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편품(方便품)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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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품(方便품)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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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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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강의13

경문
68. 사리불아, 너희들은 마땅히 일심으로 믿고 이해하여서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지닐지니라. 제불여래의 말씀은 허망하지 않아서 여타의 다른 법(乘)은 없고 오로지 일불승만 있느니라.

강의
법화경을 신봉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일문일자(一文一字)가 시진불(是眞佛)이다.”라는 말을 많이 강조합니다.
이는 “한 문장이나 글자 한 자가 그대로 참부처이다.”라는 주의가 법화경사상의 일부라는 것이지요.
불교적인 모든 행위는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법화경을 공부하는 일, 법화경의 가르침, 금강경․화엄경 또는 부처님 제자들의 이야기, 조사들의 언행등 팔만 대장경의 가르침, 그 외에도 불교적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향을 피우고 등을 다는 것, 먹물 옷을 입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온갖 일들은 전부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원점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즉 부처님이 성도한,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생겨난 일들 인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불교라는 이름을 붙여서 만든 어떤 새로운 제도라든지 일들도 모두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우리가 불교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온갖 불사(佛事)는 전부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깨달음으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확연하게 드러내는 가르침이 바로 법화경이라 봅니다. 그래서 법화경은 한 문장, 한 글자까지도 전부 ‘부처’라고 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그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또 그 작업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글자 한 자 한 구절이 전부 깨달음 그 자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커다란 향나무를 이리 쪼개고 저기 쪼개어 불상도 만들고 염주도 만들고 다른 여러 가지도 만듭니다. 그런데 보면 삐져 내버린 조각들이건 염주건 불상이건 중생상이건 간에 전부 향기가 나고 향나무 임에는 틀림없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일문일자가 참부처라는 이론이 성립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법화경을 대하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이고 법화경을 이렇게 알면 바로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입장에서 생각할 것은, 앞에서 전 14품의 적문과 후14품의 본문을 이야기 했는데,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두 가지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님은 적문(迹門)으로서 자취적인 형체 행적, 이런 의미의 부처님이고, 이러한 부처님이 있게 한 본래의 부처님은 본문(本門)으로 나누어서 봅니다.
우리 개인적으로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게끔한 주인공이 있을 것이고(본문), 오늘날 이렇게 살고 있는 현상적이고도 외형적인 여러 분이 있습니다(적문). 현재의 우리는 우리의 마음(주인공)이 이렇게 살아가도록 마음먹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자취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적문과 본문으로 나뉘어졌는데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부분은 전14품의 적문중에서도 중요한 「방편품」입니다. 후14품의 본문에서는 「여래수량품」이 중요하지요.
원래 불교라고 하는 것은 길이 하도 복잡하고 많다 보니까 딴길로 헤매게 되어 있습니다. 또 깨달음이라고 하는 큰 길이 나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좋을 대로 가는 경향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는 이 길에 대하여 마음 속에 한 번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이상에는 좋든 싫든 다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이미 성불의 길로 들어 섰기에, 그것을 깨달았든 못 깨달았든 간에 성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불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삶, 인생이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성공적인 삶을 살자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경문
69. 그때 세존께선 이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70. 비구 비구니로서 교만함을 품은 이들과 아만에 찬 우바새와 큰 믿음 없는 우바이들 이와 같은 사부대중은 그 수효 오천 명이라. 스스로 제 허물 보지 않고 계행에도 결함이 있어서 그 허물 감추고 아끼는 잔꾀 가진 이는 이미 나갔음이라. 대중 가운데의 찌꺼기들은 부처님의 위덕으로 물러 갔느니라. 이들은 복덕이 적어서 이 법을 받아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71. 여기의 대중은 지엽이 없고 오직 정실만 있으니, 사리불아, 잘 들으라. 모든 부처님은 얻으신 법을 한량없는 방편력으로서 중생을 위하여 설하느니라. 중생의 마음에 생각하는 것과 갖가지의 행위들과 약간의 욕망과 성품들은 선세의 선, 악업들이라. 부처님은 이를 다 아시고 여러 인연과 비유와 말씀과 방편력으로 일체중생들을 환희케 하시고 혹은 수다라(經)와 가타(게송)와 본사(전생담)와 본생담과 미증유를 설하시며 또한 인연담과 비유와 기야(應頌)와 우바제사경(論)을 설하노라.
72. 우둔한 근기는 소법을 좋아하며 생사에 탐착하여서 모든 한량없는 부처님의 깊고 미묘한 도는 행하지 않고 온갖 고통에 시달리므로 이를 위해 열반을 설하는 것은 내가 이런 방편을 베풀어서 부처지혜에 들게 함이니라.

