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을 통해 수많은 사물과 현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멋진 광경을 봤을 때, 그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고 표현한다. 통상 우리 시선이 외부 세상의 대상을 포착하면 그 형상과 색채가 안구를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반대다. 눈, 귀, 코, 혀, 몸을 통해 외부 대상 세계와 만나고, 경험과 기억의 형태로 저장된 데이터 저장소에서 특정 정보가 그 대상과 현상을 포섭하고 재구성해 낸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사물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대상을 내 안으로 담아내는 인풋(input) 과정, 즉 입력이 아니다. 오히려 내 안의 정보를 통해 인식하는 아웃풋(output), 즉 출력 과정이다. 이것은 불교의 유식(唯識) 전통뿐만 아니라 현대의 뇌과학에서 밝혀낸 사실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시선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기보다는 오히려 본질에서 끊임없이 빗겨 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만약에 그저 외부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인상을 표현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포착된 대상을 내면에서 이해하고 해석한 바를 재구성해 묘사할 수 있다면, 대상 사물의 본질에 더욱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100여 년 전, 이런 고민을 통해 새로운 미술 사조를 개척한 화가가 있다. 19세기 당시 주류였던 인상주의 화풍을 극복하고 근현대 미술의 시작을 알린 화가라고 평가받는 폴 세잔(Paul Cézanne)이다. 세잔은 “미술은 개인적인 통각이며, 자신이 이해한 것을 그림에 구성하여 그려 넣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도 그의 에세이 「세잔의 의심(Cézanne's Doubt)」에서 세잔의 이런 면모에 대해 “(세잔은)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보고 느끼고 싶어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보는 것이 곧 만지는 것이 되는 경지를 추구했다”고 소개한다.
“나는 사과를 가지고 파리를 깜짝 놀라게 할 거야.”
도약의 순간에 나타나는 과일, 사과
사과만큼 인류사에서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는 과일도 드물 것이다. 당장에 떠오르는 그것만 해도 이브의 사과와 뉴턴의 사과 그리고 최근에는 스티브 잡스가 창업한 회사 ‘애플’이 있다. 사과는 이렇듯 현재가 과거를 넘어서는 도약과 혁신의 순간 등장하곤 한다. 미술사에서도 어김없이 사과가 등장한다. 바로 세잔의 사과다.
세잔은 평생 많은 정물화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사과를 소재로 한 그의 작품은 미술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표적으로 <사과와 오렌지>를 들여다 보자. 언뜻 보면 사과와 오렌지가 어지럽게 놓여 있는 듯하지만, 찬찬히 보면 나름의 도형과 구도 속에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구도는 곳곳에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사과가 금세라도 한쪽으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의외로 안정감과 균형감을 유지하며 견고한 구도를 보인다. 그 이유는 그림 속 각각의 사과와 오렌지가 모여 있건, 흩어져 있건 서로 의존하면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세잔이 연기적 관계 속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과이고 저것은 오렌지이고 하는 낱낱의 분별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개별적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는 관계 속에서 그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선이다.
또한 자세히 보면 사과나 오렌지는 하나의 시선에서만 파악될 수 있는 구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사과는 위에서 보이는 대로 묘사되고, 어떤 사과는 옆에서 혹은 비스듬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구도다. 놀랍게도 이 그림은 하나의 평면 화폭 위에 두 시점에서 본 다른 각도의 대상이 묘사되어 있다. 단일한 평면 위에 대상의 다면적인 모습을 이중 시점을 통해 입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사과의 모습이다. 하지만 세잔에게는 이것이야말로 능동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숙고하면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해 그 이면까지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세잔이 사과를 통해서 보여주는 입체감은 구도나 시점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색채도 한몫한다. 사과라는 대상에 대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세잔 자신이 머릿속에서 재구성한 다양한 색을 섞어서 묘사함으로써 원근은 물론 명암, 질감, 음영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사물의 형태에 대한 사실주의적 묘사는 적어도 그에게는 주요 관심 대상이 아닌 듯하다. 이 때문에 세잔의 색감은 경계를 무너뜨리지만 놀랍게도 이전에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새로운 경계를 드러낸다.
