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8월 2일 송문화 학술세미나의 폐회식날 아침, 남경사범대학 종 교수가 본부에 특청해서 나를 비롯한 외국인 참석자에게 성도에서 1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선종(禪宗)의 큰절인 보광사를 참관하자는 전갈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꼭 찾고자 했는데 실로 불감청이 고소원이었다.
본부에서 내준 마이크로 버스에는 안내자로 나온 사천대학 고적정리연구소의 연구원까지 차출한 증조장(曾棗莊) 본주장의 용의주도한 배려여서 고마웠다.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자 널넓은 성도 벌판을 달리는데 논에 심은 벼가 한창 뿌리가 내려 바람에 야들야들 나부끼고 있어 문득 우리의 김제평야를 연상했다.
이윽고 신도로 가는 포장이 안 된 좁은 길로 들어서니 짐 실은 트럭들을 비켜서 기다렸다 비로소 가야 했다. 더구나 줄을 이은 관광객으로 해서 계속 클랙슨을 울려도 막무가내 비키지 않아 중국인의 만만디(慢慢的)을 실감했다.
보광사 입구 주차장에서 내려 정문으로 가자니 앞마당에 높다란 가리개처럼 쌓은 담벽인 조벽(照壁) 중간에 ‘福’자가 아로새겨 있어 20여 걸음 떨어져 눈을 감고 걸어서 ‘福’자를 짚으면 복이 깃든다는 사연으로해서 참배객마다 다투어 시도를 한다. 마치 우리나라 일주문 근처 바위 돌을 던져 얹으면 액을 피한다는 민속신앙과 비슷해 웃었다.
경내에는 13층 4각의 벽돌(瓦磚)사리탑이 우뚝했다. 사실 전탑이라면 우리나라에도 여주 신륵사와 경주 분황사가 있고, 한편 공주 무녕왕릉 연도와 현궁(玄宮)의 와전이 유명한데 중국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아득한 옛날부터 사막에서 불어온 황사로 형성된 찰흙의 질부터가 하도 곱고 차져 바로 석고 같다.
그 사리탑 네 귀퉁이마다에 단 풍경소리는 참배객으로 붐비는 입구에까지 뎅그랑 들려 신비를 울렸다. 이 보광사 안내문에는 아쇼카 왕〔阿育王〕의 탑이랬다. 그래서 1965년 내가 발굴하여 소개하고 복원판까지 내었던 1447년 간행인 「석보상절」제 24․25장에 실려 있는 「아육왕 8만 4천탑 조성기」의 “귀신들이 월식할 적에 8만 4천탑을 한꺼번에 세우니 그 탑이 진단국(震旦國․支那)에 있는 것도 열 아홉이니, 우리나라에도 전라도 천관산과 강원도 금강산에 이 탑이 있어 영한 일이 계시니라”가 상기되어 거듭 우러러 보았다.
정문앞의 우악스런 돌사자상을 보고 정문에 들어섰더니 원색의 누운 보살상이 하도 고와서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런데 벌금을 문다고 막는 바람에 주춤하다가 열없이 여권에 간수한 「반야심경」을 보였더니, 무슨 증명서인 줄 알았는지 고개를 끄떡이며 촬영을 묵인해서 셔터를 눌렀다. 글쎄 신도라고 보아주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불단에 모셔진 불상은 너무 우람스럽고, 천왕문의 사천왕도 대단한데 이상한 점은 가운데 미륵불이 섰다. 혹 포대화상(布垈和尙)이 아니냐고 필담으로 물었더니 한갓 고개만 끄떡인다. 워낙 손방인 나여서 문을 나와 탑신 30미터의 13층 사리탑을 두루 살폈다. 각 층마다 4면에 불상에 조소되었는데 그 정교함이 매우 값졌다. 특히 정상의 금동갓이 햇볕에 어리는 그림자가 연못에 거꾸로 비친 광경은 아름다움을 더했다. 더욱이 불사리의 방광이 거룩하다는데 우리는 미처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장흥 천관산의 사리탑에 얽힌 사연과 한가지였다.
이 사리탑은 흔히 보광탑이라는데 당말의 희종(僖宗)이 황소(黃巢)의 반란을 피해 왔다가 아육왕이 세운 탑 자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13과를 캐어 다시 세웠다는데, 명말 장헌충(張獻忠)의 난리로 절집이 전소됐어도, 이 탑은 건재했다면서 옛날 성도에 큰 지진이 났었어도 약간 흔들려 기울어서 숫제 ‘동방의 사탑(斜塔)’이라 과시하는 가이드의 말이었다.
다시 칠불전(七佛殿)을 거쳐 대웅보전과 『화엄경』을 봉안한 장경루를 둘러 천불당 앞에서 희한한 천불비를 보았다. 물론 우리 해남 대둔(흥)사 천불전도 도섭스럽지만, 비석에 천불을 새긴 것은 미처 못 보았다. 가운데에 감실을 마련하여 부처를 모시고 옆에 문수와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불좌 아래에는 역사가 섰고, 부처 좌우에는 쌍룡이 서려 새겨져 위엄을 보탰는데 물론 발톱은 우리의 넷과는 달리 다섯이었다.
