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을 여미는 찬바람이 불어오면, 불현듯 지나간 것들이 떠오르며 회상에 잠기게끔 한다. 잊고 싶던 부끄러움도 가슴 벅찬 환희도 세월의 흐름 속에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세월은 모든 추억을 그리움으로 포장한다. 깊어가는 계절, 옛것이 그리워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있는 안동 봉정사(鳳停寺), 오래도록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다가 그리움이 무르익어 이제야 찾을 수 있었다. 소나무 우거진 숲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는 만세루 앞 돌계단에 이르니, 마치 놀이동산에 처음 갔을 때처럼 설렘이 인다. 과연 저 누각 안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건축물 종합선물세트 _ 천등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한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 대사 또는 그 제자인 능인 스님께서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능인 스님이 젊은 시절 이 산 바위굴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천등(天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하여 ‘천등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뒤 능인 스님이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려 떨어진 곳에 산문을 열었다 하여, ‘봉정사(봉황이 머무른 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풍수적으로도 천등산의 산세가 봉황의 날갯죽지를 닮아 ‘봉황이 나래를 편 천하의 명당’으로 보고 있다. 봉정사는 봉황의 품속에 들어앉은 모습으로, 아늑하고 고요하며 정갈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2층 누각(樓閣)식 구조로 된 만세루 밑을 지나면, 마치 속세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는 듯하다. 만세루 기둥 사이로 웅장한 대웅전의 모습이 홀연히 드러난다. 봉정사의 전각 배치는 병렬형 구조로서, 대웅전과 극락전 영역으로 나뉘어 각각 ‘ㅁ’자 형 마당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건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은 말할 것도 없이, 대웅전(보물 제55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古金堂, 보물 제449호), 만세루, 무량해회(無量海會), 삼성각 등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고건축박물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건축물 종합선물세트이다.
고건축의 아름다움, 극락전과 대웅전 _ 봉정사 극락전은 1972년 해체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 건물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을 기록한 글)의 기록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부석사 무량수전이 중수된(1376년) 것보다 13년 빠른 1363년에 중수되었다고 하니, 적어도 중수된 시기보다 약 100~200년 앞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극락전은 새롭게 단청을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고풍스러워보이지는 않았다. 형태는 높은 기단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을 얹은 모습이다. 소박하면서도 간결하게 지어져 단아한 느낌이 들었다. 공포와 공포 사이에 지붕의 하중을 분산하기 위해 복화반(覆花盤: 아래쪽이 위쪽보다 넓은 화반)을 설치한 것이 이채롭다. 그리고 바닥 안쪽엔 전돌(벽돌)이 깔려있는데, 이는 광창(光窓)을 열었을 때 빛을 반사해 법당을 환하게 밝히기 위해서라고 한다.
극락전 앞에는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푸른 이끼를 머금은 3층석탑이 있으며, 좌측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로 스님의 요사채로 쓰이고 있는 고금당이 있다.
봉정사 대웅전은 곱게 빛바랜 단청으로 인해 오히려 극락전보다 더 고풍스러워 보인다. 어쩌면 대웅전이 극락전보다 더 오래된 건물일 수도 있다. 지난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중 대웅전 내 목조 불단에서, 대웅전 창건 연대가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 년 앞선다는 묵조(墨詔)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증을 통해 이 기록이 인정을 받는다면 극락전으로부터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자리를 물려받을지도 모른다.
대웅전은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불단 위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보개(寶蓋)다. 보개의 천장에는 황룡과 백룡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 불단의 장엄함을 더해준다. 대웅전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는데, 아마 ‘ㅁ’자로 이어진 각 건물과 연결되는 통로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마음의 고요를 느끼며… _
봉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대웅전에서 동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산암(靈山巖)이다. 이곳은 회화적인 영상미와 상징적인 묘사로 주목받았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극락전 앞에 있다가 옮겨진 우화루(雨花樓)의 키작은 문을 통해 영산암으로 들어선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요사채, 응진전, 삼성각 등 조그만 전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염집을 찾아간 듯 편안함이 밀려든다. 마당이 배수 공사 중이라 본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반송(盤松: 가지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소나무)이라 불리는 소나무를 중심으로 평온함을 한껏 누릴 수 있는 여유로움이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 마음마저 바빠져 쉽게 지칠 수가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퇴색되어가는 절집에서, 가던 길을 한 템포 늦추고 지그시 나를 바라다본다. 잠시라도 마음의 고요를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돌아오는 길, 발갛게 익어가는 사과밭을 스쳐 지나다가, 내친 김에 핸들을 꺾어 영주 부석사로 향했다. 돌아서면 잊혀질까, 무량수전, 석등, 안양루 등을 보고 또 보았다. 안양루에서 전각의 지붕들 사이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 풍경이 평화롭다.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간다.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는 추억을 저장시켜놓았으니, 올 가을은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