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에 참선수행을 시작한 대원(大願) 장경호 거사가 평생 견지했던 사상은 ‘심조만유(心造萬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곧 마음이 모든 것은 만든다는 ‘마음’의 철학이었다. 십대의 나이에 이미, 무한한 지혜 공덕과 빛과 생명을 지니고 있는 ‘마음’을 발견한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 마음의 위대한 힘을 믿었다.
그 마음이 부처와 다름 아님을 믿었고, ‘나’와 ‘내’가 둘이 아님을 믿었으며, 인과가 필연적임을 믿었으니, 그 믿음을 바탕으로 삶을 경영했고 기업을 경영했던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마지막 가족, 혹은 세상을 향해 던진 메시지도 ‘심조만유(心造萬有)’, 즉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가 걸었던 수행의 여정을 살펴보면 17살에 처음 불교에 입문했고, 20대 초반에 불교를 통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발견, 참선수행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0~40대엔 참선수행은 물론, 많은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면서 법을 물었으니, 그의 수행정진은 이때 가장 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50대 초반, 전쟁 중에도 산사의 선지식을 찾아 수행을 할 만큼 그의 공부는 깊었으며, 60대에는 사업의 일선에서 물러나 산사에서 안거를 나면서 집중수행을 했다. 그는 마음의 힘을 굳건히 믿고 참선 수행을 하다가 27살에 처음 안거에 들어가게 되는데, 3개월간의 안거가 끝나는 해제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을 향해 무릎을 꿇고 서원했다.
“부처님, 이제 저는 사업을 하여서 돈을 크게 벌겠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해서 얻어진 이윤을 국가의 은혜와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데 회향하겠습니다.”
그 맑고 간절한 서원 때문이었을까, 그는 첫 안거 해제날의 그 서원 이후, 사업을 일으켜 이 땅의 민간 철강 제일의 동국제강을 일으켰고, 그 사업의 성장과 함께 국가와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았다.
사업가이자 구도자였던 대원 장경호 거사
32살에 가마니장사를 시작으로 해서 1949년 6·25전쟁이 나기 직전 못을 제조하는 회사를 인수해서 조선선재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전쟁 때 못의 폭발적인 수요로 인해 엄청난 부를 축적해서, 1954년 지금의 동국제강을 창업하게 된다.
그리고 20년도 안 되어서 재계 서열 순위 5위 안에 드는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77세에 죽음을 맞으면서 그는 자신의 개인 재산 전부인 30억 6천만원(현시가 2천억~3천억원)을 이 땅의 불교중흥을 위한 자금으로 사회에 회향했다. 그리고 그의 혼이 담긴 동국제강은 2004년 현재 연간 매출액 3조원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 신심 깊은 젊은이의 뜨거운 서원이 생의 방향을 가르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또 마음공부에 대한 확신이 삶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장경호 거사는 기업가라기보다는 구도자였던 사람이다. 사업을 하는 와중에도 종종 3개월간의 안거에 들었고, 일제시대의 그 척박하고 고단한 환경 속에서도 금강산 마하연에까지 가서 수행하는 열의를 보인다. 용성 스님, 만공 스님, 한암 스님, 효봉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면서 법을 묻고 공부하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그는 대단한 신심의 소유자이자 실천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6·25전쟁 중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못의 수요로 인해 엄청난 재원을 확보하지만, 그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에 동요하지 않고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산사를 찾았다, 해인사에서 부산으로 피난 와 금정사에서 결제를 하고 있던 효봉 스님을 찾아가 함께 참선공부를 한 것이다. 50대 초반이던 그가 당시 얼마나 수행에 대한 확신에 차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대원 장경호 거사는 대승불교의 이상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불교는 중생교화다
그는 평소 지인들에게 ‘불교는 중생교화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중생교화에 적극적으로 발걸음을 한 것은 예순 살이 넘으면서부터이다. 예순이 넘자 그는 수행에 더욱 몰입하면서 회향의 방법에 대해 고민했고, 그러한 고민은 그는 종합수도원을 만들려고 하는 계획으로 이어졌다. 종합수도원을 만들어 인재 불사를 하고 병원, 방송국, 신문사, 양로원 등 복지시설을 만들어 불국토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한 계획으로 1백만 평의 땅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그가 하화중생에의 큰 뜻을 품었던 1960년대 이 땅의 불교계 풍토에서는 그의 선진적이고 이상적인 꿈이 실현되기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1973년, 남산에 현대식 불교회관인 대원정사를 짓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대원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불교의 산실이라고 일컬어지는 초현대식 5층의 건물을 지어 대중불교운동을 시작해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산사에만 머물러 있던 고승들을 시내에 내려오게 해서 대중들에게 법문을 듣게 하면서 대중불교 교육의 문을 열었다. 한국불교가 늙고 낡은 것에서 벗어나려면 대중교육부터 시작되어져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대원정사 내에 대원불교교양대학을 열고, 당시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들을 대거 참여시켰다.
