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표가 중공군 부대를 방문하니 장성은 없고 모두 심각한 상황을 토의하고 있었다. 곧이어 나타난 장성은 노기 충천해서 말을 못했다. 우리 대표가 시민들 저지로 나의 거동이 불가했다고 전하니 장성은 방안을 거닐며 분을 삭이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우리 대표를 반동분자라 비난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 억양으로, 표정으로, 몸짓으로 우리 정부는 시민을 선동하고 동부 유격대도 지원한다고 비난했고 중공군 명령을 듣지 않아 동부 피난민 무장해제도 시키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 중공군의 단호한 결단을 각오하랬다. 또 다른 두 장성도 계속 반동분자 분쇄 할 때가 왔고 중공정부도 더 이상 관용을 베풀 수 없고 이번 반란에 대한 응징이 준비됐다고 소리쳤다.
우리 대표에게는 이 협박이 최후통첩으로 들렸다. 그러나 꾹 참고 평소의 티벳사람들을 이해하여 달라고 말했다.
가능한한 중공군에게 대항하는 모든 사고 를 막을테니 보복은 하지 말라고 했다. 중공군은 들은 체도 안했다. 오후 5시쯤 우리 대표는 부대를 나왔다. 궁밖의 시민들은 중공군에게 항쟁한다는 모임을 따로 갖고 있었다. 중공이 이행하지 않는 조약을 파기하고 중공군은 철수하라고 외쳤다.
6 시경엔 별궁안에서 나의 호위부대 공무원 시민대표들이 아까의 결의를 추인했다. 또 호위부대는 중공이 지급한 군복을 벗고 중공군 명령을 듣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들의 결의를 듣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했으나 중공에 대한 원한은 말로 타이를 정도가 아니었다.
그날 밤 중공의 장성의 편지가 왔다. 나는 답장을 썼다. 그후에도 며칠새 세번 썼다. 미리 하는 얘기지만 이 일련의 각본은 내가 반동분자를 피하려 중공군사령부로 가려는데 감금당했고 인도에 망명한 결과로 나의 본의에 어긋난 납치였다고 구성중인 속임을 1년 뒤에 알았다.
이 선전으로 영국의원 한 명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서 기가 찼다. 내가 답한 편지내용과는 정반대의 윤색으로 나와 백성들을 이간시켰다. 라사를 떠난 결정은 순수한 나의 의사였다. 축근 수행원의 납치가 절대 아니다. 중공이 내 목숨과 궁전을 함깨 폭파하려는 준비만 없어도 나는 라사를 떠날 아무런 제재도 없었다.
장성의 편지는 그를 만나고 온 나의 측근들이 말해줘 다 알고 있는 내용과는 반대라 정중하게 내 신변을 걱정하고 자기들 부대로 피해오라고 썼다. 나는 일일이 양쪽의 흥분상태가 가라앉을 때까지 피차 감정을 건드리지 말고 기다리자고 썼다.
이 판국에 당신들이 보호한다면 마지막이요, 하면 바보짓이라, 가급적 호의에 감사하다는 식으로 처음엔 나는 당신들 사령부로 가려는데 시민들이 그처럼 말릴줄 몰랐고 두번째는 시민들도 두나라 사이를 가르는 행동으로 옳지 못하다고 마지막으로 부대를 방문하더라도 시민들을 먼저 수습해야겠다고 회답했다.
내 편지가 그들 맘대로 약용되고 안되고 나로서는 그때 그 위기에 답장마저 안 쓸 수 없었다. 정규군과 비전투원 민간인이 폭력으로 대전한다는 사태가 아무리 달라이 라마를 위한다 했어도 내가 국가의 통치자인 한 무고한 백성이 도륙되는 단말마 아래 제지시키는 일이 옳았다.
그런 의도에서 표현한 문맥이 내가 백성을 저버린 내용으로 둔갑했다.
이튼날 3 월 11 일은 시민들 통제가 더 어렵게 되갔다. 시민경비대가 궁내의 정부사무실에도 외부통제 명목으로 6명이 배치됐다. 시민들은 정부 공무원이 중공군과 내통하며 타협한다고 의심했다. 내각소집을 하니 한 명은 돌에 맞아 치료중이고 또 한 명은 중공군 부대서 나오지 않고, 남은 네 명이 시민대표를 설득하기로 했다.
