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중국 3 중경 화엄사와 성도 초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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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순례기] 중국 3 중경 화엄사와 성도 초당사
  • 이병주
  • 승인 2007.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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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 순례기/중국사찰기행 : 중경(重慶)의 화엄사(華嚴寺)와 성도(成都)의 초당사(草堂寺)

1991년 7월 19일 사천성 성도의 사천대학에서 「송문화 국제학술 세미나」의 초청으로 「한국문학상의 소동파」를 발표하기 위해 재차 남경에 갔었다. 실은 낯익은 남경사대 교수들과 함께 양자강을 배로 거슬러 올라 일찍이 두보가 성도에서 귀향키 위해 내려왔던 그 뱃길을 더듬는 현장답사의 강행이었는데 혼자라서 동행을 간청했었다.

특히 신생중국에 있어 만리장성에 맞먹는 거대한 삼협(三峽)댐 공사가 발표돼서 천하의 절경이 수몰되기전의 행보여서 두루 뜻이 설레였었다. 사실 남경이라면 염수압(塩水鴨)이란 오리요리가 유명한데 나는 입이 까다로워 닭이나 오리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돋고, 물고기를 먹으면 가려움증이 심해 아예 입에 대지도 못해 굳이 홍콩 합영업체인 금릉호텔에서 숙식을 했다.

7월 21일 6시 남경선창 제4부두에서 일반여객선인 강유호(江兪號)를 탔다. 워낙 상해에서 뜨는 호화여객선인 동방홍(東方紅)을 타야 하는데, 선표를 구하지 못했다니 도리가 없었다. 강폭이 하도 넓어 숫제 인천 앞바다에 진배없는 양자강(실은 남경부터 상류는 長江)이었다. 게다가 상류의 대홍수로 붉은 흙탕물이 불어나서 무려 2백 미터나 넓단다. 덧없이 두보의 대표작 「등고(登高)」의 “그지없는 저 장강물 치렁치렁 흘러내린다(不盡長江滾滾來)”를 실감했다. 정말 올라도 올라도 널넓은 장강이었다. 지루한 5일만에 기주(奉節)에 닿아 백제성(白帝城)을 멀리 바라다 보고 6일만에 충주(忠州)를 거치자 이백(李白)의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을 외고 두보의 「여야서회(旅夜書懷)」의 “별들은 넓은 들판에 드리웠고, 달은 대강에서 둥두렷 솟아오른다(星垂平野闊月湧大江流)”가 한갓 과장이 아님을 목도하며, 우리는 갑판에서 나름대로 이두(李杜)의 우열론을 펼쳤었다.

이러구러 7일만에 중경에 닿았다. 남경사대 종진진(鐘振振) 교수의 호의와 중경사범학원(대학) 웅독(熊篤) 교수의 강권으로 외국문학계 왕충용(王忠勇) 교수 사택에서 하룻밤을 지새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아 중국의 찜통이란 39도의 무더위를 삭히었다. 정녕 고마웠다.

이튿날 중경사대 마이크로 버스로 시내관광에 나서 우선 우리 임시정부 자리를 찾았으나 개발로 짐작도 안 됐다. 다시 차를 돌려 비파공원 7층 전망대에 올라서 중경시내를 조감하고, 내려와 장강대교와 가릉강대교를 건너 대로산 기슭의 화엄사(華嚴寺)를 찾았다. 중국불교협회장인 서예가 조박초(趙樸初)의 현판이 번듯했다. 역시 문화혁명 때 모진 손을 타서 한창 보수중이었다. 본전에서는 재를 올리는데 자욱한 향연을 무릅쓰고 가득찬 대중이 독경에 맞춰 경배를 올리는데 우리와는 의례가 달라 무슨 경을 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는 폭죽소리에 기겁을 했다. 법당 안에 금줄을 쳐서 들어가지 못했다. 밖에서 삼배를 올리고 엄전한 불단의 사진을 찍으려니까 부정을 탄다고 가로 막는다. 카메라맨이 부산스런 우리와는 사뭇 딴판이어서 자못 수긍이 됐다.

대웅전을 돌아 주지실 앞벽에 새겨 있는 청나라 말기 조희(趙熙)의 글귀가 눈에 들어 읽어 내리자니 결련의 “산 종소리 멎지를 않고 사람은 늙었는데 유신의 강남 생각은 일마다 애달프구나(山鐘未歇人今老 庾信江南事事哀)”를 보니, 유신의 명작「애강남부(哀江南賦)」가 상기되어 하염없이 집생각이 났다.

우람스런 대웅전 뒷벽에 명필을 새긴「반야심경」을 탁본하기에 파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젓는다. 웅 교수가 저 탁본을 되새겨 탁본한 복제품이 매점에 있다며, 실은 서안(西安)의 비림(碑林)의 탁본도 거의 그렇다며 속지 말래서 웃었다.

우람한 대웅전 용마루 중간에는 한결같이 작은 불상이 안치돼 있어 인상적이었고, 추녀마루의 굽은 곡선이 치솟았는데도 우리처럼 도리를 받치는 보목은 없고, 기둥이나 대들보의 장엄 또한 으리으리했다. 특히 기둥의 붉은 옻칠은 요란하다. 우리의 단청과는 전혀 다르고 벽에 그려진 나투〔羅頭〕는 아주 우악스럽고 댓마루 끝에 얹은 망새〔鴟尾〕는 우리 안압지(雁鴨池)의 출토와는 비교가 안되는 크기였다.

