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심지어 타종인들조차 무심결에 전생 운운하곤 한다. 아마도 그들의 유전자에 흐르고 있는 불교적 유산일 것이다. 하지만 전생을 믿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젖는다. 그런 면에 있어서 몽골인들은 달랐다. 비록 불교교리는 물론이거니와 불교의식조차도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드물지만, 전생을 믿고 삼세인과론을 체득하고 있는 듯한 몽골인들의 신심이 신이로웠다.(소련 공산당의 박해,승려 숫자의 절대부족으로 일반인들은 불교교육을 거의 받을 수 없는 형편인데, 1992년 자유화된 이래로 몽골 전역에서 일고 있는 불사(佛事)의 붐만으로도 그 신심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몽골불교미술대학의 김선정 교수님을 통해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몽골에서는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경지에 오른 큰스님들이 많았는데, 그 이적을 직접 본 분들이 많고, 그 믿음이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지요.”
이적은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단다. 러시아의 몽골 자치국인 브리야트에서 따시도제 이티겔롭 스님의 육신불이 발견되어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되었고, 브리아트 불교 부흥의 횃불이 되었다.(1927년 입적하시기 전, 죽은 모습 그대로 나무 상자에 담아 묻었다가 30년 후 살펴보고 묻은 뒤 75년 후에 다시 꺼내라고 부탁하시며 앉아서 입적하셨다. 2002년 묘지를 파서 관을 열어보니 75년 전 돌아가신 모습 그대로 앉아 계셨다. 러시아와 서양의 의사들과 과학자들도 기적이라며 놀라워하였다.)
떠도는 유목민들의 고향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나약한 중생들의 믿음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방편도 필요할 듯싶다. 몽골 불교사(몽골에 최초로 불교가 전해진 것은 4세기 초였는데 불교를 국교로 정한 것은 13세기 쿠빌라이 시대였고, 전 국민의 가슴속에 뿌리내리게 된 것은 16세기 칭기스칸의 25대손인 알탄 칸의 시대에 이루어졌다.)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밀교 수행을 통해 신통력이 있었던 티베트 승려들을 지켜본 지도층의 적극적인 전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알탄 칸만 하더라도 통풍(痛風) 치료를 위해 사람의 배를 갈라 발을 들여놓는 몽골의 전통치료법을 사용했었는데, 소남강쪼가 치료해 줌에 따라 밀교에 귀의하게 되었다.[알탄 칸은 1578년 소남강쪼에게 달라이 라마(달라이는 몽골 말로 ‘바다’이다.)라는 칭호를 주고 숭배하게 되었고, 소남강쪼는 알탄 칸에게 전륜성왕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그 이후로 사원(학교, 교육, 병원, 문화센터)은 떠도는 유목민들의 영혼의 오아시스로서 몽골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왔다. 어쨌든 수행을 통해 전생과 현생, 내생의 일을 두루 볼 수 있었던 몽골의 스님들이 있었고, 공산 정권하에서도 비밀리에 수행을 하면서 신심을 길러왔기에 오늘날 전국적으로 불사(佛事)가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몽골불교 부흥의 주역 바쿨라 린포체
“몽골에는 몽골불교가 망해갈 무렵 16아라한 중의 한 분인 박구라 존자의 환생이 오셔서 몽골불교를 다시 부흥시킬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었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원마다 박구라 존자를 많이 모셨지요. 그 예언대로 바쿨라 린포체가 몽골불교를 회생시켜 주셨습니다.”
라닥의 왕자로 태어나 6살 때 박구라 존자의 환생으로 인정받은 바쿨라 린포체(1917-2003)는 삐툽 사원의 라마가 되었고, 티베트의 드레풍 사원에서 14년 동안 공부하여 게세 라람파가 되었다. 그는 1947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네루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 장관과 국회의원, 불교공동체 대표로서 소수민족의 권익을 보호하고, 불교 홍포를 위해 전 생애를 바치셨다.
