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김천 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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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김천 직지사
  • 노승대
  • 승인 2022.12.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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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영동군 황간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서면 바로 경상북도 김천 땅이다. 김천 하면 직지사가 함께 떠오르니 그만큼 직지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하기야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 선산 모례의 집에서 은밀하게 불교를 전파하던 아도화상이 일찍이 점찍었던 자리라고 하니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927년 신라를 구원하려고 출병했던 왕건이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완패해 신숭겸이 왕건의 장군복을 대신 입고 싸우다가 김락 등 많은 장졸과 함께 죽었다. 왕건은 졸병 복장으로 겨우 탈출해 직지사 인근까지 후퇴했다. 부하들의 권유로 직지사 능여대사를 찾아뵙자 대사는 짚신 2,000켤레를 헌납하며 말띠해부터 좋은 기운이 흥할 것이라 예언했다. 930년 더욱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직지사 천묵대사는 스스로 발원해서 금자대장경(금니로 필사한 대장경) 593함 5,048권을 완성해 신라조정에 헌납했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고난이 그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고려의 팔만대장경 조성 이전, 가장 규모가 큰 대장경 불사였다. 경순왕은 몹시 기뻐하며 이 경전들에 제목을 달았다 전한다.

능여 스님의 예언대로 왕건은 말띠 해인 934년부터 전쟁의 승기를 잡기 시작, 936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은 직지사에 전답 1,000결(275만 평)을 하사했다. 신라가 멸망하자 직지사에서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인수해서 대장당을 짓고 봉안했다. 그 내력을 적은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는 없어지고 그 탁본이 『조선금석총람』에 전한다. 물론 금자대장경도 사라졌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직지사는 가람을 잘 수호할 수 있었다. 조선 2대 왕인 정종이 자신의 태실을 대웅전 바로 뒤 북쪽으로 옮기며 태실 수호의 임무를 직지사에 맡겼기 때문이다. 정작 직지사가 완전히 초토화된 것은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조선의 승병을 이끈 사명당이 출가한 사찰이고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왜군 진격로 가까이 있었으니 왜군은 승병의 근거지가 된다 하여 모조리 방화하여 없애버린 것이다. 40동 건물과 대웅전 앞 5층 목탑도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법, 직지사는 전쟁이 끝난 후 온 힘을 쏟아 사찰을 복원했고 수많은 고승이 주석하며 법등을 전해왔다. 또한 600정보(180만 평)의 삼림 속에 큰 절이면서도 아름다운 가람으로 가꾸고 보존해 왔다.

만추의 계절, 유서 깊고 아름다운 직지사를 찾아가는 우리들의 발길은 가볍고 마음은 가을빛으로 충만하다.

 

직지사 일주문은 임진왜란 때 타지 않았지만 1660~1720년 사이에 중건된 건물이다. 현판은 자하 신위의 장인 조윤형(1725~1799)의 글씨다.

 

일주문 전에 있는 직지사사적비. 직지사는 전쟁 후 1602년부터 70여 년에 걸쳐 절을 중건했다. 조종저가 짓고 선조의 손자인 낭성군 이우가 썼다.

 

금강문에는 특이하게 두 금강역사와 보현, 문수보살이 그림으로 모셔져 있다. 직지사는 원래 4문이 있다 했기에 이 문 앞에 대양문을 새로 세워놓았다.

 

사천왕문 앞 왼쪽의 돌판은 16세의 사명대사가 잠들었던 곳이다. 신묵대사는 황룡이 은행나무를 감고 있는 꿈을 꾸고 이곳에서 그를 만나 제자로 삼는다.

 

은행나무는 1800년 화재로 없어졌다. 사천왕문은 임진왜란 때 일부 피해가 있어 추담대사(1582~1685)가 보수했고 1776년에는 군수 신학휴가 시주를 하여 사천왕 몸체를 수리하고 단청했다. 1890년에도 중수한 기록이 있다.

 

허리가 날씬하고 긴 모습의 사천왕상이다. 2015년 다시 중수했다.

 

대웅전 앞 쌍탑은 원래 문경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 터에 나란히 누워있던 세 탑을 1974년 직지사로 옮겨 세운 것이다. 또 한 기는 비로전 앞에 있다.

 

대웅전은 1649년 짓고 1735년에 중수한 건물이다. 전쟁 전에는 이층 건물이었으나 단층으로 복원했다. 지붕 끝 백자연봉과 용마루 청기와가 눈에 띈다.

 

대웅전도 보물이지만 삼존불 뒤 세 폭의 후불탱화(1744년작)도 보물이고 앞의 목조 수미단도 보물이다. 한 건물에 세 점의 보물이 있는 법당이다.

 

대웅전 안 서쪽 벽에는 여러 벽화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용을 타고 있는 관세음보살 앞에는 선재동자가 버들가지가 꽂힌 감로병을 받들고 있다.

 

경내의 단풍 터널. 나무 아래를 가을꽃으로 장식해서 한층 운치를 더했다. 계곡의 물을 끌여 들여 경내 곳곳으로 작은 냇물이 흐르고 연못도 조성했다.

 

사명각은 물론 사명대사를 기리는 전각이다. 18세에 선과에 합격하고 30세에 직지사 주지를 지냈다. 허봉과 친히 지냈고 동생 허균도 불교를 배웠다.

 

응진전 앞의 파초. 파초는 봄에 싹이 나고 가을에는 다 사라진다. 목질이 없다. 불가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상징으로 심는다.

 

경내에서 바라본 황악산(黃岳山)은 부드럽고 순후하지만 깊은 산이다. 높이는 1,111m로 속리산보다 높다. 오방색의 가운데로 해동의 중심 산이다.

 

일제시대에 각지의 태실을 관리하기 어렵다고 전부 해체해 서삼릉으로 태항아리만 옮겼다. 버려진 태실의 난간석을 수습해 성보박물관 앞에 정리해 놓았다.

 

안양루 앞에 있는 태실의 중앙 석물. 난간석이 둘러싸고 있었다. 정종은 2년 뒤 이방원에게 양위하고 15남 8녀를 두고 잘 살다 갔는데 웬 변고인고?

 

황간 월류봉은 워낙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우암 송시열이 낙향해서 잠시 머물기도 했었다. ‘달이 풍경에 취해 허공에 머문다’ 해서 월류봉(月留峰)!

 

반야교 다리를 건너 대숲 오솔길과 낙엽 쌓인 숲길을 지나 징검다리를 건너니 반야사다. 조선시대에는 1464년 세조가 속리산에 왔다가 이곳에도 들렀다.

 

이곳에서도 세조가 문수동자의 안내로 목욕을 했다는 영천이 있다. 문수가 사자를 타고 허공으로 올라갔다는 절벽에는 지금 문수전이 있다. 아득하다.

 

돌아 나오니 절 뜨락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자고 있다. 차량이 오가고 사람들이 소란스러운데 미동도 없다. 무념무상이다. 이미 득도의 경지? 어떻게 닦았니?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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