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만행
언젠가 불교계의 한 신문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당시 인기리에 방송 중이던 불교방송 ‘차 한 잔의 선율’ 중 금요일마다 나오는 ‘자비의 전화’ 때문이었다. 아침 아홉 시부터 방송되는 자비의 전화에서 진행자, 보조출연자, 리포터들이 툭하면 울어댔다. 처음 며칠은 그런 대로 감정 교감이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상투적인 울음소리 때문에 자꾸만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알고 지내던 기획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자 그 부장은 그러지 않아도 사내에서 그런 지적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한다고 했다. 진행자 스님이 워낙 인기가 높아 방송국에서도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세 여성이 울어주면 울어줄수록 모금액이 많아지므로 매우 미묘한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죽음조차도 깨달음의 인연이 될 수 있는데(부처님도 전생에 진리를 가르쳐 주겠다는 나찰의 말에 몸을 보시했잖은가), 하물며 살림살이가 어렵고(최저생계비를 지원받아 산다거나 자식들이 돈을 대주지 않아 노인 혼자라면 끓여 먹으며 산다든가), 가족관계가 불쌍하다는 점(남편이 집을 나갔다, 아내가 도망갔다, 그래서 애들하고 노인만 산다 등등) 때문에 스스로 그 상황을 극복하는 용기와 지혜를 주지 못하고, 돈 몇 푼으로 마치 지옥에서 사람을 건져올리는 듯한 태도를 갖는 건 옳지 못하다고 썼다.
부처님은 부귀영화를 내팽개치고 출가하여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는 갖은 고행을 자처했는데, 부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그런 감상에 지나치게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수행자로 말하자면 스스로 고아가 되고, 스스로 가난뱅이가 되며, 스스로 천하고 낮은 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수행자가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다른 것도 아닌 진리를 찾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약 행복을 추구한다면 우린 동정심쯤은 가질 테지만, 나는 한 번도 스님네들을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부러우면 부러웠지 그게 왜 불쌍한가.
1950년대, 미국의 석유재벌 게티는 50억 달러라는 엄청난 재산을 벌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의 손자를 유괴하고 돈을 요구했다. 그러나 게티는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다. 단지 거부라는 이유 때문에 돈으로 손자를 구하면 앞으로도 그런 사건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 사건 이후 유괴 사건이 줄어들고, 유괴를 새로 경험하게 된 사람들은 용기를 갖게 되었다.
임진왜란도 그렇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양반사대부는 다들 피난을 떠났지만 가난한 농민, 장사꾼, 백정, 갖바치, 도공 등은 쓰러져 가는 집을 지켰다. 그러다가 팔자를 고치겠다고 일본군을 따라나선 사람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정말 팔자를 고치기도 했고, 또 일부는 의병에 들어가 일본군의 목을 벤 공로로 벼슬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양반 중에는 임지를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이 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 양반들이 짐승처럼 부리던 하인들이 현감, 군수로 뛰어올라 전날 주인의 딸과 결혼하고, 주인에게 소작을 주기도 했다. 그 결과 왕후장상(王侯將相)은 나면서 결정된다는 운명론이 깨지고 누구나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백성들 사이에 퍼졌다. 민중 문학, 민중 예술이 발달하고, 비로소 상민, 천민들도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임진왜란도 이런 시각으로 보면 엄청난 교훈이다. 6·25도 마찬가지다. 온 가족이 피난을 다니면서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위와 장모 등 온 가족이 좁은 헛간이나 골방에 웅크리고 함께 생활해야만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유교에 찌들었던 경직된 인간관계가 허물어졌다. 서로 대화를 하게 되고,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이것이 근대화의 기적을 이룬 동인이었다고 누군가 주장했는데, 나 역시 동의한다. 그 전만 해도 부부간에도 대화가 없었고,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감히 얼굴조차 바라보지 못했다. 남자들은 으레 사랑방에 나가 따로 잠을 자야 했고, 체면 때문에 불편한 갓을 쓰고 헛기침을 해대면서 손도 대지 않은 일이 너무 많았다. 박종철이 죽어 민주화를 앞당기고, 전태일이 죽어 근로 조건이 향상되는 식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갑자기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온 우리 가족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사실 난 글을 쓰기 위해 시골로 이사한 게 아니다. 전원 생활을 즐기기 위해 내려온 건 더더욱 아니다. 난 단지 내가 기르던 개 두 마리가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기를 원해서 이사했을 뿐이다.
아파트 반상회에서 개를 처분하든지 이사가라는 권고가 나오자 우리는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도 말고, 우리 개들한테 상처를 주지도 않는 길을 찾다보니 나와 아내 두 사람이 희생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덕분에 이사 후에도 서울에 있는 집필 사무실을 5년 넘게 출퇴근했고, 아내는 무교동에 있는 회사까지 2년을 더 다녔다.
나는 딸의 학교 때문에 이사한 지금도 그 곳에 남아 있는 강아지(우리 견공 가족은 8마리다. 떠돌이, 정신이상개, 버려진 개 들을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됐다.)들을 위해 하루 한 번씩 들른다. 물도 갈아주고, 사료도 주고, 다 함께 뒷산에 올라 뛰어다닌다. 그러다 보니 하루 한 시간은 개들에게 쓰는 셈이다. 나이 많은 놈이 열세 살이니 나이만큼의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 동안 나는 녀석들을 돌보면서 온갖 스트레스를 풀고, 녀석들을 따라 피톤치드 물씬한 숲길을 매일 한 시간씩 13년이 되도록 걷고 사유했다. 개들과 함께 숲 속을 산책하는 것이 내가 하는 유일한 운동이다. 덕분에 나는 잔병에 걸리지 않았고, 머리도 상쾌하다. 그럼 내가 덕을 본 것 아닌가.
나는 지금도 시시각각 새로 태어나고 새로 죽는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소설가라는 게 원래 그렇다. 한 작품을 시작하면서 인생을 새로 시작하고, 작품이 끝나면서 문을 닫는다. 태어나고 죽기를 해마다 반복한다.
이제 곧 신문에 연재하던 소설 당취(黨聚)도 끝난다. 조선 중기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가장 낮은 계급 천민으로 학대받으면서도 꿋꿋이 불교를 지켜낸 당취들의 이야기가 끝나가니 나는 또 죽고 또 새로 태어날 준비를 해야 한다. 만행(萬行)은 멀리 있지 않다. 생각의 자유를 갖기 위한 것이라면 숨 쉬는 찰나에도 있지 않을까.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