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 별천지에 드리운 안국(安國)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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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 별천지에 드리운 안국(安國)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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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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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가 깃든 산사기행/ 적상산(赤裳山) 안국사(安國寺)

“살기 좋은 곳 무진장”
덕유산 자락의 무주, 진안, 장수 세 고을의 머릿글자 이름 ‘무진장’. 산과 골이 깊고 험해 그 속에서 고스란히 치러야 했을 팍팍한 삶을 어루만지던 말이다.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에서 내려서니 서울서 두 시간 반 만에 도착한 무주 땅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1,000m가 넘는 겨울산을 미끄러지기를 되풀이할 망정 전 날보다 10여도가 오른 따뜻한 날씨 덕분에 4륜구동차로 오른다. 무주 시내의 버스 유리창에서 읽어내린 문구를 불과 두어 시간 만에 확인하는 순간이다.
덕유산은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지리산에 다다르기 전 마지막으로 크게 용솟음쳐 오른 곳이다. 적상산은 미륵부처님이 올 때면 그 누운 향나무가 벌떡 일어나 향기를 뿜어낸다는 덕유산 향적봉을 지척에 두고 그 봉우리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이다.
『동국여지승람』 무주의 산천(山川) 편을 보면 그 이름이 상산(裳山)인데 “사면으로 곧추 선 암벽이 층층이 험하게 깎이어 마치 치마를 두른 것 같아 그 이름이니, 옛 사람들이 그 험준함을 사서 성으로 삼았다. 두 갈래 길이 겨우 위로 열리지만 그 안은 평탄하고 넓어 시냇물이 사방에서 솟아난다. 참으로 천연의 요새다.”라는 글귀가 적상산의 내력을 전해준다.
지금이야 1989년부터 진행된 무주 양수 발전소의 댐 공사로 인해 900m 높이의 옛 적상산성 안까지 도로가 구불구불 올라가지만 그 옛날에는 허리를 꺾고 두손 두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서는 들어설 수 없는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던 것이다. 과연 산 깊고 눈 많은 덕유산 자락이다. 안국사에 전화를 드리니 눈이 내리기 시작한 지난 11월부터 올 3월까지 안국사 참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노보살님의 걱정 섞인 음성이시다.
안타까움으로 망연자실한데 늠름한 덕유산 자락과 1,000m 높이의 안국사 설경이 눈 앞에 어른거려 너댓 시간 산길을 오를 각오로 다시 연락을 드린다. 마침 절 아래 내려와 계신 사무장님께서 길 안내를 해주시겠다는 뜻밖의 소식이다.
안국사(주지 원행, 063-322-6162)는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옛 무주 읍지인 『적성지(赤城誌)』의 「적상산안국사기」에는 건립 연대의 기록은 없고, 다만 이태조가 무학 대사로 하여금 그 견고하고 험준함을 생각하고 성을 쌓고 절을 세우게 했다고 적혀 있다. 이 성안에 여러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동국여지승람에서도 그 이름을 찾기 힘드니 아마도 창건 당시에는 다르게 불리었던 모양이다.
「안국사중수기」에 “나라에서 선사양각(璿史兩閣)을 지어 왕조실록과 왕실의 계보를 비장(秘藏)하고 승병들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족히 믿고 근심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의 이름을 안국(安國)이라고 붙인 것과 이 절에 소속된 작은 절을 호국(護國)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대개 뜻이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는 안국사라 이름한 뜻과 또한 그 이름이 후대에 다시 붙여진 것임을 짐작케 해준다.
