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시는 동해안의 중부 지역으로 1980년대 초까지도 태백시와 동해시의 북평 지역을 포함했다. 이 권역에는 많은 사찰이 창건되고 폐사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는 삼화사·천은사·영은사·신흥사·삼장사·감추사가 있고 지상사가 자리를 옮겨 지역민의 등불로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여러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이 사찰들을 찾아가 보자. 전해 오는 이야기로 자장율사가 흑련대인 삼화사를 창건했다고 하거나 약사삼불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두타삼선·頭陀三禪)가 서역에서 돌배를 타고 동해에 이르러 돌배가 용으로 변해 두타산에 와서 첫째는 검은 연꽃을 가지고 흑련대인 삼화사(三和寺)를, 둘째는 푸른 연꽃을 가지고 청련대인 지상사(池上寺)를, 막내는 금색 연꽃을 가지고 금련대인 영은사(靈隱寺)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러한 창건 설화는 보태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면서 복합적이고 논리적인 구성을 갖추는데, 사찰을 지은 주인공이 형제가 아니라 동서남북에 소재한다는 이야기로 변화됐다. 즉, 동쪽에는 청련대로 지상사, 남쪽에는 금련대로 영은사, 북쪽에는 흑련대로 삼화사, 서쪽에는 백련대로 천은사(天恩寺)라 했다. 두 이야기의 변화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3개 사찰에서 4개 사찰로 늘어났다.
이후에 강릉 굴산사에서 선종을 크게 일으킨 범일국사가 삼화사를 창건했다고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도 이 지역에는 많은 불교 유산과 고승들이 머물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두타산 삼화사
두타산 기슭에 삼화사와 천은사가 있다. 먼저 삼화사를 둘러보자. 삼화사는 무릉계곡 입구 주차장 아래에 있었으나 1977년 쌍용양회라는 시멘트회사가 석회석을 채굴하게 되면서 1979년에 중대사 터인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됐다.
삼화사에는 철로 만든 부처님이 허리를 포함한 상체 부분만 남아 있었다. 온전한 부처님으로 복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등[背]에 결언대덕 스님이 부처님을 조성하게 된 연유를 기록한 문장이 확인됐고, 신라 말에 조성된 노사나 부처님임을 알게 됐다. 현재와 같이 완전한 부처님 모습으로 완성되고 큰 법당 이름을 대웅전(大雄殿)에서 적광전(寂光殿)으로 바꿨다. 이후, 많은 연구 논문이 발표돼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삼층석탑도 보물로 지정됐다. 대웅전에 모셔졌던 목조 아미타삼존불은 극락보전(極樂寶殿)으로 옮겨 모시게 됐는데, 2022년 8월에 1692년(숙종 18)에 조성했다는 발원문이 아미타부처님의 복장에서 발견됐다. 이로써 강원도에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부처님으로 밝혀졌고, 문화재로 지정해서 그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삼화사의 부속 암자로 관음암이 있는데 경관이 일품이고 기도를 하면 감응이 있어서 불교도의 신앙처로 발길이 붐비는 곳이다.
제왕운기의 산실, 천은사
두타산 기슭에 또 하나의 명찰 천은사가 있다. 천은사는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한 이승휴(李承休, 1224~1300)와 관계 깊다. 이승휴는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님이 계시는 지금의 두타동에 와서 기쁨을 전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몽골이 침략하여 개성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현재의 천은사 자리에 용안당을 마련해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었다. 또한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인근의 삼화사에 소장된 대장경을 빌려 읽는 삶을 살았다. 이때 대장경을 모두 읽었다는 의미로 ‘간장사(看藏寺)’라 했다. 또한 개성에서 돌아와 머물면서 이 절에서 『제왕운기』를 지어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와 함께 단군조선이 한국 최초의 국가임을 역사서에 남기게 됐다. 이후 서산대사가 뒤의 산이 청흑색이어서 흑악사(黑岳寺)라 이름을 고치고 1899년에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이면서 이안사의 부모인 이양무와 평창 이씨의 묘를 준경묘와 영경묘라 이름 짓고 새롭게 단장했다. 제사를 지낼 때 흑악사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조포사(造泡寺)의 기능을 맡았는데 이에 절 이름을 임금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의미에서 ‘천은사(天恩寺)’로 고치고 지금까지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때 사용하던 유물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천은사를 오르는 개울가에는 곡식을 빻을 때 사용하던 물방아 확과 큰 맷돌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심지어 곡식을 얼마나 많이 빻았는지 구멍 뚫린 확도 남아 있다.
