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상도동 보문사에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참여하는 보문선원이 있다. 보통의 도심 선방은 재가불자를 위한 곳이지만, 보문선원은 산중에 있는 선방처럼 스님들도 안거를 보낸다. 올여름 하안거에도 8명의 스님과 80여 명의 재가 불자들이 방부를 들였고,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이 마무리된 후에는 스님들과 재가자들이 용상방(龍象榜)을 짜고 있었다.
2022년 완공된 보문선원 건물은 오로지 선방으로만 운영된다. 1층에는 재가자들이, 2층에는 스님들의 선방이다. 지범 스님을 만나 보문선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스님들이 방부를 들이는 선원을 서울에 세운 이유를 먼저 물었다.
“서울 도심에서 도인이 나와야죠. 어디 도인이 산중에만 있답니까?”
지범 스님은 40여 년을 선방에 머물렀다. 2001년 은사 스님 입적 후 맡게 된 보문사 주지 시절에도 안거 때는 선방으로 몸을 향했다. 안거 때는 선방 수좌로, 해제 때는 보문사 주지 소임을 살았다. 수좌로서의 삶을 도심 속에서 펼치는 원력이 구체화된 시기는 2019년 화엄사 선등선원에서 동안거를 보낼 때다.
500배 절을 마치자 “선원을 지어라!”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도심 속에 출재가가 함께하는 선원을 짓겠다고 하니, 인연 있던 선방 스님들부터 보문사 신도들까지 모두 말렸다. 코로나19라는 시절 인연도 도래했다. ‘서울 도심에서 도인을 만들겠다’는 원력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도인(道人)을 찾아서
스님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두 달간을 고창 선운사의 석상암(石床庵)에서 보냈다. 방황이 심했던 시절이다. 그곳 스님들로부터 도인(道人)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라는 화두를 들기도 했다.
다니던 대학을 포기하고 도인을 찾아 나선 때가 1978년이다. 나주 다보사의 우화 스님을 찾기로 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역에서 내려 버스 터미널에 갔는데, 그곳에서 두 분의 스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두 분의 스님 중 한 분이 말했다.
“내가 우화 스님의 제자인데, 스님은 1976년에 이미 입적했다. 마음을 굳혔다면 굳이 다보사로 가는 것보다는 나를 따라 올 수 있겠느냐?”
그렇게 따라간 스님이 은사인 정진 스님이다. 지범 스님은 행자 생활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자마자 선방으로 떠났다. 첫 번째 인연은 변산의 월명암. 스님은 하루빨리 도인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선방 인연이 지금껏 40년이다.
망월사, 봉암사, 해인사, 칠불사 등 제방의 선원을 다녔다. 봉암사와 고운사 등에서 100일 용맹정진을 했고, 대자암 백담사 진귀암 등에서는 3년에 걸쳐 무문관 생활을 보냈다.
선방에서 용맹정진은 하루 18시간 이상을 좌복에 앉아 있는 생활이다. 어떤 곳에서는 새벽 2시에 눈을 떠, 그날 밤 10시까지 스무 시간을 100일 동안 오로지 화두를 들기도 한다. 무문관 수행은 자그마한 방에 들어가서 100일이 채워질 때까지 문밖을 나오지 않는 시간이다.
도인들의 삶과 죽음
수행자들은 선방에 들어갈 때, ‘내일은 없다’라는 생각에 눈썹을 밀어버린다. 지범 스님도 그랬다. 1993년 죽고자 하는 생각으로 계룡산 대자암 무문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화두에 진전이 없으면 나는 죽은 몸’이라는 생각으로 정진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찰나 문틈 사이로 개미들이 짐을 옮기고 있었다. 나르던 짐에서 개미들이 떨어지고 붙기를 반복하다 기어코 모든 것을 옮겼다.
‘미물도 원을 세우면 성취하는데, 장부 중의 대장부인 선승이 여기서 죽을 수 있나’라는 생각에 화두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깨달음 병’에 걸린 것을 알아차렸다. 대중과 함께하는 삶을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
선방에서 화두를 들다 입적한 스님들을 직접 보기도 했다. 석봉 스님은 그런 수행자 중 한 명이다. 고운사 금당선원에서 용맹정진을 함께했는데, 석봉 스님은 하루 한 숟가락 공양만으로 20시간을 좌복에 앉았다. 봉암사에서도 함께 있었다. 어느 날 석봉 스님이 토굴에서 좌탈입망(坐脫立亡)했다는 소식이 바람 소리로 들려왔다. 이렇게 선사들의 삶과 죽음은 매 순간 반복한다.
백담사 무문관 시절 오현 스님과 바로 옆방에서 100일을 보냈다. 해제날 무문관 빗장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니, 오현 스님이 “지범 수좌, 밥값을 내놓으시오”라 한다. 스님은 이렇게 송을 읊었다.
조실 스님 할(喝) 소리에
무문관 빗장이 무너지고
대청봉
춤을 추고 노래하며
삼동에도 백담사 골짜기에
복사꽃이 만개했습니다.
지범 스님도 어느덧 도인을 닮아가고 있었다.
