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에 명찰이 깃들고 고을 곳곳엔 당산이 섰네, 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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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에 명찰이 깃들고 고을 곳곳엔 당산이 섰네, 부안
  • 노승대
  • 승인 2023.11.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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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담아둔 절]

내소사와 할머니 당산

부안이라는 지명은 태종 16년(1416) 부령현과 보안현을 병합하게 되자 두 현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면서 탄생했다. 부안은 서남쪽으로 변산반도를 끼고 있고 내륙 쪽으로는 김제, 정읍, 고창과 경계를 이룬다. 

변산반도를 거의 차지하고 있는 변산(邊山)은 김제평야의 지평선을 지나면서 서해 바닷가 쪽으로 별안간 솟아난 산이다. 그런데 이 산이 예사롭지 않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기상봉(의상봉이라고도 한다)이 509m에 지나지 않지만, 그 품이 넓고 곳곳에 기암절벽과 아름다운 계곡을 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산에 명찰이 없을 수 없으니 내소사와 개암사가 불법의 향기를 전한다. 옛 시대에는 내소사와 함께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를 변산의 4대 명찰로 꼽았으나 조선시대에 선계사, 청림사는 폐사되고 실상사는 소실됐다. 

부안군 여러 마을에서 전승되는 당산제는 내소사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내소사 스님들과 인근 마을 사람들이 사찰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음력 정월에 모시는 당산제는 두 느티나무 당산에서 지낸다. 할머니 당산은 내소사 사천왕문 안쪽, 경내 깊숙한 곳에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 1000년이다. 할아버지 당산은 일주문 앞에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 700년이다. 

내소사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지내는 당산제

이 당산제는 불교신앙과 민간신앙이 어우러진 독특한 행사로 할머니 당산 앞에서 먼저 불교의식으로 진행하고 할아버지 당산 앞에서는 유교식 제례의식으로 모신다. 할아버지 당산 곁에는 나무로 만든 벅수가 있었으나 전주시립박물관을 거쳐 지금은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됐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 혜구 두타 스님이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의 소소래사라고 전한다.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 작은 피안교가 나타난다. 앞쪽에는 길지 않은 단풍 터널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단풍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사천왕문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안쪽으로 여러 건물이 얼굴을 내민다. 

사천왕문 정면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을 읽어보면 경전이나 게송집에서 보던 내용이 아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바로 해안(海眼, 1901~1974) 스님의 오도송이다. 

한학을 공부하던 해안 스님은 14세 되던 해 내소사에서 만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18년 성도절을 앞두고 모든 대중이 7일간 용맹정진할 때였다. 해안 스님도 조실 학명 스님에게서 은산철벽(銀山鐵壁, 은으로 된 산과 쇠로 된 벽)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고 일심으로 정진했다. 정진 7일째 되던 날, 죽비소리를 듣고 답답하던 가슴이 툭 터지는 깨달음을 얻었다.

목탁소리 종소리 죽비소리에 
봉황이 은산철벽 밖으로 날아갔네
누군가 나에게 기쁜 소식 묻는다면
스님들 모인 승당에서 만발공양을 올리리라. 
鐸鳴鍾落又竹篦(탁명종락우죽비)
鳳飛銀山鐵壁外(봉비은산철벽외)
若人問我喜消息(약인문아희소식)
會僧堂裡滿鉢供(회승당리만발공)

통도사의 경봉 스님과 더불어 ‘동(東)경봉, 서(西)해안’이라 일컬어지던 해안 스님은 1974년 3월 9일 아침 6시 30분 입적했다. 세수 74세였다. “비석도 세우지 말고 승탑도 세우지 말라” 하셨지만 제자들이 간청하자 굳이 세우려거든 앞면에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라 쓰고 뒷면에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라고만 쓰라’” 하셨다. ‘죽고 사는 것이 이것에서 나왔으나 이것에는 생사가 없다’는 뜻이다. 스스로 범부를 자처하셨지만 선사의 본분을 확연히 드러내신 것이다. 

해안 스님의 오도송 주련

 

대웅보전을 톺아보다

봉래루 누각 밑을 통과해 대웅보전 앞마당에서 남향으로 앉은 법당을 바라본다.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의 추녀선이 뒷산의 봉우리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대웅보전의 아름다움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꽃살문이다. 채색은 비록 날아갔어도 화려하고 섬세하다. 연꽃을 비롯해 모란, 국화 등이 문짝마다 꽃을 피웠다. 하나도 같은 문짝이 없다. 물론 부처님께 꽃을 공양한다는 의미로 조성된 것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

또 한 가지는 서까래 끝 중앙에 부착한 목조각 연밥(연꽃 씨방) 장식이다. 서까래 끝 절단면에는 대개 연화문을 그려 넣는데 절단면이라서 연꽃의 입체감은 없다. 그 점을 보완하려고 절단면 중앙에 반원형 둥근 목조각을 일일이 깎아서 쇠못으로 고정하고 연꽃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다. 서까래 수가 많으니 하나씩 수작업을 하려면 꽤 많은 공력이 들어갔을 것이다. 채색이 살아 있었더라면 연꽃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런 방식으로 법당 서까래를 장식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다. 

