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 창간 50주년] 불이不二와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정신-고우 스님과 파욱 스님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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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 창간 50주년] 불이不二와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정신-고우 스님과 파욱 스님의 대담
  • 유철주
  • 승인 2024.09.0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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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불광 ⑨ 2006~2014

지난 2011년 4월 8일부터 사흘 동안 전통불교문화원에서 열린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만남과 소통 국제 연찬회’는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고승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간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으로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두 수행법의 진면목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과연 두 선지식(고우 스님, 파욱 스님)이 말하는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정수는 무엇이었을까.

고우 스님과 파욱 스님의 대담은 연찬회 마지막 날인 4월 10일 오전 7시부터 4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대화의 주제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 ‘깨달음의 사회적 역할’ 등이었으며 간단한 법문 후 질의응답으로 이어졌다. 두 스님은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깨달음의 사회적 역할 등 몇 가지 물음에는 미묘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대담의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파욱 스님과 고우 스님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법은 무엇입니까?

파욱 스님   부처님이 가르친 깨달음의 핵심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다. 중생은 무명(無明), 갈애(渴愛), 취착(取着), 행(行), 업(業) 등 다섯 가지 원인을 없애야 삶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고통을 끊을 수 있다. 괴로움의 소멸은 윤회를 멈추게 하고 유위법(有爲法)에서 자유로워지게 한다. 그것의 방법은 사성제(四聖諦)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존재에 대한 갈애는 사라지고 다시 태어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때가 되어야만 열반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팔정도(八正道)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은 바다에서 물이 서서히 올라왔다 줄어들고 결코 갑자기 떨어지지 않듯이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 개구리가 깡충 뛰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처님은 어떻게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했다. 위빠사나는 궁극적 물질과 정신, 그것의 원인인 유위법을 대상으로 한다. 유위법은 일어나자마자 사라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상(無常)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사라짐에 의해 압박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통(苦)이다. 거기에는 영원한 실체나 자아가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한다. 위빠사나를 체계적으로 수행하면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과는 모든 번뇌를 없앨 것이다. 위빠사나 지혜가 성숙하면 ‘도(道)와 과(果)의 지혜’가 일어날 것이다. 열반은 무위법이며 출세간의 성스러운 진리다. 그래서 열반은 어떤 물질, 정신, 원인, 결과도 없는 순수 평화로운 상태다.

 

고우 스님   부처님은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로써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고 했다. 우리는 본래 다 완성된 존재요, 부처다. 그런데 왜 부처 역할을 못 하느냐? ‘나다’, ‘너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착각을 깨면 본래대로 돌아간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특징이다. ‘본래 부처’를 전제로 하고 우리는 수행한다. 수행은 착각을 깨는 것이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에서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로 가는 것이 불교다.

착각을 깨는 과정이 힘든 사람도 있고 쉽게 하는 사람도 있다. 파욱 스님이 말한 방법은 굉장히 쉽게 가는 방법이다. 큰 산을 오르는데 초기불교가 서쪽에서 오른다면 대승불교는 동쪽에서 오르는 것이다. 서쪽은 평탄하면서 길이 좀 길다. 동쪽은 길은 짧은데 굉장한 경사지다. 화두는 바로 들어갈 수 있지만 경사가 심해 오르는 데 힘이 드는 수행법이다. 그 대신 빠르게 짧은 길을 투과할 수 있다.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좋은 수행법을 택하면 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파욱 스님   비구는 잘못된 생계 가운데 그 어느 것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 사회와의 부적절한 연관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 아라한이든 아니든 비구가 사회를 이롭게 할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스스로의 수행이다. 부처님의 승가에서 좋은 길을 수행하고, 곧은 길, 옳은 길, 적합한 길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세상에서 비견할 바 없는 공덕이다. 경전에 따르면 좋고 곧고 옳고 적합한 길은 부처님의 삼학을 수행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네 가지 계청정과 근접삼매, 선정, 위빠사나, 도와 과의 지혜가 따른다.

비구가 사회를 이롭게 하는 두 번째 방법은 사람들이 법을 청하고 율장에 따른 조건이 허락한다면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재가자는 비구들에게 가사와 음식과 의약품 등을 제공하며, 비구 또한 재가자들에게 처음과 중간과 끝이 좋은 법을 설한다. 비구와 재가자들은 참으로 완전하고 순수하며 고귀한 삶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성스러운 삶은 서로를 의존해 사는 것이다.

