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라 불전미술 속 금강역사
간다라 불전미술(佛傳美術, 석가모니의 생애를 표현한 그림·조각 등)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석가여래를 수호하는 신으로 금강역사(金剛力士, Vajrapani)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연등불로부터 석가여래가 될 것이라는 ‘연등불수기’ 장면에 잠시 등장했다가, 세속을 떠나 광명의 세계로 진입하는 ‘출가’ 장면부터는 본격적으로 호위 무사를 자처한다. 부처님이 되기 위해 수행의 길로 나선 싯다르타 태자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호위한 금강역사는, 간다라 불전미술에서 성도 후 입멸할 때까지 그가 맡은 임무를 철저히 수행했다.
현재 파키스탄은 석가여래 당시 북인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그리스 문화와 불교가 만나 간다라 미술이 형성된 곳이다. 알렉산더(기원전 356~323)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이곳에 전파된 그리스 문화에 기반한 헬레니즘은 간다라 불상에 그리스 신의 모습을 투영시켰다. 간다라 지역에 이식된 헬레니즘의 영향은 석가여래를 호위하는 금강역사에게도 반영됐다. 바로 그리스 신 가운데 힘의 상징인 헤라클레스가 간다라 불전미술에서 석가여래의 호위 무사인 금강역사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도판 1].
간다라 불전미술 속 금강역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헤라클레스 모습을 차용한다는 점이다. 호법신으로서 금강역사는 사천왕이나 제석천에 비해 위계가 낮지만,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미 간다라 지역에 알려져 있던 서양 고전미술 속 힘의 상징인 헤라클레스 도상을 사용한 것이다. 간다라 불전미술 속 금강역사는 네메아의 사자를 죽이고 잠시 바위에 기대어 쉬고 있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스의 원본을 기초로 로마시대에 제작한 헤라클레스 상은 바위에 기댄 채 곱슬거리는 머리칼과 근육이 발달한 나신(裸身)으로 서 있다[도판 2]. 네메아의 사자를 죽이는 데 사용한 몽둥이와 사자 가죽은 바위 위에 놓여 있고, 헤라클레스는 몽둥이에 기대어 잠시 쉬고 있다. 이러한 헤라클레스는 동전에도 표현됐고, 동서교류를 통해 간다라에도 자연스럽게 유입됐을 것이다[도판 3].
네메아의 사자를 죽인 헤라클레스는 사자 가죽을 팔에 들거나 머리에 쓰고 있기도 하다[도판 4]. 머리에 사자 가죽을 쓴 헤라클레스 도상은 간다라 불전미술에도 수용됐다[도판 5].
금강역사의 명칭과 역할
불교 경전 속 금강역사는 집금강신(執金剛神)·집금강(執金剛)·밀적금강(密迹金剛)·금강수(金剛手)·금강수약차(金剛手藥叉)·금강밀적수(金剛密迹首)·이왕(二王)·인왕(仁王) 등 다양한 명칭을 갖고 있다. 집금강신은 산스크리트어 바즈라파니(Vajrapāṇi)를 한역한 것으로 ‘금강저(Vajra)를 손에 든 신’이라는 뜻이다. 정초 신중기도 때 독송하는 ‘화엄경약찬게’에 가장 먼저 등장한 화엄성중이 집금강신인 것은, 『화엄경』에서 금강역사를 중요시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여러 경전에 나타난 금강역사의 역할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석가여래를 언제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는 호위자이며, 둘째는 비법(非法)을 저지르는 자들을 무찌르는 역할이다. 이때 그는 군중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석가여래와 그 반대자의 눈에만 보이는 특징을 갖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초기 경전에 잘 나타나 있다.
『디가니까야』에는 ‘시뻘겋게 달궈지고, 불꽃을 튀기고, 빛을 내는 금강저’를 들고, 석가여래의 질문에 바른 답을 하지 않는 이교도 암밧타의 머리를 조각내려는 금강역사가 등장한다. 석가여래께서 불법을 전파하는 데 금강역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간다라 불교와 금강역사
금강역사는 석가여래의 생애를 표현한 다른 지역의 불전미술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근본설일체유부율』은 간다라 불전미술과 관련이 깊은데 특히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 제9권의 내용은 금강역사와 간다라 지역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금강역사는 여기에서는 ‘금강수야차’로 등장하는데 석가여래는 아난 대신 그를 동반하고 북인도로 향하고 있다. 석가여래와 함께 북인도에 간 금강역사가 한 일 가운데 ‘아파랄라 용왕(Apalāla, 阿波邏羅)’을 항복시킨 이야기가 유명하다.