서까래 끝에 부착한 연밥 장식

대웅보전 내부는 더욱 화려하다 안쪽으로 뻗은 공포의 제공 끝은 모두 연꽃 봉오리로 마감해서 법당 내부는 연꽃이 만발한 부처님 세계다. 또한 임진왜란 후에 나타나는 상징물들도 법당 곳곳에 가득하다. 화재방지용 조각도 있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도 있다. 

우선 마주 보는 충량의 두 마리 용 중에서 서쪽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물에 사는 수룡(水龍)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화재방지의 임무를 준 것이다. 임진왜란 후 지은 법당에는 추녀 끝에 용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 같은 의미다. 

법당 안 서쪽 수룡

 

울금바위와 개암사

줄포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부안으로 가다 보면 서쪽으로 산 정상에 엄청나게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울금바위 또는 우금바위라고 부른다. 이렇게 기세 좋은 암봉이 하늘로 치솟아 있으니 그 자락에 절이 없을 수 없다. 능가산의 명찰 개암사다. 

개암사는 백제 무왕 35년(634)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절로 고쳐서 창건했다고 한다. 대웅보전 용마루 뒤로 보이는 울금바위는 마침 토막을 내서 갈라놓은 것처럼 보인다. 개암(開岩)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개암사와 울금바위
울금바위두 개의 구멍

 

거대한 울금바위 남쪽 아래에는 마치 동굴 같은 구멍이 두 개 파여 있다. 큰 구멍은 집채만 하다. 앞에는 집 한 채를 지을만한 터가 있는데 깨진 기왓장이 무수히 깔려 있다. 이 굴을 원효방(元曉房)이라고 부른다.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했던 곳이라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굴 안에는 지금도 가느다란 샘물이 흐른다. 표암 강세황이 들렀을 때도 옥천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조선 말기 나라가 어지러울 때 개암사에 딸려 있던 모든 암자가 사라진 듯하다. 

개암사 대웅보전(보물)도 내소사 대웅보전(보물)처럼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러나 두 건물이 풍기는 멋은 완전히 다르다. 내소사 대웅보전이 맵시 있게 단장한 여인이라면 개암사 대웅보전은 듬직한 장부의 기상이 있다. 기둥도 굵고 모든 목재가 시원시원하다. 문살도 단순하다. 용마루 뒤로 보이는 울금바위의 위용이 대단해서 대웅보전도 그 기운을 이어받은 듯 매우 강건해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법당의 세부가 매우 세심하다. 지을 때부터 많은 고심을 하고 지었음이 틀림없다. 우선 정면 동쪽 추녀 끝에는 청룡 조각을 설치했다. 하지만 서쪽 추녀 끝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동물 조각이 있다. 바로 백호(白虎)다. 화재와 재앙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사신도(四神圖)에서 동쪽은 청룡이고 서쪽은 백호인 것도 감안했을 것이다. 또 건물에 비해 있는 듯 없는 듯 작게 만들어 걸어놓은 대웅보전 편액 위에는 청룡, 황룡의 정면상을 조각해서 걸어놓았다. 다 화재방지를 위한 장치다. 

법당 외부가 이처럼 치밀한 꾸밈새를 갖춘 것처럼 법당 내부도 역시 세심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 일단 용들이 많다. 충량에 마주 보고 있는 용 2마리, 귀퉁이마다 법당을 내려다보고 있는 용이 4마리다. 법당 중앙 어간문 위에 또 용이 3마리 나란히 있으니 모두 9마리다. 

법당 서쪽의 출입문 위쪽 천장에는 슬며시 조각해 놓은 용의 꼬리도 찾을 수 있다. 용의 머리 조각만 있으니 실제로 용이 산다는 의미로 꼬리도 조각해 놓은 것이리라. 내부에 연꽃 줄기나 물고기 등의 조각이 없지만 봉황의 입에 연꽃 줄기를 물려놓은 것도 보인다. 

개암사 대웅보전 추녀 끝의 백호 조각(왼쪽), 법당 안 용 조각

개암사 대웅보전은 건실하고 듬직한 건물이다. 뒤에서 법당을 호위하듯 솟아 있는 울금바위의 위엄도 이 건물의 미감을 한층 더 배가시킨다. 필자가 다녀본 법당 중에서도 언제나 잊히지 않는 법당이 바로 이 개암사 대웅보전이다. 

이 절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개암죽염 때문이다. 개암사의 스님들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천일염과 개암사 대나무로 만들기 시작한 개암사 죽염은 이제 개암죽염이라는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공장이 개암사로 들어가는 길목 동네 마을에 있다. 

이외에도 부안에는 부설(浮雪)거사와 월명암, 칠산바다를 지키는 개양할미와 수성당, 창씨개명도 거부하고 지조를 지킨 신석정 시인, 마의태자와 부안 김씨 등 많은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다. 먹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가 풍부한 고을이 바로 지금의 부안군이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저서로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 『사찰에 가면 문득 보이는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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