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역자 | 원제 | 정가 | 18,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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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23-05-19 | 분야 | 인문 |
책정보 |
232쪽|판형 141*215mm|책등 두께 19mm|ISBN 979-11-92997-21-6 03100 |
2023 제20회 불교출판문화상 입선작
여전히 고통스런 삶 속에서
나를 잘 부리며 멋지게 사는 법에 대하여!
“저는 매일 매일이 정면승부입니다. 오늘도 눈 똑바로 뜨고 여지없이 정면승부를 합니다.”
2019년 혜성처럼 등장해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를 펴내자마자 베스트셀러 저자로 자리매김한 수좌(首座) 원제 스님이 이후의 수행과 공부를 점검하며 또 한 권의 책을 신비로운 선물처럼 건네준다.
원제 스님의 글은 보면 볼수록 깊은 여운을 남긴다. 한 문장도 버릴 것이 없다. 몸소 체득한 진리와 자유의 경험들이 문장 하나하나에 온전히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문이 강렬했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정진했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에라 모르겠다, 세계 일주나 가자!’ 하고 2년여간 5대륙 45개국을 떠돌기도 했다. 선원 생활보다 더한 고행이었다. 이후 수행은 훨씬 수월해졌고, 어느 순간 홀연히 터졌다. 애쓰지 않아도 진리의 세상이 눈앞에 드러났고, 상황과 인연에 맞게끔 자신을 잘 부리며 자유로워졌다.
원제 스님의 수행 에세이 《나, 아직 열리지 않은 선물》은 평생 애착하고 괴롭히며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나’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지혜로 빼곡하다. 기회이자 선물이다. ‘나’를 잘 부리며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 꽃피우듯 아름다운 시절을 살게 하는 선물!
지은이: 원제 스님
진리를 위해 살겠다는 결심 하에 해인사로 출가했고 선원에서 정진했다. 그러나 구도의 길이 맘 같지 않아, 나 몰라라 세계 일주를 떠나기도 했다. 이후 예상치 못하게 마음이 편해져 지금은 김천 수도암에서 ‘원제 놀이’ 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와 《다만 나로 살 뿐》이 있다.
들어가며 | 삶은 눈앞으로 펼쳐지는 신비
1장 나를 살게 하는 힘 | 진리와 자유
노장님의 백팔배 | “모든 절이 다 내 절이다” | 법륜 스님의 삭발 | 내가 사는 이유 | 몸이 너무나도 아플 때 | 신은 어떠한 모습으로 오는가 | 이우주대도인 스님 | 어찌해서 나는 부처를 만나지 못하는가? | 이미 그러하다 | 제대로 중생으로 사는 것, ‘중생 놀이’ | 내 마음은 누가 수선해 주나요 | 고통만이 가득한 세상에서의 자유 | 네 문장 | 본래 내 것이 아니다 |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 | 멈출 줄 아는 힘 | 원제의 자유
2장 나는 어떻게 완성되어가는가 | 크게 죽어야 도리어 살아난다
블랙핑크도 수행한다 | 간절함과 절박함 | 수행의 출발점, Sick Soul | 힐링이 아닌 킬링, 선사들의 자비 | 수행해봐야 남는 게 없다 | 칼수좌 | 죽어야 산다 | 마음을 들키는 일 | 마음 그릇의 크기 | 어머니의 기도문 | 나의 안목은 얼마짜리인가 | 침묵을 듣고 침묵을 보다 | 책임의 무게 |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3장 그냥 사는 듯,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 의미만 두지 않으면, 사람도 세상도 한가하고 좋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 | 부처님의 서비스 | 가장 위대한 포기 | 영적인 깨어남 이후의 삶 | 어설픈 명상가와 떡볶이 고수 | 말법 시대와 최상승 시대 | 우리네 인생 | 그냥 사는 듯,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 명백하십니까? | 돌에 맞으면 아프고, 상한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난다 |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 | 허공의 공덕 | 공부인의 자세 | 눈앞을 눈앞에 숨기다 | 나를 깨우쳐줄 선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 부처가 부처를 보내,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4장 본래 온전한 중생의 삶 | 이 세상은 본래 중생들을 위한 놀이터이다
페도라는 원제의 정체성 | 삶으로 증명된다 | 죽음 연습 | 두 다리 쭉 펴고 잠자는 일 | 먼지 한 점 | 나를 써먹는다는 것 | 도적이 칼을 들고 오면 | 불사佛事 | 몽쉘통통과 종성칠조 | 고수에겐 놀이터, 하수에겐 생지옥 | 빈손이라는 자유 | ‘잘못했습니다’의 공덕 | 다시, 중생의 삶으로
‘나’를 잘 써먹으며
인생의 고수가 되는 길!
“이 세상이 고수에겐 놀이터요, 하수에겐 생지옥 아니던가.”
다만 안목의 문제입니다. 내가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굴리겠지만, 만일 그러지 못하다면 세상에 굴림을 당할 뿐입니다. -본문 중에서
인생 참 어렵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 정도는 해야 된다는 ‘만 시간의 법칙’도 무용지물이다. 살아가는 내내 10만 시간, 20만 시간을 꼬박 투자해도 도통 편안해지지 않는다. 마음은 시시각각 널뛰기하며, 좋을 땐 하늘을 뚫다가도 나쁠 땐 땅속 깊이 처박힌다. 내 생각을 내려놓는 무심한 마음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사람 마음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 주변 상황에 따라 요동치며 고요할 틈이 없다. 그래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늘 욕망과 분별에 끄달리며 자유롭지 못하다. 고통과 두려움의 연속이다. 인생 참 힘들다.
