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규봉암에서 원각사로
무등산은 젊은 시절 어머니 품처럼 언제나 날 품어주던 마음의 고향이었다. 무등산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때는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무등산 오르는 길 초입에 있는 문빈정사에서 토요일마다 조선대 불교학생회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광주지부 법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억새가 흔들리던 장불재 너머 규봉암을 찾는 건 큰 기쁨이었다. 병풍처럼 우뚝 솟은 주상절리 광석대 아래, 규봉암 법당 앞에 앉을 때는 세상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조선대 후문에서 가방을 뒤지면서 불심검문을 하던 형사들도, 방패와 몽둥이를 휘두르던 전투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뛰어가던 친구의 뒷모습도, 매캐하던 최루탄 연기며 그 모든 것들이 아득해졌다. 얼음을 깨 찬물에 세수하면서도 규봉암에 앉아 있는 것이 좋기만 했다.
1987년 5월 학원민주화 투쟁으로 강의실의 문이 굳게 닫히자 무등산 규봉암으로 향했다. 아침 예불 후 우뚝 솟은 규봉암 바위에 올라 좌선하면서 맞이하던 아침 햇살은 그리 따뜻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3,000배를 올리고 나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아침.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도 모두 저 안개 너머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겨드랑이가 시원해지고 내가 무언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정적을 깨고 원각사 법당에 최루탄이 터지고 난리가 났는데 뭐하냐는 전화를 받기 전, 모든 것은 평안했었다. 일륜 스님을 모시고 급히 광주 시내 원각사 대웅전으로 향했다. 5월 18일 밤 5・18 추모법회를 하고 있는데, 사복경찰이 군홧발로 법당에 난입해 사과탄(사과 모양의 최루탄) 수십 발을 투척하고 참석자들을 무차별 구타와 함께 연행했다고 했다. 대웅전에서 절을 하는데 눈물 콧물이 쏟아졌다. 법당에까지 쳐들어와 던진 최루탄 파편에 다쳐 손에 붕대를 감은 금강 스님을 보자, 애써 외면했던 현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5월 27일 원각사 경찰난입 및 불교탄압규탄 범불교도대회가 열리기까지 매일 원각사 규탄법회에 참석했다. 그때 원각사에서 속칭 ‘광주비디오’를 처음 봤다. 여태껏 배워서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진실을 목도하자 마음속에서 무등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광주사태는 북한 간첩의 사주로 일으킨 폭동이 아니고,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한 시민항쟁이었으며, 광주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고 계엄군의 총탄에도 끝까지 저항했던 민주시민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광주학살의 주범들이 여전히 권좌에 앉아 9시 뉴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내가 진실을 외면하고 규봉암에 편안히 앉아 있을 때, 광주 시내 한복판 원각사가 군홧발에 짓밟혔다고 생각하니 분노와 회한의 눈물로 며칠 동안 머리를 쥐어뜯었다.
망월동 5・18 묘역에 처음 갔었을 때, 선배들은 작년까지만 해도 5월에 묘역에 오지도 못했고, 건너편 산으로 몰래 와서 쳐다만 보고 갔는데, 이제야 5월 27일 망월동 묘역에 오다니 눈물겹다 했었다.
그때 처음 한 청년을 만났다. 묘지번호 86번 지광 김동수 열사! 그날 이후 김동수 열사는 내 마음속에 각인됐다. 매년 5월마다 추모제로 만날 때만 떠올리는 선배가 아니라, 김동수 열사가 살고자 갈망했던 그 푸르른 날을 나는 살고 있다는 생각에 늘 ‘동수형이라면 어찌할까’라는 질문이 화두로 자리 잡았다.
보살의 화신 김동수 열사
김동수는 1978년 조선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조선대 불교학생회 대불련 활동을 했다. 불교학생회 입회 동기인 이장국은 “김동수는 불교학생회에 진심으로 열심히 하고 신심이 매우 깊었다”고 기억했다. 늘 목탁을 치면서 법회를 주도했고 좌선하며 차분하게 동기들을 신행 활동의 길로 안내했다고 했다.
1980년 3월 대불련 전남지부장에 취임하고, 대불련 활동에 온 힘을 쏟아 불심이 매우 깊은 청년 불자였다고 동기들은 회고했다. 모든 모임에는 늘 그가 말없이 참석했고 할 일을 묵묵히 했던 믿음직한 도반이었다. 평소 그가 즐겨하던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라는 말은 추모비에 새겨져 있다. 또한 조선대 민주화투쟁위원회 및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한 그는 각종 시국 강연회와 4·19혁명 기념행사에 함께했고, 학내 민주화 투쟁을 위한 철야농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동수는 1980년 4월 광주 부처님오신날 봉축 준비위원회 진행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전남도청 점등식과 5월 17일 봉축 사상강연회에서는 법정 스님을 연사로 모시고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김동수의 동생 김동채는 5월 16일 토요일 아침 이날 형이 봉축행사에 참석할 수 있냐고 자신에게 물었는데, 그것이 형님의 마지막 목소리로 남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5월 18일 새벽, 조선대 교정에 계엄군이 진군해 교정을 샅샅이 수색하고 무차별 구타와 폭행으로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김동수와 신광사에서 밤을 함께 지낸 조선대 불교학생회장 이남, 오원재 등은 자신들이 예비 검속자에 포함된 것으로 판단하고 일단 몸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이남은 결국 구속당해 고초를 당했다.