천은사와 같이 왕릉의 주변에는 조포사의 기능을 하던 사찰이 많이 남아 있는데 영월의 단종 능인 장릉의 보덕사(報德寺), 여주의 세종 능인 영릉의 신륵사(神勒寺), 남양주 세조 능인 광릉의 봉선사(奉先寺) 등이 천은사와 성격이 비슷하다. 왕실의 지원을 받거나 왕실의 복을 기원하는 사찰들은 위에서 보는 것처럼 ‘은(恩)’·‘보(報)’·‘봉(奉)’ 자를 사용하는 예가 흔하다. 신륵사 역시 세종의 능이 서울에서 여주로 옮겨 와서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로 고쳤다. 금강산의 유점사도 왕실의 지원을 크게 받으면서 사찰의 대문인 해탈문에 ‘대성수보덕사(大聖壽報德寺)’라 편액을 걸기도 했다.
이처럼 천은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왕실과의 관계도 깊어서 중요한 문화재가 많이 소장돼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제작된 소형 금동불상이 전하고 극락보전에는 조선 전기에 조성된 아미타삼존불상이 봉안돼 있다. 이 삼존불은 모두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된 불상으로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이다. 가운데의 본존불은 아미타불로 높이가 101cm이고 본존 부처님의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멋진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머리를 깎은 지장보살상이 있다. 이 세 부처님은 오른손을 가슴 앞까지 올리고 왼손은 다리 위에 손바닥이 보이도록 놓고 있다. 이 부처님들에게는 놀랄만한 일화가 있다. 1948년 동짓날 천은사에 큰불이 나서 모든 건물이 불에 타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물론 삼존부처님을 모신 법당도 불에 탔는데 부처님 세 분을 가까스로 불 속에서 꺼내 화마로부터 구해냈다. 하지만 부처님을 모실 공간이 없자 천은사의 암자였던 삼척 시내 죽서루 옆의 삼장사에 옮겨 모시게 됐다. 이 삼존부처님은 천은사가 화재로부터 복구가 완료된 1982년에서야 원래의 자리인 천은사로 다시 옮겨 모셨다.
천은사가 중건되는 과정이었던 1973년에는 석회석 채굴로 삼화사와 같이 이전을 요구받는 사건이 있었으나 당시 주지 일봉 스님의 반대로 원래의 위치인 현재의 위치를 지키게 됐다. 지나간 옛일을 ‘만약’이란 가설로 오늘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일봉 스님께서 석회석 공장의 요구에 밀려 사찰을 옮겨 채석장이 됐다면 천은사는 물론이고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의 산실도 당연히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당연히 천은사 영역의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遺蹟)’이라는 국가 사적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일봉 스님의 이러한 어려운 결단은 두고두고 후대에 회자될 일이다. 천은사는 한국전쟁기에 부속암자인 화엄암과 조운암이 철거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1979년부터 이승휴 선생의 다례제를 봉행하기 시작했으며 소실된 스님의 처소인 요사, 대문인 일주문을 지어 산사로서의 격식을 고루 갖추는 사찰이 됐다.
2003년에 필자도 천은사 사역을 발굴하면서 이승휴와 관련된 유적을 찾고자 심히 노력한 추억이 있는 사찰이다. 바다에서 사찰로 불어오는 바람과 두타산에서 내려 부는 바람은 사계절 방향을 바꿔 가며 산사의 기품을 방문객에게 전해준다.
영은사와 지상사
영은사는 삼화사와 함께 약사삼불의 막내인 금색 연꽃을 가지고 창건해 금련대라 했다고 전하기도 하고 진성여왕 5년인 891년에 범일국사에 의해 궁방사(宮房寺)로 창건됐다고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신라 후기 구산산문의 하나인 강릉 굴산산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조선 명종 대에 사명대사가 궁방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운망사(雲望寺)라 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자 1641년(인조 19)에 벽봉 스님이 중건하고 영은사(靈隱寺)라 했다. 1804년에 다시 불에 타자 다음 해에 중건했다.