 

고우 스님   부처님 출가 동기 자체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지혜의 눈으로 당신이 고뇌했던 문제를 비춰보니 해결 방법이 나왔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과 사회성’이다. 부처님 당시로부터 2,600년이 지났지만 법(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원히 적용할 수 있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눈으로 사회를 개혁하고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스님들은 사회성의 실천에 몸을 바치고 본인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겠다고 출가한 사람들이다. 스님들은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무아(無我)와 공(空)을 이해해서 절대 무한의 세계에서 사회를 볼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존재의 원리를 알면 가정과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다. 부처님은 전쟁도 막았다. 사회도 정치도 민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민주주의도 불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사회문제에 대해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불교를 보면 오히려 세속적으로 닮아가고 있다. 정말 반성해야 한다. 불교를 알고 지혜를 계발해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갈등과 대립은 어떤 이유로든 옳지 않다. 자살이나 갈등, 대립 등 우리 사회 많은 문제를 풀 방법이 다 불교 안에 있다. 불교와 사회성은 하나다.

 

불교 진리의 핵심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아라한의 경지와 부처의 경지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고우 스님   변하는 것은 형상이다. 도인도 모양은 변한다.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형상은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파욱 스님   테라바다 전통에선 아라한이 되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모든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다시 중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수행방법을 점수돈오(漸修頓悟)와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볼 수 있는 것입니까?

파욱 스님  간화선 수행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상좌부 위빠사나는 점진적 수행과정이 필요하다. 팔리경전에 짧은 법문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것은 과거생에 엄청난 수행을 했다는 말이다. 아마도 단박에 깨쳤다는 것은 상수제자들의 경우일 것이다.

고우 스님   인간은 본래 부처임에도 중생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착각이다. 위빠사나는 ‘미혹’한 것을 닦는 것이어서 점진적 수행이 된다. 그러나 간화선은 착각을 단박에 깨는 것이기 때문에 돈오돈수다.

2011년 4월 8일 열린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만남과 소통 
국제 연찬회’에서 법문하는 고우 스님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미얀마의 현실에 비춰 불교의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파욱 스님   세상에 온갖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평온한 마음을 보내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다툼에 끼어들 수 없다. 부처님은 제자가 잘못했을 때 간접적으로 두 번 타일렀으나 잘못된 행동을 세 번째 되풀이했을 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의 업이 커져서 그랬기 때문이다. 업이 익을 때는 막을 방법이 없다.

 

고우 스님   그와 반대되는 얘기도 있다. 아사세가 밧지국을 쳐들어가는데, 아사세의 왕이 대신을 보내 전쟁을 이길 수 있는지 부처님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부처님은 밧지국처럼 민주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나라는 번성하면 했지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얘기를 대신이 왕에게 전해 전쟁을 하지 않게 했다. 얘기한 바와 같이 불교와 사회성은 둘이 아니다.

 

두 스님의 제자가 각각 위빠사나와 간화선 수행을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고우 스님   상관없다.(웃음) 방법만 다를 뿐 지향하는 목표는 같지 않나. 격려해줄 것이다.

파욱 스님   그런 제자를 알지 못한다.

 

● 고우 스님  

김천 청암사 수도암으로 출가해 청암사 강원에서 고봉, 직지사 강원에서 관응, 혼해 강백으로부터 강원 교과를 이수하고 일생을 참선 납자의 길을 걸었다. 1968년 문경 봉암사에 들어가 선원을 재건해 오늘날 조계종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졌고,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와 봉화 각화사 태백선원 선원장을 역임했다. 2005년 「조계종 수행의 길-간화선」 간행을 주도했고, 2007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고, 대종사(大宗師) 품계를 받았다. 2021년 문경 봉암사에서 원적이 들었다. 

 파욱 스님  

1934년 미얀마 수도인 양군에서 북서쪽 마을에서 태어나 1944년 출가했다. 20세가 되던 1954년 비구계를 받았고, 1956년 담마차리야(Dhammacariya) 시험을 통과해서 법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1994년 1월 미얀마 정부는 스님에게 ‘아가 마하 깜마타나차리야(Agga Maha Kamma tthanacariya)’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이는 ‘높이 존경받는 명상스승’이라는 의미다. 미얀마 파욱 사원의 조실이다.

 

*2011년 5월호(통권 439호)에 특집 <간화선과 위빠사나, ‘구별짓기’보다 ‘소통’이 필요하다!>에 실린 고우 스님과 파욱 스님의 대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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