시민대표는 자기들이 책임지고 해산시킨다 약속하며 돌에 다친 사람 문병을 부탁했다. 일은 잘 되나 싶었는데 또 주공군의 편지 두 통이 왔다. 하나는 내게 또 하나는 정부로 왔다.
정부쪽의 내용은 시민들이 중공군 도로를 차단했으니 당장 안치우면 내각을 처단하겠다고 썼고 이를 본 시민대표들은 중공군의 전의가 병력증강을 위한 속임수로 달라이라마와 궁을 공격 못하게 막았단다. 중공군의 부대 배치가 먼저 그러니 피장파장 같다고 했다. 이 불행한 논리는 모두 나를 보호한다는 계획으로 더 많은 시민들을 운집시켰다. 이들은 6명의 사령관을 뽑아 궁을 지키게 강화 해산은 커녕 상주한다고 공표했다.
이야말로 재앙으로 치닫는 길이다. 직접 70 명의 대표들에게 담판을 했다. 중공사령관이 나를 강제로 초청한 것이 아니었고 내가 결정했으며 중공군의 위협도 받지 않고 있다. 중공이 우리를 괴롭힐 뜻이 아니었다니 이 말을 듣는 시민대표 들이 불쾌한 것도 잘 알았지만 폭력을 제지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시종여일 듣고만 있다가 자기들끼리 결정했는데 내 말을 거역할 수도 없고 시민을 해산해도 그 뒤 문제가 의심스러우니 마땅한 결론이 없었다.
궁안에서 회의하다가 나가서 한다며 장소를 옮겼으나 일치된 의견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중공은 티벳에서 손을 떼고 달라이 라마를 계속 수호하겠다였다.
이틀간은 소강상태더나 그것이 곧 불길한 징조였다. 3월 16일 중공군의 마지막 편지가 왔고 같은 날 답장했다.
이 마지막 편지에 중공군 부대안에서 나오지 않는 우리 고관의 편지도 동봉했는데 앞으로 평화는 없다,반동분자들 처단하라, 시민대표와 연락을 끊어라, 달라이 라마를 빼돌리려는 모임이 있다, 또 중공은 절대 빼돌리지 못하게 할 것이며 만일 중공군을 속이고 피한다해도 현재 국제정세로서는 라사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가까운 측근하고 궁안의 어느 위치에 있다는 것을 중공군사령관에게 알리면 그 장소만 파괴를 면할 수 있다, 중공군은 궁을 포격하고 시민을 폭사시킬 계획이 있다. 가급적 시민들을 궁에서 멀리 보내도록 하라고 써 보냈다.
시민들을 해산시킬 수 없으면 달라여 라마만이라도 중공사령부로 빠져나오라고 하며 내가 거처하는 위치를 그린 지도를 보내라고 했다. 이 편지는 중공이 나중에 약용한 나와 그들의 교신공개에서 뺐다.
장성에게는 늘 하는 식으로 회답하며 내 거처는 밝히지 않았다. 내가 있는 장소를 알리지 않는 한 대포는 쏘지 못할 터이니 조속한 시일내에 부대를 방문하겠다고만 써서 시민들이 피할 시간을 벌기로 했다. 이것으로 편지내왕은 끝났다.
궁정안팍의 긴장은 격앙했다. 부대기, 삽, 칼을 무기라고 들고 있었다. 군인과 동부 피난민은 소총, 기관총, 박격포로 일당백의 기세였다. 달라이 라마를 지킨다는 결심이 큰 무기였다. 궁안의 내 거처는 조용하기만 하고 불길한 낌새는 볼 수가 없었다.
공작은 깃털을 활짝 펴고 새들은 나무사이를 날며 우짖고 사슴, 오리, 확, 못의 고기는 인간의 고뇌를 몰랐다. 호위병마저 군복을 벗고 꽃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수 백년간 신앙에 의지하여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는 기쁨속에 살아온 티벳의 풍경이다.
3 월 16 일 궁을 포격할거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포대가 궁을 조준해서 배치했다. 시외 수력발전소 근무자가 평시 그곳에 보이던 포부대가 14일 밤중에 라사로 이동했다고 알려왔다. 또 다른 곳에서도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13 일과 15 일 저녁 때 궁북 문쪽에 관측병이 보였다. 사람들이 접근하자 그들은 도망치고 시민들은 궁을 사정거리안에 맞친다고 확신했다. 밤이 되자 수 백대의 중공군 트럭이 포탈라궁으로 이동했다.