강의
열반은 무엇을 말합니까? 활활 타는 불이 다 사그러져 싸늘하게 식은 상태, 즉 우리 마음 속의 온갖 복잡한 번뇌가 다 식어 사라진 상태, 참으로 편안한 상태를 말하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편안하긴 하지만 적극적인 삶을 거기에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화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상과 다른 것입니다. 열반이란 얼른 들으면 좋습니다. 모든 번뇌가 다 사라져서 편안한 것 같으나, 대승의 가르침, 부처님의 본의는 부처로서의 삶을 살게 하고 보살로서의 만행을 닦으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열반을 많이 이야기하니까 그럴 오해의 소지는 많으나 부처의 삶은 그런 것을 절대 표방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삶의 방법은 아주 적극적이고 의욕에 넘치고 원력에 넘치는, 아주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인생을 권하고 있습니다.
나이나 배움의 정도 능력 등 그러한 겉모습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활기차고 희망과 기대가 넘치는 의욕에 찬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소극적인 삶인 것이고, 부처님은 지극히 적극적인 삶을 늘 펼쳐 보이고 그렇게 살기를 강요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살았습니까? 관세음 보살 지장 보살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한 적극적인 삶이 바로 불교에서 나아가야 할 삶의 본래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그동안 중생들이 너무나 고통에 차있고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에 바쁘기 때문에, 그런 원력에 넘치고 남을 위해서 적극적인 인생을 살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어 일찍이 처음부터 그런 부처의 삶 보살의 삶 같은 말씀은 안하셨던 것입니다.

경문
너희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마땅히 불도를 이룬다’하는 말을 일찍이 말하지 않은 까닭은 말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이라. 지금이 바로 이때이기에 결정코 대승을 설하노라. 나의 이 구부(九部)의 법은 중생의 근기 따라 설하여서 대승에 들어감을 근본삼으려고 이 까닭에 이 경을 설하노라.

강의
대승이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살겠다는 것으로 큰 수레라는 뜻입니다. 법화경은 대승중의 대승이기에 번뇌만 가라앉혀 나 혼자만 편안하겠다(열반)는 것이 소승이라면 이와는 반대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법화경을 공부할 정도라면 이미 그런 정도의 개인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보고, 보다 더 큰 삶을 펼칠 시기라는 것이지요.

경문
73. 불자의 마음들이 청정하고 부드러우며 또한 영리하여서 무량한 부처님 처소에서 깊고 미묘한 도를 행하므로 이런 모든 불자를 위하여 이 대승경를 설하노니 내가 수기하는 이같은 사람은 내세에 불도를 이루리라. 깊은 마음으로 부처 생각하고 청정한 계율 닦아 지닌 고로 이들이 성불한다는 말 들으면 큰 기쁨이 몸에 가득하리라. 부처님을 그들의 마음 알기에 대승을 설하느니라.

강의
내세(來世)라는 것은 오는 세상, 즉 죽고난 세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다음 순간을 말하기도 합니다. 내일도 좋고 한 시간 후도 좋습니다. 그것이 내세의 바람직한 해석입니다.

경문
74.성문이나 보살이 내가 설한 법을 듣고 한 게송만 기억해도 모두 성불함에 의심 없으리라.
75. 시방의 불국토 가운데는 오직 일승법(一乘法)만 있음이요. 이승(二乘)도 없고 삼승(三乘)도 없으나 부처의 방편설만은 제하느니라. 다만 거짓 이름으로서 중생을 인도하기 위함이고 불지혜를 설하려는 연고니라. 제불이 이 세상에 나오심은 오직 이 한가지 사실이요, 나머지 두 가지는 진실이 아니니 마침내 소승법으로서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느니라.

강의
불교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간에 전부 부처님의 깨달음으로부터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하고 있는 어떤 일이라도, 예를 들어서 방생한다고 미꾸라지 사가지고 가다가 다 죽이는 꼴이 나더라도 그것도 역시 성불의 길로 향하는 일이기에 목적은 성불에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과보를 받게 되어 있지만 그 동기가 성불하는데 있으므로 그 동기속에 싸잡혀 있는 꼴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가 다 성불하기 위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할 때 우리는 곧 이해하게 되겠지요. 우리가 걷는 것 버스타는 것, 기차타는 것, 자전거 타는 것, 비행기 타는 것의 목적은 모두 서울을 가기 위한 것이구나. 그렇다면 기왕 서울을 갈 바엔 좋고 빠른 기차를 타는 것이 굳이 걷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겠지요. 새마을호도 있는데 무엇하러 자전거 타고 가겠어요? 더 빠른 비행기도 많은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이왕이면 지름길 효과 있는 길, 같은 노력을 들여서 수확이 좋은 것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지요? 그러하기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불교적인 행위는 전부 깨달음을 향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우주에는 오직 부처되는 일, 그 하나뿐이고 또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며 좋든 싫든 그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길이 둘도 없고 셋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은 제외한다고 한 것은, 우는 아이들을 달래려고 호랑이가 온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지로 호랑이는 오지 않지만 우는 아이에게 호랑이가 온다고 했대서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방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편이 필요하다고 해서 오랫동안 방편에만 머물러서는 안되지요. 방편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소승인 것이고 목적이 성불을 위한 일이라면 대승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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