국사봉 보문선원
2000년 은사 스님이 입적하시면서, 스님도 상도동 보문사로 옮겨야 했다. 장애인, 군부대 등 포교에 원력을 세우신 은사 스님의 뜻을 잇기는 쉽지 않았다. 주지 소임을 맡지 않으려 이리저리 도망하기도 했다.
은해사 기기암에서 정진 중에 비몽사몽간에 은사 스님이 나타나서 “내가 이렇게 힘들게 있는데, 너는 뭐하냐!”라는 소리에 엉겁결에 “예, 가겠습니다” 대답을 해버렸다. 마침 문밖에는 100일 기도를 마치고 스님을 찾아온 보문사 신도들이 있었다. 결국 2001년 3월 서울로 발걸음을 돌렸다.
선방에만 몸을 두던 스님이 도심 속에서 주지를 맡고 있으니 병이 몸으로 오기도 했다. 여러 번 쓰러졌고, ‘선방에 가지 않으면 죽겠구나’ 하는 생각도 여러 번이었다. 신도들이 “스님, 안거 때는 선방에 가시고 대신 주지 소임만은 놓지 마세요”라는 부탁과 양해 속에 안거 때는 선방 수좌로, 해제 때는 보문사 주지로의 삶이 시작됐다.
스님은 2019년 화엄사 선등선원에서 들린 ‘지범 수좌, 선방을 지어라’라는 목소리를 부처님의 가피로 생각한다. 그 이후 누가 뭐라 해도 ‘서울에 선방을 짓겠다’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2억을 손에 쥐고 시작한 선원 불사는 선방 수좌들의 도움이 컸다. 144명에 이르는 수좌 스님들이 힘을 보탰고, 불교방송 진행을 하면서 인연이 된 스님들과 불자들이 도와줬다. 어떤 비구니 스님은 몇천만 원을 내놓기도 했다. 스님은 보문선원을 설계할 때부터, 출재가가 함께하는 선원을 그렸다. 아마 전국에서 드문 시도였을 것이다.
2022년 가을, 선방을 번뜻하게 지어놓고 나니 ‘산중사찰의 선방도 비어가는데, 도심 속 선방에 스님들이 올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괜한 기우였다.
“스님들이 방부를 들이면 나가지를 않아요. 어떤 스님은 그래요. ‘지범 스님, 선방 불사할 때 해제비 아껴가면서 보시한 스님이 몇인데, 방부를 받아야죠’라는 하소연도 합니다.”
모두 소중한 인연이 있던 분이고 격려 차원에서 하는 말들이지만, 스님은 어깨가 무겁다. ‘두세 철 나면 방부를 강제로 빼는 삼진아웃제’를 고민 중이라며 웃는다.
도심 속 도인을 기다리며
보문선원의 모델은 스님이 젊을 때 머물렀던 해인사 선방이다. 성철 스님, 일타 스님, 혜암 스님, 법전 스님 등 기라성 같은 도인이 있던 해인사는 그 시절 한국불교의 표준이었다. 스님의 기억 속에 꼬장꼬장한 도인들도 수좌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다고.
10시에 취침하고 2시에 일어나는 용맹정진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대중 중 일부가 저녁마다 절 밖으로 나가서는 새벽에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야심한 시각에 문밖에서 곡차를 한 것이다. 대중공사를 해서 ‘모두 내보내자’ 했는데, 혜암 스님이 한 말씀 하셨다.
“맥주의 근본은 물입니다.”
나하고 맞지 않더라도 모시고 사는 것이 수행이라는 점을 배웠다. 지범 스님은 스님들, 특히 선방 수좌 스님들을 극진히 대접하기로 유명하다. 덩달아 보문사 신도들과 선원에 방부를 들인 재가불자들 역시 스님들을 극진히 모신다. 보문선원은 ‘내보내는 법이 없다’고 강조한다.
또 다른 자부심은 ‘서울 시내에 스님 선방과 재가자 선방이 함께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다’라는 점이다. 8명의 스님, 80여 명의 재가자가 한국불교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고.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죠. 간화선은 1,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선 혹은 명상이라는 이름과 위빠사나라는 이름도 있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는 화두선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 정체성을 이곳에서 이어가야죠.”
보문사는 매주 일요일 법회를 ‘선’을 주제로 하며, ‘간화선 대법회’도 시시때때로 개최한다. 재가자 선방에는 매주 화요일마다 ‘소참법문’을 진행한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용맹정진도 한다.
“두 철만 앉으면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선방이 없어 공부 못한다는 이야기는 없어야 해요. 깨달음을 실천하고,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불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스님은 국사봉 아래 보문선원에서 ‘내가 부처임을 100% 믿는 상근기 도인(道人)의 출현’을 기대한다. 그리고 보문선원이 한국불교 미래의 모델이 되기를 기대한다.
사진. 유동영
지범 스님 신간
지범 스님이 40년 넘게 제방의 선원을 다니면서 정진했던 삶을 이야기한다. 용맹정진, 무문관에서의 수행, 선사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은사 스님 입적 이후 보문선원에서 도심 속 재가불자들과 함께했던 원력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