『디가니까야』와 『장아함경』에서는 금강역사가 금강저를 ‘바라문 암밧타’를 항복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면, 『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에서는 항복의 대상이 ‘용’으로 변화됐다. 이것은 금강역사의 역할이 중인도에서는 바라문의 교화가 주된 것이었다면, 서북인도 간다라에서는 토속신의 상징인 용을 항복시키는 것이 주 임무였음을 암시한다.
<아파랄라 용왕의 귀의>는 간다라의 북쪽에 위치한 스와트강에 살고 있던 아파랄라 용왕을 금강역사가 항복시켜 석가여래께 귀의하게 한 사건이 배경이다. 아파랄라 용왕을 항복시키기 위해 파견된 금강역사가 금강저로 용왕이 살고 있던 곳을 내리치자 용왕 부부는 석가여래께 잘못을 인정하고 귀의하게 됐다.
<석가여래께 귀의하는 아파랄라 용왕> 불전도에는 금강역사가 향좌측과 향우측 끝에 두 번 등장하고 있다[도판 6]. 향우측 금강역사는 금강저를 손에 들고 석가여래를 뒤에서 호위하고 있고, 향좌측 금강역사는 오른손으로 금강저를 든 채 아파랄라 용왕의 거처를 내리치고 있다. 절벽을 내리쳐 아파랄라 용왕을 제압하는 금강역사의 용맹함은 벌린 두 팔과 위로 든 왼 다리의 동작에 잘 응축돼 있다. 금강역사의 공격을 받은 아파랄라 용왕 부부는 결국 합장을 한 채 석가여래께 귀의하고 있다.
간다라 불전미술에서 금강역사는 석가여래의 출가 장면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해 부처님의 호위 임무를 수행한다.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박물관에 소장된 <출가> 불전 속 금강역사는 헤라클레스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왼손으로는 금강저를 들고 싯다르타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도판 7]. 이와 달리 보스턴박물관 소장 <출가> 장면 속 금강역사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노출된 상체는 같지만, 수염이 없는 얼굴은 청년 또는 소년의 모습이다[도판 8]. 간다라 불전미술에 나타난 금강역사는 헤라클레스형과 인도의 청년 및 소년형으로 등장하는데, <출가> 장면에는 두 종류의 금강역사가 모두 표현됐다.
성도 직전에 일어난 <칼리카 용왕 부부의 찬탄>과 <풀 베는 이의 보시> 장면 속 금강역사는 앳된 인도인의 모습이다[도판 9, 10].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짧은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는 오른손으로 금강저를 들고 왼손은 허리에 대고 석가여래의 등 뒤에서 호위하고 있다.
금강역사의 지물(持物)
간다라 불전도 속 다양한 금강역사의 모습은 세 가지 설로 압축된다. 첫째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 기원설이고[도판 11], 둘째는 웨다신인 인드라(Indra, 제석천) 기원설이며, 셋째는 비(非)아리아 기원의 약샤(Yaksha, 야차) 기원설이다[도판 9, 10]. 기원이 어디에 있든 모두 강력한 힘을 가지며 금강저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간다라 불전도 속 금강역사는 항상 석가여래 곁에 서 있는데 손에는 위아래가 넓고 가운데가 좁은 금강저를 들고 있다. 가끔 불자(拂子)를 들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 금강역사의 임무는 호위자보다는 공손하고 순종적인 종자(從者)이다[도판 12].
금강저는 고대 인도의 신인 인드라, 즉 제석천의 번개에서 유래된 것으로 점차 여러 신과 역사(力士)가 지니는 무기를 일컫게 됐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설이다. 금강저의 산스크리트어 바즈라(Vajra)는 소리 나는 대로 발절라(跋折羅) 또는 박일라(縛日羅)로, 뜻으로 곤봉[gada] 또는 다이아몬드[金剛]로 번역됐다. 그러나 간다라의 예술가들은 번개 또는 곤봉의 의미를 선택했다고 한다.
