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거울에 비친 ‘나’, 나르시스
사람들은 외출하기 전에 대부분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살펴보고 입은 옷은 잘 어울리는지 점검한다. 길을 걷다가 쇼윈도에 자신을 비춰 보기도 한다. 이때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뿌듯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위축되기도 한다. 일상에서 무심하게 행해지는 이러한 양상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나’에 대해 집착하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기쁨과 슬픔을 일으키는 것은 ‘나’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자기애(自己愛)에 관해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나르시스(Narcissus, 나르키소스)라 불리던 미소년이 조그만 샘 근처를 지나가다가 샘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무심코 보고는 자기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사랑에 빠진다. 샘에서 눈을 떼면 보이지 않는 자기 모습에 나르시스는 몇 날 며칠을 그곳에 머물며 계속 바라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붙잡으려다가 결국 물에 빠져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 후 나르시스가 있던 샘에는 그의 이름과 같은 수선화(narcissus)가 피어 있었다고 한다. 수선화의 꽃말이 ‘자기주의(自己主義)’ 또는 ‘자기애’라고 불리는 것도 이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샘에 비친 자기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그것을 소유하려는 집착으로 인해 결국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 이 신화에서 우리는 일상인의 모습, 곧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양상을 읽어낼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타인을 보는 마음
‘나’에 대한 집착을 세밀하게 설명하는 대승불교의 유식학(唯識學)은 수행자들이 마음의 양상에 대해 깊이 관찰한 것에 기반을 둔다. 유식학은 오직 마음의 작용에 초점을 두고 인식이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한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은 나의 마음에 떠오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 또한 마음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내 가족이나 친구를 볼 때 나는 오로지 나의 마음에 떠오른 대상(가족, 친구)을 볼 뿐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나의 마음에 비친 대상을 볼 뿐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유식학은 ‘나’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는 마음의 작용을 제7 말나식의 역할로 정의한다. 5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대상이 비칠 때 그것을 인식하는 작용, 그리고 그 결과를 판단하고 분석하며 언어로 표현하는 제6 의식은 표층식이라고 부른다. 전5식(前五識)과 제6 의식은 자각할 수 있는 마음이다. 반면, 제7 말나식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제8 알라야식은 자각할 수 없는 심층식이라고 부른다. 현대어로 표현하자면 말나식과 알라야식은 무의식에 해당한다.
유식학은 이 모든 작용이 마음이라는 거울에 대상을 비춰 생겨난 것이라고 본다. 특히 ‘내 몸’, ‘내 가족’, ‘내 친구’, ‘내 나라’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이면에 말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필자는 말나식의 작용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은 예를 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오늘의 ‘나’는 내일도 지금의 모습대로 존재할 것이며 몇십 년 후에도 지금처럼 살아갈 것으로 여긴다. 나와 함께 일상을 보내던 사람이 늙고 병들며 사망해서 사라지더라도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 깊숙한 곳에 끈끈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막연하게 나는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생각이 있다. 유식학은 이러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바로 제7 말나식의 작용이라고 본다.
사회적 자아와 거울
‘나’는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다. ‘나’는 사회 속에서 지켜야 할 예절, 규칙을 배우고 상황에 맞는 언어를 습득하며 살아간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성장해 사회의 규칙을 익히며 사회적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을 거울단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으로 표현한다.
거울단계는 6~18개월 사이에 자아(ego)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거울을 처음 본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자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자아’로 알아본다. 이때가 바로 인간이 자신을 최초로 인식하는, 즉 ‘자아’가 발견되는 순간이다.
라캉에 따르면 이 ‘자아’는 거울이라는 타자(他者)를 통해 비로소 구성된 ‘자아’다. 따라서 한낱 이미지에 불과한 대상을 통해 나를 인지하게 된다. 라캉은 이 자아는 거울이라는 타자를 통해 비로소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봤다.