다음 날 아침 사복한 중공군이 전봇대를 오르내렸다. 증원부대가 중공서 공수된다고 했다. 16 일 밤 예고 없는 궁폭파를 모두 예측하고 불안했으나 나를 떠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해산을 종용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날 밤은 아무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모두 절박한 초조감 뿐이었다. 회의를 열고 무고한 백성을 죽어느니 한번 더 중공군에게 기회를 얻어 시민을 해산해 보자고 결의했다. 조력은 그쪽 중공군 부대안에 있는 티벳 관리에게 청했다.
시민들이 어리석어 그러니 기다리며 타일러 궁을 떠날 때까지 참고 달라이 라마가 부대로 간다는 내용을 암호로 써서 시민들 검열을 피하고 연락은 내각의 시종 한 명이 장보러 가는 척 빠져 나갔다. 갈려고 한들 실현될 수도 없었으나 가서 되기만 한다면 갈 생각도 있었다.
답장은 내각 결의가 잘 됐다며 달라이 라마는 부대를 꼭 옮겨야 하니 자세한 내용을 보낸다고 했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오후 4 시경 중공군 답장을 검토중인데 박격포 진동이 북문쪽을 강타했다. 포성에 시민은 이성을 잃고 중공은 아무 해명이 없었다. 우리쪽에선 포격이 시작된 줄로만 알았다. 양단간의 결정은 내려져야 하는데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해답은 내가 찾아야 하는데 나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중공의 공격목표로 폭사되는 문제는 두렵지 않았다. 신앙심이 그만한 자세는 나에게 충분히 뒷받침했다.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이 백성들에게 그 뜻을 분담시킬 수도 없다. 그들에겐 내가 개인 이전의 달라이 라마요, 티벳의 대표이며, 자기들의 생활속에 가장 귀한 존재로 내가 중공손에 없어지면 티벳의 종말이라고 믿었다.
포성에 결심한 그들의 행동은 달라이 라마를 빨리 대피시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큰 모험이라 티벳의 장래가 걸렸다해도 다음은 어디로 어떻게 간단 말인가.
백성들은 내가 없다면 당장 해산할 것인가. 한 가지도 시원한 대답이 안나왔다. 나말고는 내가 빨리 떠나야 한다는 의견 뿐이다. 그들에게 살길이 있다면 그들을 따르자.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또 따라가겠다는 내각 선생님들, 비서, 호위병, 어머니, 누나, 막내 이많은 사람들이 비밀로 움직인다는 문제도 매우 난감했다. 중공군에게도 시민에게도 알릴 수 없다. 첩자들이 스며있다. 나의 이동이 알려지면 모두 보호를 자청하고 계속 따를 테니 큰 문제다. 그렇다면 중공의 무차별 사살은 불가피했다.
시민대표들을 부르니 밖에 알리지 않고 실천하자며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떠난뒤 개봉하라는 편지를 줬다. 공격을 받기 전에는 먼저 발표말라고 여러가지 세부지시를 써놨다. 옥쇄와 각종 직인, 법복을 갖고 날새기 전에 떠나기로 했다.
티벨군 제 2 대대장이 백 여명의 부하와 앞섰다. 반 마일도 못가서 중공군 순찰과 조우전으로 격퇴시켰다. 중공군은 동부피난민의 행동으로 무사한 모양이었다. 나는 항상 기도 정진중인 법당에 들어가 목수건을 탁자 위에 바쳤다. 이별의 뜻이다.
떠날 사람들은 모두 평복차림으로 10시에 만나기로 시계를 맞췄다.
법당마다 예불하고 거실로 돌아와 시간을 기다렸다. 어머니, 누나, 막내가 모두 동부지방 남장으로 먼저 떠났다. 내가 두번째 출발이고 그 다음에 두 차례가 더 있었다. 9 시 반 병사의 군복으로 갈아 입었다.
다시 법당에 예불했다. 전경도 하고 내 발소리 시계소리만 듣는다. 병사가 주는 총을 맸다. 호위가 둘, 한때 행복했던 정원을 어둠 속으로 걸었다. 호위대장이 나를 맡아 장경각을 지날 때 또 경배했다. 나는 안경까지 벗어 완전히 병졸처럼 행세했다. 앞선 사람이 검열나간다고 궁문을 열게 했다. 9 년전 중공군 침공 때 인도변방으로 피하느라 행사없이 나갔는데 이번에는 그보다도 더 구슬픈 출궁이다. 부옇게 시민들이 궁을 지키는 모습이 보였다. 무관심한 병졸 한 명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