그리고 이 화엄사 요사처의 지붕은 얄궂어 우리처럼 암키와가 넓고 수키와가 작은 것과는 정반대로 기와를 이었다. 한편 스님들의 복식은 의식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사를 걸치지 않고 거의 법복차림이고, 또한 동방아차림이 통상이었다. 다시 절 아래 동굴 속 서늘한 막바지에 모신 미륵불에 참배하고 흐린 저수지에서 수영하는 하동(河童)들을 바라보며 땀을 식혔다.

중경에서 야간특급 침대차를 타고 12시간만에 성도(成都)에 도착해서 사천대학 주최 학술세미나 본부로 국영기업체인 금우빈관(金牛賓館)에 들러 접수를 마치고, 가이드를 앞세워 교외에 자리한 두보초당(杜甫草堂)으로 달려 우선 두보의 사당인 두공부사(杜工部祠)에 재배를 올려 무려 40년래의 숙원을 풀었었다.

일찍이 두보가 처자를 거느리고 험준한 1천5백 미터의 능선인 검각산(劍閣山)의 사다릿길〔棧道〕을 한숨으로 넘어 759년 겨울 다다른 성도였다. 이내 소릉초당비(少陵草堂碑)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이어 두보 기념 도서관에 나의 두보연구도서를 기증하고, 2층 도서관에서 두시집의 유일고판본인 「남송초당선생두공부시집(南宋草堂先生杜工部詩集)」잔존본(殘存本)을 열람하는 안복(眼福)을 누렸었다.

물론 상해도서관에는 최고판본인 「송본두공부집(宋本杜工部集)」(1039년 간행)이 소장되어 있지만, 이 남송본이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었다. 이른바 특색인 결획(缺劃)이 뚜렸했고 주은래(周恩來)를 비롯한 곽말약(郭沫若)등 명사의 제찬이 상침되어 더욱 값졌다.

다음날인 7월 30일 학술발표를 마치고 도교(道敎)의 총본산인 청성산(靑城山)정상에 올랐다. 역시 기복(祈福)을 겸한 관광객이 줄을 이었고 거기서도 분향과 소지로 도관(道觀)이 매끼했다.

엊그제 두보초당을 가다가 참관한 촉왕인 왕건묘(王建墓)와 도관인 청양궁(靑羊宮)보다도 붐비는 인파였다. 특히 상청궁(上淸宮)의 태상노군(太上老君, 老子)상은 좌상인데도 2미터가 넘는데, 수염이 하도 길어 우세스러웠다. 시립한 도사(道師)역시 어마어마하고 울긋불긋한 장엄에다 특유의 금빛이 찬란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튿날 혼자서 45번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두보초당을 찾아 청양궁 앞에서 내려 묻고 물어서 완화계(浣花溪)를 건너 이번에는 초당 동문으로 들어가 잘 가꾸어진 매원(梅園)과 우거진 대숲길을 걸어 동쪽 담장 너머의 초당사(草堂寺)를 찾았다.

이 초당사는 두보가 성도에 와서 성도 윤(尹)인 배면(裵冕)의 도움으로 머물었던 절집이었다. 그래서 두보는 그에게서 이바지를 받으면서 다음의 시를 이웃 고을인 팽주자사(彭州刺史)로 있는 절친한 변새시인(邊塞詩人) 고적(高適)에게 보내었다.

옛절이라 승려는 쓸쓸만 하고
빈방에 기거하는 나그네라오.
친구〔裵冕〕가 녹을 타서
나눠보내고
이웃에서 남새 주어 더부산다오.
법당에서 부처의 법문을 듣고
『법화경』베낌을 허락받았소.
양웅(揚雄)처럼 『태현경(太玄經)』
을 짓진 못해도
시를 짓는 일이라면
사마상여(司馬相如)랄까

古寺僧牢落 空房客寓居
故人供祿米 隣舍與園蔬
雙樹容聽法 三車肯載書
草玄吾豈敢 賦或似相如

요는 고적의 도움을 청한 사발농사꾼의 하소연이다. 이 초당사는 처음엔 완화계사(浣花溪寺)로 두보가 기거하기 3년전인 지덕 원년(756)에 입적한 신라의 유학승인 무상(無相) 대사가 주석했던 옛절이라 신도인 나로서는 손이 들이굽었다. 그 뒤 초당녹원(草堂鹿苑)과 범안사(梵安寺)로 바뀌었다가 다시 초당사로 불리었다. 예로부터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컸다는데 실은 성도는 밤이면 비가 오고 새벽이면 개는 고장임이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결련에도 자상하다.

지금은 대웅전만이 덩그렇고 그것도 두보초당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불상도 경장도 없고, 스님도 살지 않고 있다. 문혁(文革)당시 두보초당은 시민의 호소와 주은래 수상의 만류로 고스란히 유지됐지만, 이 초당사는 불상까지 훼손되었다고 두보연구소 정호(丁浩)씨가 전해 주었다. 현재 대웅전은 두보에 관한 서화의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다만 앞마당의 해묵은 매화나무와 향장(香樟)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상징처럼 우거져 봄이면 그 꽃향기가 완화계〔靑江〕마을까지 풍긴단다. 내가 들렀을때는 찌는 무더위를 피한 피서객이 웃통까지 벗어들고 부채질에 나위가 없었으니, 절이라기보다는 숫제 성도시민의 납량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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