고려 말 최영(崔瑩) 장군이 그 험준함을 보고 쌓았다고 전해지는 적상산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승병의 주둔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천연의 요새로 큰 난에도 화를 입지 않는 복지로 여겨짐에 따라 정작 본래의 목적보다는 역대 왕의 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록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광해군 4년(1612) 실록각이 세워졌고 2년 뒤(1614) 사고가 설치된 후 묘향산 사고의 실록을 옮겨왔다는 기록이 『적성지』 등 곳곳에 보인다. 인조 21년(1643) 사고 수호의 임무를 띤 호국사까지 창건하였다니 그 의미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지금의 안국사는 지난 1995년 무주 양수 발전소가 완공되자 그 터가 수몰되어 옛 호국사 터로 옮겨 온 것이다. 상부 댐에 올라서니 옛 안국사 자리며 사고터가 물에 잠겨 그 자취를 찾기 힘들다. 「적상산안국사기」에 일러 “ 방사가 정결하고 승려들이 많으니 남녘에서는 대찰이라 이를 만하다. … 승풍은 순박하고 아름다움은 천지개벽 후 처음부터 풍속이 순박한 것이니”라는 묘사가 있기에 올라오면서 눈여겨 본 성곽의 높이와 더불어 어림해보니 과연 그 자리의 아늑함이 ‘산중(山中)의 별천지(別天地)’였음에 틀림없으리란 생각이다.
청하루(淸霞樓)를 지나 극락전에 들어서니 낯익은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다. 목을 쑥 빼고 굽어보시던 비봉산의 부처님이 예서는 다소곳이 앉아 계신듯 하다. 그 뒤편으로 짙은 눈썹의 괘불 속 부처님 사진과 묘한 대조를 이루는데 그 어울림이 정겹기만 하다. 한 집에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는 형님 같고 동생 같은 부처님들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 극락전에 전해오는 옛 이야기 하나. 극락전 단청을 할 때의 일이다. 단청불사로 고심하고 있던 어느 날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부터 100일 동안 단청을 할 터이니 극락전에 하얀 막을 치고 물 한 그릇만 넣어 주되 절대로 그 안을 들여다 보지 말라.”고 일렀다. 그렇게 단청이 시작된 지 99일째 되던 날, 스님은 그만 하루를 참지 못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막 안에는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붓을 입에 문 흰 학이 단청을 하고 있었던 것. 순간 스님이 지켜보는 것을 눈치 챈 학은 단청 일을 남겨 놓고는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안국사 극락전의 뒤편 한쪽에는 딱 하루만큼 단청할 분량의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또한 예전엔 “온통 학이 노닐었다”고 할 만큼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천장을 빙 둘러 날고 있는 학이 적지 않으니 옛 이야기를 잊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해가고 있는 절의 노력이 한결 운치 있게 다가온다.
천불전의 모습은 그 동안 보아온 불전의 모습과는 달라 그 자태가 독특하다 싶었는데 바로 옛 사고터의 선원각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전란의 화마를 입지 않은 유일한 사고의 모습이라 하니 그 쓰임새가 흥미롭다.
고려의 지방관인 안렴사(按廉使)들이 난을 피해 올랐다는 안렴대 오르며 바라보니 극락전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하기사 영조 4년(1728) 조성된 10.4m 높이의 괘불(보물 제1267호)이 남아 있고, 일부분 남아 있는 괘불대의 크기 또한 상당하니 이만한 극락전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옛날 안국사를 찾던 신심 가득한 촌맹이들의 정성이 그만했던 것이리라.
안렴대 또한 정묘호란의 불길 속에서 유실될 위험에 처한 사고의 장서들을 이곳 바위굴 속에 숨겨 지켜낸 상훈 스님의 이야기가 전해오니 안국사가 지켜낸 이 나라의 역사와 정신이 오늘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안렴대에서 보니 향적봉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고 낮게 깔린 구름 속에 불쑥불쑥 드러나는 봉우리를 따라가다 만다는 지리산의 자태가 수묵화인 양 펼쳐져 있다. 산안개 뭉실뭉실 피어오르던 어제와는 달리 햇살 가득한 안국사 가람과 저만치 아래로 펼쳐지는 첩첩 산이 겨울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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