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골짜기] 어떤 해후
상태바
[푸른 골짜기] 어떤 해후
  • 황청원
  • 승인 2007.10.2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급하게 달려들어 덜미를 치켜드는 어둠 때문에 약사암을 오르는 발걸음은 거의 중심을 잃었고 호젓하지 않게 땀방울이 콧잔등을 메꾼다.

  금방 세사를 잊어 이승이 아닌 양 싶은 착각을 만들어내는 돌 틈새에 자그마한 물소리를 귓전에 엷게 담으며 걷다보니 낯익은 돌계단이 허허롭게 반가움으로 와락 기어든다.

  계단을 올라 가지런히 합장을 하고 가무잡잡한 하루의 피로를 잊은 채 한참이나 서있었다. 수필가 B스님의 한번쯤 들르라는 글을 받고 찾아온 산사의 밤은 이따금, 나즈막한 풍경소리만 울리고, 서울의 탁한 공기 속에 시달린 나의 오만가지 생각들을 낡아버린 경련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다.

  스님! 하고 불렀더니, 반갑게 맞아준다. 「시간이 늦어 오늘 안 올 줄 알았소. 시작한 단편소설은 어데쯤 왔소,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오, 어서 들어갑시다.」

  소매 깃을 끌려 방에 들어가니 하늘거리는 촛불 너머로 비구니 스님 두 분이 잠깐 다니러왔다고 책을 뒤적이고 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중 한 스님이, 그러니깐 3년 전 G시 기독교 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학생이 이젠 어엿하니 먹물 옷을 입고 있지 않은가. 나를 본 그 스님 역시 놀라는 기색이더니 내내 고개를 떨구고 만다.

뭔가 자꾸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두고 자주자주 만나는 「그 동안 잘 지내셨소? 예......」이런 혼연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설마 이러한 만남이 있을 줄이야. 모든 게 오고가고 가고 오는 무수한 인연의 소산이리라. 그 나름대로 간절한 신앙심의 의식구조가 마련되어 전과는 전혀 다른 자기만의 종교에 돌아왔을 게다. 오직 그의 수행생활에 크나큰 정진과 보람이 있길 빌 뿐이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