“1968년 몽골을 처음 방문하면서부터 원력을 세우셨는데, 1970년에는 울란바타르에서 열린 ABCP(평화를 위한 아시아불교도 회의)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셨고, 간단사에 승가대학을 세우시는 등 몽골의 사원들을 복구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셨지요. 1990년도에 몽골주재 인도대사로 오셔서 10년 동안 재임하시는 동안 그분의 공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특히 ‘몽골인들은 가장 뛰어난 수행자였다’며 몽골인들의 자긍심을 일깨워주시고 격려해 주시던 점이 가슴에 남습니다.”
몽골인들은 그를 스승이자 대사를 뜻하는 ‘엘친 바그샤’라고 불렀는데, 당시 인도대사관은 몽골 불자들의 성지였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려와 그의 축복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1987년 인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훈장인 ‘파드마 부샨’을 받았고, 또 몽골에서는 외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세 번째로 높은 훈장인 ‘북극성’이라는 훈장을 받았다.)
‘모델’을 뜻하는 삐툽 사원에서 희망을 새기다
라닥의 삐툽 사원은 900년 이상의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삐툽은 영어로 ‘모델’을 의미하는데, 바쿨라 린포체가 10여 년에 걸쳐 건립한 울란바타르의 삐툽 사원에는 그의 몽골불교 부흥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다. 삐툽 사원은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찾아오기 편한 장소를 고른 것에서도 그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 문을 들어서자 마자 마치 풍향계 같기도 하고 솟대 같기도 한 마니대가 눈길을 끌었다. 그 주변만 정성껏 돌아도 가피를 입는다는 말에 ‘옴마니 반메 훔’을 외며 돌았다. 그러고 보면 밀교에는 여러 가지 상징물이 많은데, 천차만별의 근기를 지닌 중생들을 위한 자비심의 발로인 듯하다.
큰법당과 교육관, 요사채가 웅장하게 지어져 있었고, 한켠에서는 부속병원을 한창 짓고 있었다. 티벳 사원 안에 학교는 물론이고 병원이 있다는 것을 얘기로만 들었는데, 가슴이 뿌듯해졌다. 때마침 예불시간, 수십 명의 스님들이 두 줄로 나란히 앉아 경문을 읽고 있었다.(몽골에서는 예불시간에도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있다.) 법당의 장엄물마다 기품이 있었고, 바쿨라 린포체의 영정과 은사리탑(푸레밧 스님 제작) 앞에 이르러선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알랭 베르디에가 “어떤 단어로 그를 묘사해도 그 위대함을 표현하기에 부족할 것 같다.”고 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삐툽 사원에는 현재 50여 명의 학승(學僧: 평균연령은 15-25)들이 불교경전과 티벳어, 고대몽골문자, 영어, 수학, 지리 등을 배우고 있다. 앞으로는 불교예술과 의학도 가르칠 예정이라고 한다. 불자들을 위한 불교교육을 하고 국제적인 불교공동체들과의 문화적 접촉과 교류를 도울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고 있다.(학승들에게 숙식과 기본적인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 전통은 공산정권 때 승려들을 부패시킨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던 것인데, 학승들이 수행과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불교 부흥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울란바토르에는 현재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 실업자도 꽤 많다.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선교, 젊은 층에서는 개종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돌고르 잡의 말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데, 삐툽 사원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예혜(기사) 씨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예전에는 스님들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없었고 나무를 마구 자르는 일도 없었다. 지금은 좋은 전통이 없어져서 자연환경이 훼손되고 있다. 불교가 발전되고 스님들이 많아지니까 점차 나아질 것이다.”는 그의 말이 가슴을 울렸다. 삼세인과론을 믿는 몽골인들, 그 순수한 영혼들과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이즈음 21세기적 삶, 기업경영의 열쇠를 유목민들의 열린 사고에서 찾자는 호모 노마드 붐이 일고 있는데, 사실 그들에게서 배울 것은 진리에 대한 통찰력이다. 내 안에 깃든 불성(佛性) 을 일깨워 영원한 복락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몽골에서 갖게 된 것도 전생 인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