화재를 입었음에도 많은 성보문화재가 소장됐는데 금당(金堂)인 대웅보전과 법당 내에 모신 석가삼존도, 팔상전, 설선당, 심검당이 모두 조선 후기를 대표하면서 영은사의 사격을 높여주고 있다. 더구나 각 전각에 걸린 ‘태백산영은사(太白山靈隱寺)’, ‘심검당(尋劒堂)’, ‘설선당(說禪堂)’이란 편액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글씨와 그림의 대가로 알려진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사찰 입구에는 1700년대와 1800년대 스님인 ‘영곡당’과 ‘월파당’ 등의 부도와 비가 있으며 월정사성보박물관으로 이전된 괘불과 굴산산문의 개산조인 범일국사와 임진왜란기에 승병장으로 활약한 사명당의 진영 등 여러 고승의 진영이 소장됐다.
지상사는 서역에서 온 약사삼형제 부처님 중에서 둘째인 청련이 지은 청련대로 사찰이라 하거나 선덕여왕 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지금은 터만이 남았고 사찰은 인근지역에 새로 창건하였다. 이때 주변에 있던 철조부처님을 옮겨 봉안했다. 이 부처님은 두 가지의 진기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첫째는 1990년대에 지상사 부처님의 상호가 원만한 모습을 갖지 못해서 주지 스님이 상호를 새로 조성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데 부처님의 몸속에 여러 철편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스님이 편들을 맞춰 보니 부처님의 상호 편이었다고 한다. 이 편들을 정밀하게 맞춰 복원한 상호가 지금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바닷가 동해 지상사 부처님이 내륙의 홍천 쌍계사 약사전에 모셔지게 됐을까.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지상사는 대한제국기에 창건돼 경영됐고 1990년대에 태고종단에 소속됐으나 부처님을 옛 모습대로 완성한 스님은 조계종단 사찰로 이속하도록 했다. 이에 태고종단 스님들이 부처님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태고종단 사찰인 홍천의 쌍계사로 옮겨 모시게 됐다.
신흥사와 흥전리사지
신흥사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민애왕 원년인 838년 또는 진성여왕 3년인 889년에 동해시 지흥동에서 창건됐다. 조선 현종 15년인 167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광운사라 했다가 1770년에 불이 나서 영담대사가 새로 짓고, 1821년에 삼척부사 이규헌의 지원으로 중건해 지금의 이름인 신흥사가 됐다고 한다. 신흥사의 가람은 중앙에 큰 마당을 두고 가장 위에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 마당의 좌우에는 설선당과 심검당이 있다. 대문은 학소루인데 중층 누각이다. 이 사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설선당과 심검당인데 건물의 벽을 흙벽이 아니라 판자로 지었다. 고성에서 삼척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겹집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민가의 집이 있는데 이들 집이 판자로 벽을 마감하는 예가 흔히 있다. 사찰에서 벽을 판자로 지은 예가 흔하지 않은데 신흥사에서 이러한 구조를 볼 수 있어서 조선 후기 사찰 건물의 특징을 살피는 데 요긴한 볼거리이기도 하다.
신흥사에는 사찰 입구에 몇 기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는데 이도 참으로 특이한 양식이다. 보통 부도나 부도비의 기단을 네모 또는 원형의 큰 돌을 다듬어 만드는데 화운당부도와 영담대사비의 기단은 거북이와 고래의 형상을 혼합해 만든 독특한 모습이다. 아마도 신흥사가 바다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이러한 양식이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측한다. 도계읍 흥전리에 ‘돈각사(頓覺寺)’ 또는 ‘각돈원(覺頓院)’으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10여 차례 시행된 발굴에서 완벽하게 보존된 청동 정병 2점, 인주까지 남아 있는 인주함, 금동번 투조장식판, 금동사자상 등 진귀한 유물이 출토됐다. 또 ‘국통(國統)’과 ‘대장경(大藏經)’이 새겨진 비석편, ‘범웅관아(梵雄官衙)’라 새겨진 청동관인 등이 출토돼 당대 최고의 스님인 국통과 그 문도들이 경영한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에 이르는 선종사원으로 밝혀졌다.
이외에도 전통사찰 감추사와 여러 절터가 삼척권역에 남아 있다.
사진. 유동영
홍성익
강원대 학술연구교수. 강원도 문화재위원, 신라사학회·불교미술사학회·한국문화사학회 편집이사이자 신라사학회·한국문화사학회·중부고고학회 종신회원이다. 저서로 『청평사와 한국불교』, 『북강원지역 역사문화유산조사』, 『남·북 강원도 석탑연구』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