가장 놀래기는 나한당에 들어서였다. 경전에서 500나한이야 자주 읽었지만 무려 2미터 크기의 흙으로 빚은 500좌의 나한의 천태만상인 모습에 위압돼서였다. 게다가 그 나한의 인상은 고사하고 복식도 하나같이 각각이어서 그 성녕의 대손에 어안이 벙벙해 절로 혀를 찼다. 물론 진시왕의 병마용(兵馬俑)을 세계의 2대발굴이라지만, 이 나한당의 500나한상을 둘러보면 정녕 사실적인 인물형상이 자못 놀라웠다. 그들이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이 갖가지인데다 피부색과 복식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인도와 아랍계 인물의 더부룩한 수염에다 심지어 부스럼까지 정확하게 조소되었고 착색되어 그 예술성이 한결 웅혼스러워 그 득도의 표상에 계속 탄사가 터져 합장의 나위도 없었다.
이 나한당은 비록 청나라 때의 유산이지만 500나한 외에 부처와 보살 그리고 조사(祖師)상까지 모두 577구가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천수관음보살상은 무려 3미터가 넘는 대작인데, 왠지 우러러 보기에 껄끄럽지 않고, 그 좌우전후에 떨뜨린 자비의 팔이 무척이나 참다랬다.
딴은 우리나라에도 천수관음상은 있고, 일본 교토 광륭사의 목조된 조상도 익히 참관했지만 아무래도 다사로움이 덜하고 바자로움이 모자람은 비단 나만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 일행의 공감이었다. 다만, 안쓰러운 점은 조상의 보호를 위해 광도가 낮아 어둑한 것이 흠인데 이는 부득이한 조치였다.
밖으로 나와 점심공양을 위해 소찬청(식당)에 들렀는데, 일반 속객의 입에 맞게 밀가루로 흡사하게 조리한 물고기가 나와 야릇하고 의아했다. 또한 육류 역시 스스럽없이 나오는 데는 놀랬고, 계란 역시 곁들이고, 사천지방의 명물 두부의 요리 역시 성도 진마파(陳麻婆)집에 못지 않은 맛이었다. 특히 잉어와 오리까지 나와 우리의 채식 위주인 절집공양을 상기하고 종 교수에게 물었더니 거침없이 무슨 상관이냐는 데는 내가 도리어 무색했다.
공양이 끝날 무렵 풍수제(馮修齊) 주지가 찾아와서 차수를 하면서 선원(禪院)의 내당으로 인도하여 국보급의 서화를 관람시켜 주어 실로 뜻밖의 안복이었다.
특히 송나라 휘종(徽宗)의 그림에 성친왕(成親王)의 제발이 붙은 명품은 일찍이 듣보지 못했던 전적이라서 대만 고궁박물원의 서화를 회상하고 눈을 씻고 곰곰 읽었다.
그러나 낙관이 분명치 않아 의아스러웠지만 설명하는 풍 주지가 하도 자랑해서 그 하얀 앵무새 그림에 팔려서 원나라 조맹부(趙孟頫․松雪)의 「5마도」와 명나라 문징명(文徵明)의 「산수도」는 미처 읽을 사이도 없이 이내 장대천(張大千)의 걸작인 「수월관음보살상」의 영롱한 채색에 눈을 앗겼다.
특히 이 「수월관음보살상」은 감숙성 돈황의 막고굴의 벽화를 본으로 그렸다는데, 우리나라 고려때 명작인 「수월관음보살상」이 연상되어 더욱 눈이 쏘아졌다. 게다가 광물안료를 쓴 모양이라 광채가 한결 눈부셨다.
그리고 조사당에 깔끔히 모셔진 위패와 조사상, 그리고 참선하는 학인들의 모습까지 볼 수 있어 전혀 사회주의의 낌새가 엿보이지 않아 놀라웠다. 마치 우리 문경의 봉암사와 청도의 운문사 선방을 방불했다.
이 보광사는 두보(杜甫)의 시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뜻이 남달랐다. 곧 두시를 타박해서 이백(李白)을 추킨 명나라 학자 양신(楊愼․斤庵)이 이 고장 사람인데다, 이 보광사의 도타운 시주이기도 해서 내친 걸음이라 보광사에서 나와 굳이 그의 고거였던 계호(桂湖)에 들러 그의 상리척두론(賞李斥杜論)을 되새기면서 문화혁명 이후 교조적(敎條的)인 책 『이백과 두보(李白與杜甫)』의 저자 곽말약(郭沫若) 또한 이 사천성의 출생임을 생각할 때 문혁 전까지는 인민시성으로 받들리던 두보를 덧없이 지주와 반동으로 몰고 이백으로 대체한 그 견강부회의 논리를 되씹으면서, 그 사인방들이 실각한 뒤 다시 ‘시성 두보’로 환원한 사실을 상기했다. 그래서인지 보광사에 지천으로 걸린 편액과 계호에도 두보의 시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