라캉에 따르면, 아이는 거울에 비친 개인의 모습을 보며 자아를 강화하는 단계를 거쳐 유치원, 학교에 입학하고 나아가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자아가 형성된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징계로 표현한다.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며 질서의 세계다. 아이는 다른 사람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 사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배우고 규칙과 질서를 습득하면서 사회적 존재가 된다.
특히 ‘사회적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한 사회학자 찰스 호튼 쿨리(C.H.Cooley, 1864~1929)의 ‘거울 속의 자아(Looking glass self)’ 이론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자아의식이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고 봤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반응이 거울이 되어 자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칭찬을 많이 받으면 밝고 긍정적이며, 반면 꾸지람을 많이 받으면 소심하며 의기소침한 성격이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언어로 또는 표정이나 몸짓으로 받는 피드백은 우리의 자아존중감에 영향을 미친다. 긍정적인 피드백은 우리의 자신감을 증진할 수 있다. 반면, 부정적인 이야기나 비판은 자기를 의심하게 하며 자기의 가치를 비하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사회적 환경은 건강한 자아를 기르거나 반대로 부정적인 자아개념을 만들 수 있다.
사회적 욕망(거울)을 욕망하다
타인의 반응에 따라 ‘나’의 마음이 변하는 현상을 잘 보여주는 예로 가상공간이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은 인터넷이 생활화된 현상을 낳았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클릭하면 전 세계에서 발생한 사건을 즉시 알 수 있다. 카톡방을 만들어 함께 소식을 공유한다. 줌(zoom)으로 강의를 듣기도 하고 유튜브를 시청하기도 한다. 또한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으로 일상의 모습과 생각을 공유한다. 이제 이런 현상은 더는 신기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을 수 있고 마음만 내면 가상공간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사람들은 자신이 올린 글이나 사진에 타인이 ‘좋아요’를 클릭한 수와 댓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글이나 사진을 올릴 때마다 자기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에 주안점을 두게 된다. 찰스 호튼 쿨리의 ‘거울 속의 자아’ 이론이 보여주듯이 SNS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평가에 부합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행동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에 맞춰 생각과 행동이 변해 간다. 라캉이 개인의 욕망은 사회적 욕망을 추구한다고 했듯이, 나 자신의 욕망은 사회적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인은 남을 위한 ‘나’를 SNS에 노출해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적 욕망을 욕망하는 현상이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결여의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더 많은 호응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SNS에 사진을 올리는 예에서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라캉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정확하게 통찰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사회적 산물, 즉 상징계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유식학의 견지에서 볼 때, 이것은 공통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욕망을 자기 ‘마음’으로 욕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수행, 거울 속 나를 보는 과정
유식학에서 볼 때,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나’는 내 마음에 나타난 영상을 보는 것이며, 타인의 눈 속에 비친 모습 또한 내 마음에 나타난 영상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 자신의 욕망에 따라 그 영상을 해석하게 된다.
예컨대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나는 항상 그 모습대로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욕망일 뿐이다. 어제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이 항상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에 과자를 먹었거나 시원한 맥주를 마셨을 때,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부석부석한 얼굴이 비치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또한 마음이 즐거운 상태에서 비친 나의 모습과 울적한 상태에서 바라본 나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때가 있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유식학은 욕망을 일으키는 번뇌를 정화하고 나아가 소멸함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수행자는 마음에 떠오른 영상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 본성을 통찰하는 과정을 밟아 간다. 일상인들은 마음에 떠오른 대상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집착하지만, 수행자는 그러한 양상을 간파하고 조절한다.
유식학은 번뇌를 완전히 소멸했을 때, 마음은 밝고 맑은 거울이 되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게 된다고 본다.
안환기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응용불교학 전공지도교수이며 학술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철학과에서 동양철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종교학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 『유식학으로 보는 몸과 마음 - ‘정서’와 ‘인지’ 작용의 토대』, 『도표로 읽는 유식입문』, 『유식, 마음을 읽다』, 『유식, 마음을 변화시키는 지혜: 나를 바꾸는 불교심리학』(번역서)과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