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피자가게
광주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증심사’에 가자고 하면, 증심사에서 멀리 떨어진 입구에서 내려준다. 증심사까지 한참 걸어가야 하는데, 정작 손님은 불만이 없다. 증심사는 ‘증심사 절’을 가자고 해야만 도착할 수 있다.
“광주 사람들은 증심사라는 사찰은 잘 몰라도 ‘증심사’라는 지역명은 잘 알고 있죠, 참 이상하죠? 증심사를 그냥 무등산으로 알고 있어요.”
광주에서 증심사는 하나의 사찰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라, 무등산 입구를 뜻하는 지리적 개념이다. ‘증심사 입구역’이라는 지하철역도 절에서 4.5km정도 떨어져 있다. 증심사가 본디 무등산의 중심, 광주 불교의 중심이지만, 2018년 중현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후 역할이 더 많아졌다 한다. 대표적인 것이 피자가게. 어느 순간 ‘피자가게’는 중현 스님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매월 1회, 토요일 오후 자비신행회에서 아이들에게 피자를 구워준다.
“주지 임명받고 한 달이나 됐나? 자비신행회를 갔는데, 사무처장이 ‘스님, 피자가게 사장님 하셔야 합니다’ 하는 거예요. 잘 모르니 ‘아, 증심사 주지는 원래 이런 것을 하나 보다’ 하면서 시작했죠.”
아무것도 모를 때, ‘꾐’에 넘어갔단다. 반죽하는 법, 토핑하는 법을 배우고 신도들과 시작해 5년이 지났다. 지금은 전남대 불교학생회와 조선대 봉사동아리 모임도 참여한다.
“광주에 오니 이것저것 일이 많네요” 하면서, 광주 불교의 대소사를 챙긴다. 그러면서 스님의 위상도, 증심사의 위상도 광주에서 쑥쑥 올라갔다.
대장경 전산화
스님은 대학생 시절이던 1985년,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했다. 감옥을 나온 후에는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이후에는 특이하게 ‘고려대장경 전산화 사업’에 일익을 담당했다.
“1992년까지 노동 현장에 있었죠. 여러모로 힘들기도 했고, 특히 학생 출신들이 노동운동의 한계에 봉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합법적 공간은 물론, 비합법적인 공간까지 성장했어요. 학생 출신들의 역할이 다해가던 시절이었죠.”
취미로 컴퓨터 전산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는데, 친구가 프로그램 하나를 부탁했다. 대가로 액면 10만 원짜리 수표 3장을 주더란다. ‘와, 이게 돈이 되구나’ 하면서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다. 어느 날 의뢰가 들어온 곳이 고려대장경 연구소(이하 연구소).
“1994년인가? 그때까지 금강경의 ‘금’ 자도 모르던 시절입니다. 한 달 정도 해서, 금강경을 전산화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경전 전산화 프로그램’이라 그러더라고요.”
연구소 로드맵을 기획하던 스님이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제가 갈증을 느끼던 시절이에요. 10년 넘게 사회운동을 하면서 이념을 걸고 삶을 살았는데, 한순간에 무너진 거잖아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내면은 공허했죠. 고려대장경 전산화! 명분이 거창하잖아요? ‘땡큐’ 했죠.”
그런데 그해에 그 스님이 사라졌다. 졸지에 전산 책임자가 돼 버렸다. 로드맵을 만들고 기획서를 짜서, 소장이었던 종림 스님을 모시고 삼성그룹 같은 기업체를 돌아다녔다. 얼마 후 대장경의 전산화 방향을 놓고 의견이 분분해졌다. 문제는 고려대장경 내에 있는 이체자(異體字). 한자(漢字)는 기본적으로 가짓수가 많다. 그런데 고려대장경에는 잘 사용되지도 않고, 대장경에만 있는 독특한 글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대장경 전산화 사업인데, 이체자를 살려야 한다’라는 의견과 ‘전산화라는 것이 검색의 기본인데, 이체자는 그 이후에 살려도 된다’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출가 전이었다. 당시 스님의 생각은?
“이체자가 중요한 거는 맞죠. 그런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했죠. ‘학문적 가치는 크지만, 민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거죠. 전산화는 검색이 생명인데, 세계적으로 범용화할 수 있는 방향을 먼저 하자고 주장했어요.”
그 과정에서 연구소를 나왔고, 출가자의 삶이 시작됐다.
대장경과의 인연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강원을 마치고 선방에 있었는데, 2000년대 초 급하게 ‘콜’이 왔다. 프로그램 업그레이드에 문제가 생겼다.