번개는 그리스 제우스신의 특징이기 때문에 금강역사는 자주 제우스와 동일시됐다. 그리스 동전 앞면에는 사자 관을 쓴 헤라클레스가, 뒷면에는 제우스가 표현된 예가 대표적이다[도판 13]. 헤라클레스의 무기인 곤봉은 간다라 불전도 속 금강역사의 지물(持物)로도 등장하는데, 허리에 짧은 단검을 차고 곤봉과 유사한 지물을 들고 있는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헤라클레스는 승리자를 의미하는 칼리니코스(Kallinikos)라는 칭호를 가진 영웅으로, 그의 12가지 과업은 명부의 신들에게 속한 괴수를 정복하고 포획하는 것이었다. 특히 네메아의 사자는 죽음과 명계(冥界)의 화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죽음의 공포를 파괴하고 인간의 구제를 약속하는 자가 됐다. 명부와 관련된 헤라클레스의 성격은 조선시대 명부전에 금강역사와 같은 모습을 한 장군상이 배치되는 것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가여래 역시 번뇌를 소멸시킨 승리자이기 때문에 헤라클레스와 석가여래 그리고 금강역사는 간다라 불전도 속에서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으로 여겨진다.
금강저를 석가여래의 신통력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즉 금강저는 석가여래의 비밀스러운 힘의 상징이고, 종자(從者)인 금강역사는 주인의 ‘상징’을 가진 자라는 의미이다. 금강저는 만물을 파괴할 수 있다는 성질 때문에 순수한 절대 또는 최고 지혜의 힘인 진실을 상징하게 됐다. 또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밀교에서는 마음의 번뇌를 없애주는 상징적인 의미로 수용돼 수행법의 도구로 사용됐다.
석가여래의 열반과 금강역사
간다라 불전미술 속 금강역사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으로 표현된 것은 석가여래의 열반 장면이다. 석가여래의 출가부터 본격적으로 수호자를 자처했던 금강역사는 부처님께서 입멸에 들자 누구보다도 슬퍼했다. 간다라 열반 장면 속 금강역사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왼손으로는 금강저를 들고 오른손은 머리 위로 들어 슬픔을 나타내기도 하고, 금강저를 땅에 팽개친 채 애통함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모습으로도 표현됐다[도판 14].
석가여래의 호위자인 금강역사의 슬픔은 『불입열반밀적금강역사애련경』에 잘 표현됐다.
“아! 너무 괴롭구나. 이제 이 금강저로 누구를 보호하리오? 곧 던져버릴 것이다. 이제부터는 누구를 받들어 모시며, 누가 나를 자비롭고 가엾게 여겨 가르쳐줄 것인가? 다시 언제 존안(尊顔)을 뵙게 될까? 세상을 보호해 주는 왕이 나를 보내 부처님을 옹호하게 했는데, 오늘 갑자기 열반에 들어버렸다. 나는 오직 부처님께 의지해 왔는데 갑자기 나를 버리니 누구에게 의지해 이 목숨을 지탱할까?”
인도 콜카타의 인도박물관에 소장된 <열반> 불전도[도판 15]에는 열반에 든 석가여래 침상 앞에 애통함에 잠긴 금강역사와 선정에 든 마지막 제자 수밧타가 대조적으로 표현됐다[도판 15-1]. 수밧타 옆 석가여래의 발 부근에는 땅에 주저앉아 슬퍼하는 아난과 그를 일으켜 세우는 아나율이 있다[도판 15-2]. 금강역사와 아난존자는 애통함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말라족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 들어 슬퍼하고 있다.
<열반> 불전도[도판 15]는 간다라 열반 불전미술 가운데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면서도 석가여래의 열반을 슬퍼하는 신과 출가 제자인 아난, 그리고 말라족의 슬픔을 매우 효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석가여래의 열반 소식을 접한 다양한 인물들의 표현이 매우 인상적이다. 머리를 들고 부르짖는 금강역사와 땅에 주저앉은 아난존자 그리고 극도의 애통함을 몸으로 나타낸 말라족의 모습은 석가여래의 열반을 보는 자의 눈앞에 펼쳐 보인다.
석가여래께서 입멸하시자 금강저를 땅에 팽개치고 슬퍼한 금강역사는 간다라를 벗어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유입되면서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분신(分身)했다. 분신한 금강역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석가여래의 사리를 수호하는 불탑에 주로 표현됐다. 열반에 든 석가여래를 상징하는 불탑의 탑문으로 이동한 금강역사는 부처님 입멸 후에도 그의 임무인 호위를 지속했다.
유근자
동국대 예술대학학부 불교미술 전공 강의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천광역시 문화재위원, 강원도·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 기록과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한 간다라 불전미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가 있고, 공동 저서로 『간다라에서 만난 부처』와 『치유하는 붓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