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가슴 뛰는 일이 또 있을까. 문서포교사로 자처하는 내게 있어 좋은 스님들과 불자들과의 만남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서울에서 포항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서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 덕분이었다.
포크레인을 운전하는 스님
사회복지법인 ‘열린 가람’ 산하 학산종합사회복지관 이형 관장이 터미널로 마중을 나왔다.
“스님께서 솔선수범하시니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96년도에 스님이 학산종합사회복지관(경상북도 1호 불교복지관)을 포항시로부터 위탁, 운영하게 되었는데, 금세 포항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하는 기관으로 인정받게 되었지요. 스님께서 열심히 복지활동을 펼친 덕분에 포항 시민들의 불교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기독교세가 강한 포항에 사회복지를 통한 포교의 장이 새롭게 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라는 이 관장의 말을 듣는 사이에 정애원(노인무료요양시설)에 도착했다.
포항시 청하면 청계리 천령산 산기슭, 만여 평의 부지에 자리잡고 있는 정애원은 주변 경관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건물〔건평 395평, 사무실, 자원봉사실, 생활재활교사실, 상담실, 사랑채, 안채, 별당, 휴게실, 프로그램실, 물리치료실(물리치료사가 상주하여 초음파치료기, 온열치료기, 핫팩, 경피신경자극기 등의 물리치료기구와 각종 운동기구 등을 이용해 건강을 돌봐드리고 있다), 회복실, 식당, 목욕탕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의 규모도 크고, 특히 널따란 잔디밭, 야외휴게실, 텃밭, 정자, 산책로 등이 눈길을 끌었다.
“스님 손길 안 간 곳이 없습니다. 스님께서 피와 땀으로 일구었다고 할 수 있지요. 저 앞뜰의 잔디밭도 스님이 포크레인을 손수 운전하시면서 터를 다지고, 잔디 심고 나무 심기까지 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방마다 일출을 볼 수 있는 등 어르신들 위주의 시설이 돋보이는데, 설계도면도 스님이 직접 그리셨고, 커텐, 선텐, 액자 하나에 이르기까지 다 스님과 직원, 자원봉사자들이 했다고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스님의 모습은 귀감이 되었을 터, 스님이 7년 여라는 결코 길지 않은 사이에 복지불사(사회복지법인 열린 가람 산하의 학산종합사회복지관, 정애원, 포항자활후견기관)를 통해 지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저력이 바로 스님의 솔선수범에 있는 듯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인연따라 살아왔을 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도 없고 할 얘기도 없어요. 다만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으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셨다는 경전 말씀을 보았을 때처럼 황당했다. 이관장이 옆에서 “스님께서는 과정을 중요시 여기시고, 늘 현재에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평소 과거지사는 마음에 두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러실 겁니다.”라며 이해를 돕는다.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서울로 유학 왔던 스님은 대학 2학년 때 별다는 동기도 없이 홀연히 월정사로 출가했다. 대 강백이었던 탄허 큰스님을 찾아가게 된 것은 집안(탄허 스님 부친과 난승 스님 할아버지는 신흥종교인 보천교의 양대 산맥으로 일제 때 독립운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간의 깊은 인연 덕분.
“은사스님의 강의 녹음테이프를 풀고 출판(내년 초 나올 예정)하는 작업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 효상좌인 것 같다.”는 말에도 “이런저런 소임 맡으면서 일하느라 정작 공부는 못했어요. 뒤늦게나마 공부하려고 녹음테이프를 신주단지처럼 짊어지고 다니다가 우연찮게 도반스님과 말이 오가게 되어 시작했을 뿐입니다.”라며 무심하게 말씀하신다.
복지불사를 하게 된 인연에 대해서도, “관장과의 소중한 인연 덕분이지요. 관장 만난 게 내 복(福)이라, 저 사람이 좋은 일 하자고 하기에 필요한 것 같아서 시작했어요.”라는 스님 말씀에 이관장이 도리질을 쳤다.
“스님께서는 저와 만나기 전부터 운흥사에서 고아들을 10여 명 이상 기르고 계셨고, 강릉의 자비복지원 원장을 역임하시는 등 사회복지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학산종합사회복지관은 원래 한국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수익성이 없어 운영이 어려워지자 불교계에 손길을 내밀었지요. 그 때 이구동성으로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은 난승 스님밖에 없다’고 했으니, 평소 스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난승 스님은 1986년 연고도 없는 포항에 내려와 운흥사를 창건, 적극적인 포교활동으로 지역불자들의 정신적 요람으로 일구셨다. 나아가 평소 건전한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봉사하는 보현보살의 실천도량으로 이끌었다. 운흥사 불자들은 스님이 복지관을 단기간 내에 정상화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1996년 3월 복지관을 위탁받고 맨 먼저 노인무료급식소(월요일-토요일)인 장수식당을 열었지요. 스님께서 직접 쌀을 얻어오시고, 장을 보러 다니시고 자원봉사자들을 독려하신 덕분에 금세 자리가 잡혔지요. 또 그 이듬해에는 목욕차를 기증받아 이동목욕사업을 실시하였는데, 스님이 때를 밀어준다 해서 아주 유명했지요.”