“선방 산철 기간에 올라와서, 두 달 동안 죽을 똥 하면서 살렸어요”
연구소와의 인연은 끊어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2010년에는 ‘부소장’ 직책을 맡기도 했다. 그때는 ‘초조대장경’을 스캔해 자료로 남겼다. 일본 ‘남선사 소장본’을 복사하기도 했고, 국제학술대회도 진행했다.
스님의 ‘혼’이 실린 대장경 전산화 결과물은 이후 동국대 학술원으로 많이 이관됐다. 지금은 검색이 멋지게 된다.
통계에 강한 스님
주변 사람들은 스님의 장점을 ‘공심(公心)’이라 말한다. 증심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살림살이를 홈페이지와 사보에 매달 공개했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현금으로 접수하는 비율이 24%로 뚝 떨어졌어요. 2012년에는 92%에 달했죠. 그래프상으로 현금과 온라인 접수가 언제 역전됐냐면 2020년도입니다. 카드 사용이 13% 전후, CMS를 비롯한 계좌이체가 65%에요.”
또 이런 이야기도 한다.
“코로나 이후 법회 참석하는 분들이 줄었죠.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죠. 이전에는 동참자들의 평균 연령이 조금씩 늘어났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평균 연령도 해마다 0.1~0.2% 정도 줄어들고 있어요.”
2%도 아니고 0.2%란다. 이 같은 스님의 행정 마인드는 송광사 소임을 맡던 시절부터 유명했단다.
광주불교
“스님, 흔히들 광주의 불교 세가 약하다고 하잖아요?”
“경상도나 다른 곳에 있다 오면, 기독교가 강하다고 느끼죠. 광주 양림동 같은 경우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불교가 약하다’거나, ‘기독교가 월등히 강하다’ 이런 것은 아닌 듯해요. 오히려 불자 비율은 수도권과 비슷해요.”
외부에서만 바라봤을 때 느끼는 시각이란다. 광주 불교의 지역 활동은 어느 곳보다 강하다 한다. 봉사활동, 연합활동이 특히 그렇다. 광주에 처음 오시는 스님은 “광주에 오니 왜 이렇게 나오라는 데가 많아?” 하면서 하소연하기도 한다고.
광주 불교의 역사도 확인된 것만 1,500년이 넘는다. 도심 여기저기에 흔적이 많지만, 광주에 유독 제자리를 떠난 불교 유산이 많다.
“광주는 일제 강점기에 계획도시였습니다. 도심을 새로 조성하면서 광주읍성을 포함한 문화유적이 대부분 멸실됐어요. 옛 전남도청에 ‘대황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잖아요? 절 이름은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무언가가 있었다고 봐야죠.”
스님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아시아문화전당’ 건축이다. 옛 전남도청 주변에 근래 조성했는데,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듯하다고. “그곳이 광주읍성 자리인데, 하다못해 기왓장 하나라도 나와야 정상 아니냐?”라고 말한다. 아쉬운 점이 또 있는데, “광주 도심과 무등산 자락에 불교 유적이 산재해 있는데, 기본조사조차 안 돼 있다”는 것이다. 마을 안에 탑만 덜렁 있거나, 불상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래서 스님은 광주 도심에 있는 사찰들이 큰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광주는 큰 도시인데, 조계종 교구본사가 없어요. 지역의 여러 문제에 불교가 대응하는 데 중심이 없는 듯해요. 도심의 큰 사찰들이 그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중현 스님은 의외로 섬세하다. 섬세함은 주로 글로 나타난다. 특히 삶의 소소한 고민이나 ‘사랑’이나 ‘행복’ 등 내밀한 감정에 대한 글은 작은 울림을 준다.
“템플스테이에 젊은 여성들이 많이 오더라고요. 차담을 하면 남자들은 보통 무뚝뚝하지만, 여성들은 자기 고민을 이야기해요. 어떤 때에는 울면서까지. 상담이나 고민을 들어주면서 저도 늘었죠.”
2023년 증심사 템플스테이를 찾은 사람이 1,982명이다. 대부분이 광주 사람.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스님 역시 그쪽으로 “특화된 듯”하다고.
템플스테이 참여자를 포함해 광주 사람들이 증심사를 와서는 “내가 증심사에는 수십, 수백 번 왔지만 절에 오르기는 처음이네요” 한단다. 참고로 증심사길 계곡에서 50~60m 위로 오르면 증심사가 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