그리고 그는 초현대식 건물의 대원정사 내에 선방을 마련해서 호남제일의 선사라고 불렸던 해안 스님을 직접 부안 내소사로 찾아가 삼고초려한 끝에 산 속에 계시던 선사를 도심으로 나오게 했다. 참선을 실수하게 하고 24시간 선방을 개방한 것이다. 사부대중 누구나 선방에 와서 공부할 수 있게 한 것인데, 요즘 한창 시민선방이 각광을 받고 있는 걸 보면 그는 참으로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다.
그는 불교방송을 개국하기 위해 발로 뛰기 시작했으며 남산에 대불을 세우려고 했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여의도 땅에 불국사 같은 고전적인 대 가람을 세우고 싶어 했다. 오늘날 빌딩숲으로 이뤄진 각박한 여의도에 불국사 같은 사원이 들어섰다면 얼마나 장엄했겠는가. 오늘날 한국불교의 위상이 달라졌으리란 생각을 해본다.
사심 없는 원력이 빚어낸 숭고한 결실
“기업이 성공하려면 분명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나의 신념은 기업을 일궈서 나라에 보은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신념은 나와 모두가 존엄한 존재요, 그래서 평등하다는 진리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내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두의 관계 속에서 이뤄진 공동의 것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 한 푼도 헛되이 쓸 수 없었다.” “재물은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이 흐르지 않고 한 곳에 고이면 썩는 것처럼, 재물도 흐르지 않으면 부패하는 것, 그러므로 내 손을 벗어나 세상으로 흐르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아낌없이 돈을 쓰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쳤고, 자신도 그 철학을 평생에 걸쳐서 실천했다.
그리고 그는 죽음 앞에서 그러한 소유에 대한 철학과 하화중생을 완성시켰다. 일흔일곱에 생을 마감하면서 그는 개인의 전 재산을 이 땅의 불교중흥을 위해 내놓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장경호 거사가 남기고 간 회향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땅의 불교 중흥과 발전과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 있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아마도 그가 씨뿌린 원력은 이 땅에 불교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남아 있을 것이다. 화두로 견성성불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업력으로 산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원력으로 살다간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 근대 재가불교에서 그만한 원력으로 왔다간 보살은 없었노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 평생 가슴에 품어 실천했던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대한 그의 깊은 원력은 그가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채 이 땅의 불교 성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가 씨앗으로 남긴 불교중흥에의 원력은 세상에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있다. 기업가로서 지녔던 그의 지혜는 이 땅의 민간 철강산업의 선도그룹으로 매출 3조원의 시대를 연 동국제강, 불교사상과 정진에서 얻은 지혜와 자비는 도심의 포교당 대원정사, 불교계 불교교양대학의 첫 문을 연 대원불교대학, 장학재단 대원정사, 신행단체 대원회로 피어났다.
그리고 오늘, 불교중흥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대한불교진흥원으로, 온 나라에 불음(佛音)을 떨치는 불교방송으로 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신심 깊은 불자 한 사람의 사심 없는 원력이 빚어낸 숭고한 결실인 것이다.
대원(大圓) 장경호(張敬浩) 거사(1899~1975)는 동국제강 그룹 창업주이자 오늘날의 불교방송을 탄생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을 탄생시킨 성공한 기업가였지만 수행자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나이 예순이 넘자 자식들에게 사업을 맡기고 77세를 일기로 이생을 하직할 때까지 불교대중화를 위해 헌신한 대원력 보살이다. 이 글을 쓴 박원자 님은 대원 장경호 거사의 30주기를 기해 『이 땅의 유마 대원 장경호 거사』를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