세잔의 놀라운 색감은 조화롭지 못한 사물의 구도나 왜곡된 형태 묘사마저도 다 삼켜 버리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그만의 기법은 <사과와 정물>(1887), <사과와 바구니>(1895) 등 다른 정물화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세잔은 기존의 인상주의 화풍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정교한 원근법을 적용하고 세밀한 묘사를 하더라도 그건 사물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냈다기보다는 머릿속에서 그려낸 일종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렇게 사물을 바라보는 세잔만의 관점과 사유는 후에 피카소의 큐비즘뿐만 아니라 다양한 현대 미술 사조에 영향을 주게 된다. 후에 그의 영향을 받은 야수파의 앙리 마티스는 세잔에 대해 “미술의 신”이라고 존경을 표했고, 피카소는 “세잔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그가 현대 미술에 끼친 영향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나는 무언가 견고하고 박물관 속 미술처럼 오래가는 인상(impressionism)을 만들고 싶다.”
안목과 통찰 그리고 명성
폴 세잔은 1839년,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은행을 공동 창업할 정도의 재력가였기 때문에 세잔은 집안의 재정 지원 속에서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세잔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에밀 졸라(Émile Zola)와의 만남이다. 열 살 무렵 다니던 학교에서 항상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에밀 졸라 편에 서서 대신 싸워준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훗날 에밀 졸라가 세잔을 모티브로 삼아 쓴 소설 『작품(L'oeuvre)』에서 클로드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세잔을 비하하는 내용이 소개되면서 서로 결별하지만, 서로가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세잔은 아버지의 권유로 마지못해 법학 공부를 시작하지만, 이내 그만두고 파리로 떠나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세잔은 당시 인상주의가 풍미하던 파리에서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 그림을 배우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세잔은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화풍을 펼쳐 나간다. 예를 들어, 같은 풍경을 묘사하더라도 단순한 형태와 색채를 통해 표현하려고 시도했고, 전통적인 방식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세잔은 작품 활동 내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거듭된 출품에도 불구하고 살롱에서는 그의 작품 전시를 매년 거부했고, 그나마 몇 번의 인상파 작가들과의 공동 전시 기회를 얻었을 뿐 세간의 주목과 찬사하고는 인연이 없었다. 오히려 작품이 전시될 때마다 수많은 조롱과 모욕, 심지어는 정치적 사건과 연루 지어 파리를 떠날 것을 종용받기까지 한다. 그 시기 절친한 친구인 에밀 졸라는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면서 명성을 쌓아가지만, 세잔은 여전히 그저 그런 화가에 불과한 처지였다.
인정받지 못한 대부분 예술가가 그렇듯이 세잔 또한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다시 남프랑스 고향 마을로 돌아간다. 세잔의 영감은 어렸을 적부터 늘 바라보고 뛰어놀았던 <생트 빅투아르 산> 풍경화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기부터 오히려 세잔의 작품들이 주목받고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56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첫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이 무렵 세잔의 영향을 받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상파 화가들이 작품 활동을 위해 남프랑스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1906년 당뇨로 고생하던 세잔은 당뇨병으로 성치 않은 노구를 이끌고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가 폭우를 맞고 나서, 폐렴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67세였고, 어린 시절 에밀 졸라와 뛰어놀았던 고향 엑상프로방스의 공동묘지에 묻힌다. 세잔이 다른 여느 천재 화가들처럼 매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순 없지만, 번득이는 섬광처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그의 안목과 통찰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전해 준다.
새로운 미술 시대의 서막, 정견
세상을 바로 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누구나 눈이 있으니 어려운 일이겠냐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죽했으면, 부처님께서도 고통을 종식하고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 팔정도에서 그 첫 번째가 ‘올바로 본다’ 혹은 ‘바른 견해’라는 의미인 ‘정견(正見)’이겠는가. 우리가 바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현재의 고통을 자각하고 그것을 소멸하는 길로 걸어갈 수 있다.
누구나 현재 속에 있으면서도 그 현재를 넘어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세잔 또한 일생의 대부분을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당하고 자신도 열등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나날을 보낸다. 그 순간순간을 넘어서기 위한 몸부림을 통해 세잔이 택한 것은 세상을 보는 법에 대한 고민이었다. 바로 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간이 세잔을 단련시키면서 예술적 깊이를 만들어냈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통찰을 던져준 것이다.
말년에 세잔은 그를 따르는 후배 미술가들을 위해 일생의 꿈과 노력을 통해 얻은 통찰을 마지막 유훈처럼 전달한다. 마치 깨달음을 이룬 노스승이 젊은 후학들을 위해 수행 정진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듯이 말이다. 세잔은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통찰을 담은 간절한 한마디를 그들에게 남긴다.
“새로운 미술의 시대가 열릴 것이니 준비하시오.”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