이관장의 말을 듣고나서 스님이 멋쩍게 웃으시며 던진 한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전생에 나는 소라, 이생에 사람으로 태어나 출가했지만 아직도 전생의 업보를 못 벗어나고 그 습을 버리지 못해 허구헌날 소처럼 일만 하고 있는 거라….”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심우도가 생각났다. 스님은 일하면서 소(本性)를 찾으신 듯싶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다 인연 따라 사는 겁니다. 월정사 살 때도 공양주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아이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포항에 내려 와서 관장과 수많은 단월을 만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스님은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오고 간 것이라 말씀하시지만 아는 만큼 보이고 마음 가는 만큼 실천한다고 하지 않던가. 스님의 심성이 자비롭기에 월정사 공양간에서 찬밥덩어리로 굶주린 배를 달래는 아이들이 측은해 보였고, 그 아이들에게 남다른 정성을 쏟았던 것이리라. 스님 덕분에 따뜻한 밥을 먹게 된 아이들이 스님이 월정사를 떠날 때 따라나선 게 인연이 되어 학교 다닐 때부터 아이를 기르게 되었다. “애 하나 기르는 것도 힘들더군요.”
스님의 등 만드는 솜씨는 수준급(30미터가 넘는 용등(龍燈)을 비롯해서 갖가지 전통등을 손수 만들어 포항에서 봉행되는 제등행렬 때 선보이시는데 대표적인 장엄물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인데, 동국대학(승가학과 편입) 다닐 때 자신의 학비와 아이 양육비를 벌기 위해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등을 만들어주던 데서 연마한 것이란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었지요. 가출해서 속을 썩이는 일도 있었는데,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도 애 발자국 소리인 줄 알고 뛰어나갔지요.”
한밤중에 밤차 타고 서울까지 가서 아이를 찾아 데리고 돌아오는 스님을 보면서 선생님들은 “친부모도 스님처럼 하지 않는다.”며 칭송했지만 스님은 늘 안타까웠다. 아이들의 성장을 돕고자 온 마음을 썼으나 사춘기를 열병처럼 앓고 지내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많을 때는 열두 명도 넘는 아이들과 함께 살았는데, 7년 전 본격적인 복지불사에 뛰어들면서부터 부모 노릇할 시간이 없어 더이상 아이들을 받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운흥사에서 자란 아이들이 이제 결혼도 하고 취업도 하고, 지금은 대학에 다니는 세 명만이 남아 스님을 응원해주고 있다.
길가에 떨어진 돌을 치우는 심정으로
“때밀이를 하고 다니면서 노인분들의 현실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지요. 낡고 비좁은 셋방에서 끼니도 거른 채 하루하루 연명하고 계신 무의탁 독거노인들을 보면서 이분들이 편안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실 수 있는 무료노인복지시설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추진하게 되었지요.”
과제가 생기면 해결될 때까지 잠도 안 자고 추진하는 스님의 성격은 정애원 건립 때 여실히 드러났다. 모두들 주민들의 결사반대(혐오시설이라 해서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착공식 때는 주민들이 길목을 차단하여 다섯 시간 만에 겨우 도착했는데, 이날 입상 부처님과 행사에 참석한 불자 1,000여 명에게 동네 사람들이 인분을 던지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로 건립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임하는 스님과 직원들, 자원봉사자, 운흥사 불자들(스님의 복지불사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으뜸 공신), 관계공무원들의 협조에 힘입어 결국 1999년 2월 준공했다. 현재 50분이 살고 있는 정애원은 이 지역의 가장 좋은 노인복지시설로서 수많은 무의탁 노인분들이 입소를 희망하고 있다.
“길가에 떨어진 돌을 치우는 심정으로 하고 있지요. 아무도 고맙다는 소리는 안 하지만 결국에는 고마운 인연이 되지요. 길가에 돌이 떨어져 있는 것을 봤을 때 관심이 없으면 그냥 피해가기 마련인데, 바람이 있다면 관심을 가지고작은 것이나마 나누면서 살아갔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사뿐사뿐 조용히 내리는 눈송이가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큰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불국토로 만드는 것은 결코 거창한 데 있지 않으리라.
스님 말씀처럼 길가에 떨어진 돌을 치우는 마음으로 살고, 우리 이웃을 부처님처럼 섬기며 살다 보면 이 땅이 그대로 극락이 되지 않을까.
난승 스님은 1972년 오대산 월정사에 탄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82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 졸업, 대한불교 조계종 월정사 교무국장, 총무국장, 포항 오어사 주지, 영덕 덕흥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1987년 포항 운흥사를 창건 주지, 1993년 사회복지법인 자비복지원 이사, 자비복지원장, 1999년 경상북도 사회복지관협회장, 1996년 포항학산종합사회복지관장, 1997년 포항 장애인종합복지관 운영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 사회복지법인 열린 가람 이사장, 포항실업극복시민연합공동대표, 포항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으로 있다. 스님은 포항에서 운흥사 창건을 인연으로 신도회, 어린이회, 학생회, 청년회, 합창단인 우담바라회, 선우회 등 각종 법회 창립과 아울러 운전불자연합회, 봉사단체인 법수림과 풍경소리 등을 창립하여 사찰을 기반으로 한 복지불사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사회복지법인 열린 가람의 활발한 복지사업으로 이 지역에 불교의 새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