이렇듯 어렵고 힘든 인생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나가기엔 막막하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난관이 따른다. 도움이 필요하다. 이 책 《나, 아직 열리지 않은 선물》은 원제 스님이 간절함과 절박함으로 빚은 수행의 결과물로서, 삶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좋은 참고서이다. 나를 옭아맸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와 자유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지혜와 안목을 열어준다. 그 핵심은 견고한 틀로 고정된 ‘나’로부터의 탈출에서 시작된다. 그래야 세상을 고통스럽게 느끼는 ‘나’와 대립하지 않고 마음껏 활용하면서,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안락하고 자유로운 삶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정해진 의미의 세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눈앞으로 매일같이 대하는 이 세상은 그 누군가에겐 고통과 번뇌 가득한 사바일 수도 있으며, 인연 따라 ‘나’를 활용하며 부려먹는 신비로운 놀이터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나’에게 갇힌 정도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라는 존재는 참으로 신기합니다. 묶여 있다면 세상에서 이처럼 견고한 감옥도 없을 것이지만, 풀려난다면 세상에서 이처럼 좋은 선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를 선물로 부리는 삶으로 자유로워지시길.”
원제 스님의 글과 법문은 ‘무사의 정공법’을 닮았다고도 하고, ‘힐링(healing) 법문이 아닌 킬링(killing) 법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술수를 쓰지 않고 바로 정곡을 찌른다. 마치 어둠 속에 딸각 불이 켜지듯,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를 확 열어준다. 그리고 첫 책의 독자 리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법륜 스님의 설법이 대중의 가려운 부문을 잘 긁어주는 ‘힐링(healing) 법문’이라면, 원제 스님의 설법은 문제의 본질을 향해 다가가면서 비본질적 부문을 과감하게 죽이는 ‘킬링(killing) 법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사각활(大死却活), 크게 죽을 때 도리어 살아난다. 내가 붙잡고 집착하는 ‘나’를 과감하게 죽일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진리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백척간두의 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어야, 허공을 거닐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통마저도 환희심으로 맞이하며, 그 어떤 인연에도 집착하는 바 없이 온전하게 인생을 살아낸다. 그것이 세상이라는 신비로운 놀이터에서, ‘나’를 잘 써먹으며 인생의 고수가 되는 길이다.
조주 스님께 한 학인이 물었습니다.
“깨달은 스님과 못 깨달은 저희들과의 차이는 뭡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마음의 부림을 받지? 하지만 나는 마음을 부려.” -14쪽
제대로 된 삶을 위해서 앎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앎이 삶의 최종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앎이든 삶이든, 그것의 최종 지향점은 바로 자유입니다. 그 모든 인연에 걸림 없이 응하며 자기 스스로 이 우주의 대도인으로서 여유와 자신감을 가지고 곧장의 진실을 여실하게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눈앞으로 사는 자유의 삶인 것입니다. -38쪽
진정한 자유는 생사를 벗어나는 것을 뜻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생사로 들어가서 그 어떤 머묾이나 집착 없이 생사를 잘 굴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나로부터 벗어나 나를 잘 굴리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이 삶을 원만하게 운용함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 것입니다. -46쪽
우리 중생은 화를 냅니다. 감정이 치어올라 저 사람이 미워서, 세상이 억울해서 화를 냅니다. 그러나 깨달은 분들은 다릅니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다만 인연에 맞추어 화를 쓸 뿐입니다. -70쪽
나무가 꽃을 피우면 이 향기를 맡고 자연스레 벌과 나비가 찾아오듯이, 내 마음 곳간에 양질의 내용물이 넘쳐나게 된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를 알고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법의 향기, 즉 깨달음의 향기가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78쪽
고통이나 의심은 일견 삶의 부정적 요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부정의 요소가 깊이 체화될수록 오히려 삶에 대한 깊은 안목과 깨달음으로 발현됨을 여러 성현들의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삶의 진리이기도 한 고통을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피할 필요만은 없습니다. 실패나 좌절, 결핍과 상실이라는 고통이 동시에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창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86쪽
의심의 속성은 ‘힐링活’보다는 ‘킬링殺’에 가깝습니다. 자비의 마음을 품고 포용을 키워나가는 것이 활活의 수행이라고 한다면,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그릇된 집착을 끊고 분별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살殺의 수행입니다. 역대로 안목이 뛰어난 선사는 우리들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공부인이 믿고 의지하는 경계를 빼앗거나 아예 부수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殺을 통해 구현한 자비였던 것입니다. -93쪽
무엇이 중생이며 또 무엇이 부처이겠습니까. 몸과 생각에 집착하여 도리어 그 몸과 생각에 부림을 받기에 중생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집착하는 바 없이 그 몸과 생각을 인연에 맞게 잘 부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부처와 다를 바 없습니다. -111쪽
깨달음은 ‘나’라는 작은 중심에서 벗어나, 중심 없는 중심으로서 이 커다란 전체로 안목이 확장되는 과정입니다. ‘나’에 갇혀 산다면 세상은 온갖 의문투성이겠지만,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한다면 세상의 그 모든 일과 존재는 명백한 답으로서 생생하게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131쪽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닐’ 적에야 비로소 아무거나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머물 바가 없지만, 아무거나 될 수 있는 자유가 동시에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그 시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 명상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245쪽
“이 세상이 고수에겐 놀이터요, 하수에겐 생지옥 아니던가.”
다만 안목의 문제입니다. 내가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굴리겠지만, 만일 그러지 못하다면 세상에 굴림을 당할 뿐입니다. -215쪽
중생을 버리고 부처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을 벗어나야만 부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생의 일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미 부처를 구현하고 있음이 스스로 명백하게 확인되어야지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2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