을 통해 우리를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할 수는 없다. 다만 악업을 저지르지 않는 삶 그리고 깨달음을 달성하기 위해 붓다에게 이르는 길은 안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모셔진 사리기나 탑, 석굴, 사찰의 전각 등에 붓다와 함께하는 이유이며, 불제자들이 이들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금강문과 사천왕문을 지나는 불제자들이 마음으로 듣는 소리는 “우리가 이곳에 있음은 이곳에 붓다께서 상주해 계시다는 뜻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라”는 말이지 않을까.
심영신
숭실대 사학과 교수. 홍익대에서 석사, 펜실베이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사천왕 도상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불교도상의 정립과 확산 및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와 사회, 대중 인식 등의 여러 요인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사천왕 갑옷의 의미 재고」, 「거용관 과가탑 조각을 통해 본 원 제국 일통의 꿈」, 「선택과 적응: 6세기 후반 상장미술을 통해 본 중국 소그드인의 정체성」 등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