초파일 행사를 뒤로 미룰 것을 결정하고 신광사에서 내려오다가, 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에 쫓겨 죽을 고비를 겪었다. 이남과 김동수는 이영헌의 집이 있는 목포로 기차를 타고 피신했다. 목포지부 체육대회 준비 상황을 점검하려고 목포 정혜원에 스님을 찾았을 때, “지금이 어느 시국인데 체육대회 준비 걱정이냐”, “얼른 몸을 숨겨라”는 권유로 목포 근처 이영헌의 집에서 지냈다. 김동수는 다시 광주로 올라가고자 했으나 차편이 마땅치 않아 며칠 더 지냈다.
5월 21일 아침 목포 시내에서 시위대의 트럭에 올라탄 김동수는 동기인 이남에게 알리지 않은 채 광주로 돌아왔다. 이남은 평소에 김동수는 “보살은 중생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늘 중생과 함께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일행에게도 말하지 않고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혼자 광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했다. 광주로 돌아온 김동수는 효천동 고모 댁에 안부 전화를 했는데 그것이 가족들과 마지막 통화였다고 한다.
피에 젖은 연등 뒤로 시민들과 함께 오신 부처님
1980년 5월 21일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그날 광주에서는 공수부대의 무차별 집단 발포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날이기도 했다. 광주 시내에 걸린 연등은 광주 시민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때 스님들과 불자들은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광주 시민들과 함께했다. 다보사 진각 스님은 도반인 성연 스님과 함께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항쟁의 전면에 뛰어들었다. 결국 계엄군의 총탄에 척추를 다쳐 죽을 고비를 넘겨 반신불수가 됐다. 더 이상 수행자로 살지 못하고 환속해 5・18 민주화운동부상자회를 창립하고, 진상규명을 주도한 이광영 거사로 살다가 고통스러운 삶을 끝냈다.
당시 증심사 총무였던 성연 스님은 21일 계엄군의 만행으로 봉축행사가 무산되자, 신도들과 함께 준비했던 떡과 과일들을 리어카에 싣고 광주 시내를 누비며 시위대에게 보시하면서 항쟁에 함께했다.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에 연일 부상자가 속출하자, 성연 스님과 광주 불자들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헌혈행렬에 동참했다. 성연 스님은 26일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에 가사 장삼을 수하고 사자후를 토해 냈다. 광주항쟁은 특별한 조직적인 준비 없이 수많은 불자가 함께 참여했다.
김동수는 전남도청 내 학생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다.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하는 희생자들의 입관을 손수 해주고 염불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관에 태극기를 둘러줬다고 했다. 장성 고향 후배 강현구는 23일쯤에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군으로 활동하던 김동수를 만났다고 했다. 씻지도 못한 채 꾀죄죄해 보였지만, 결연한 모습의 동수 형에게 호주머니에 있던 돈을 쥐여 주며 몸조심하라 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뒤늦게 항쟁에 참여한 조선대 전자과 4학년 위성삼은 25일 전남도청 1층에서 뒤늦게 왜 왔느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는데, 상황실에서 김동수가 자신의 신분을 확인해 주자마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고 했다. 그는 학생수습위원으로 도청 안의 모두에게 신뢰받았다고 기억했다.
원각사 고등부 후배였던 유석은 5월 26일 도청 앞 궐기대회에 참석하는 중에 머리에 방석모를 쓰고 한 손에 총을 들고 도청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던 김동수 열사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한 5월 26일 밤, 항쟁 지도부들은 학생들에게 “어린 학생들은 꼭 우리를 기억해 달라”며 모두 돌아갈 것을 설득했다. 김동수는 이때 다시 도청으로 향해 마지막을 함께했다.
40여 년 동안 김동수의 마지막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몰랐다. 2021년 아시아 「월스트리트저널」 사진기자 노먼 소프의 사진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직후인 5월 27일 7시 30분, 현장 사진에 담긴 김동수는 항쟁 지도부였던 윤상원과 함께 도청 민원실 2층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봉축위원회 진행위원장이자 대불련 선배 이순규는 6월 7일 망월동 묘지에서 평소에 늘 걸고 다녀 윤이 반지르르한 염주와 대불련 배지, 그의 이름이 적힌 수강신청서로 그의 마지막을 확인했다. 그 후 이순규는 김동수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활동해 왔다.
김동수 열사는 망월동 5·18민주묘지에 묻혔다. 1992년 ‘지광 김동수열사 기념사업회’가 창립되고, 조선대 민주공원 내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1995년 5월 국립 5·18민주묘지 1묘역 2-27에 안장됐다.
촌부였던 부친 김영석 님은 평생 5・18유족회 일에 앞장서다가 2014년 돌아가실 때, 유언을 남겨 조선대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했다. 5월마다 옷 주머니에 택시비를 담아두고 행여나 아들이 올까 봐 자동차 소리만 나면 대문 밖으로 내달렸다던 모친 김병순 님은 5월 어머니회 활동의 맨 앞에서 열사의 뜻을 기리며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위해 싸워 오셨다.
2021년 이상호 화백은 김동수기념사업회의 요청으로 가슴에 유품인 대불련 배지를 단 <김동수보살도>를 그렸다. 그가 든 연꽃은 진리를 향해 간 보살 정신을 나타냈다. 광주 시민들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주먹밥, 자비와 헌신으로 생명을 나눈 헌혈 주머니,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킨 항쟁의 총을 하단에 그렸다. 상단에는 연꽃과 함께 광주에 오신 부처님의 상징인 오불(五佛)을 그려 5・18민중항쟁과 김동수 보살을 담아냈다.
지금도 김동수를 기억하고 그를 기리는 이들은 김동수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5월 정신 계승과 추모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 유동영
이재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부교수. 1986년 조선대 불교학생회에 입회 후 대불련에서 활동했다. 졸업 후 광주불교교육원 설립 당시 간사로 활동하다가 동국대 불교학과로 편입학,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김동수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