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최고의 이상세계, 정토
천당이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많이 써서 기독교 용어로 아는 분이 더러 있다. 그러나 천당은 기독교가 전래하기 이전부터 사용되던 불교 용어다. 돌아가신 영혼의 집착을 덜어 드리기 위해 읽는 <무상계(無常戒)>만 봐도 “천당불찰(天堂佛刹) 수념왕생(隨念往生)”이라는 내용이 있지 않은가! 번역하면, ‘하늘 위의 천당과 부처님 세계에 마음 따라 왕생한다’는 뜻이다. 육신의 속박을 벗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영혼의 자유를 획득하면, 천당과 불세계 중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천당’과 ‘불찰(불세계)’이라는 두 가지 선택권이 등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간혹 착각하기도 하지만, 천당과 불세계는 주식과 코인처럼 엄연히 다른 두 대상이다. 천당은 하늘에 있는 천상 세계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메인을 의미한다. 서울이 천상 세계라면, 천당은 청담동이나 대치동 정도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또 천당은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다.
이에 반해 불세계는 다른 말로는 불국토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주도하시는 인간 세계다. 우주의 어느 행성에 고도로 발달한 유토피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곳은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가 아닌 우리와 같이 현재 존재하는 먼 곳일 뿐이다. 즉 천당이 하늘 위에 존재하는 사후의 수직 세계라면, 불세계는 멀리 떨어져 있는 수평 세계라는 말씀.
석가모니부처님은 우리 세계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정신적인 가치를 설파하신 분이다. 그러나 물질세계까지는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석가모니를 제한적인 붓다, 즉 화신불(化身佛)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미래에 올 미륵은 ‘깨달음+세계적인 완성’도 성취한다. 해서 『서유기』의 삼장법사 현장은 미륵과 함께하기를 발원했던 것이다.
붓다란 한자로는 ‘각자(覺者)’, 즉 깨달은 사람이다. 진리를 발견한 인간이라는 의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붓다가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이다. 부처님께서는 붓다는 인간 세계에만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이것이 바로 ‘신을 넘어서는 초인으로서의 붓다’다. 이 때문에 부처님을 천인사(天人師), 즉 인간과 신들의 스승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진리를 발견해서 깨달은 분은 인류의 역사에서 과거에도 있고 미래에도 존재한다. 석가모니 이전에도 구류손불 → 구나함모니불 → 가섭불이 있었고, 더 과거에는 연등불도 계셨다. 또 미래로는 미륵불 → 사자불 등이 존재한다. 이런 시간 속의 붓다는 우리가 사는 세계인 지구에서의 일이다.
만일 무한한 우주로 눈을 돌린다면, 다양한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을까?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우주에 만약 우리만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라는 말을 했다. 실제로 올해 허블 망원경을 이은 제임스 웹 망원경이 궤도에 오르면서, 우주는 더욱 넓어지고 유기체의 생존 가능한 행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보이지 않던 너머의 세계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불교는 우리가 사는 세계 외에 동서남북과 상하에 존재하는 다양한 불세계를 말한다. 이 중에는 중심이 된 부처님이 주도해 관장하는 세계도 존재한다. 이런 곳이 불교에서는 최고의 이상세계인데, 이를 ‘깨끗하고 복된 땅’이라고 해서 정토(淨土)라고 한다. 이 정토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동방 약사여래의 유리광세계와 서방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다.
유리광세계가 모든 장애가 없는 맑고 깨끗한 곳이라면, 극락은 말 그대로 즐거움이 지극한 세계다. 이 두 곳을 대표로 드는 것은, 한국의 대표 가수로 BTS와 블랙핑크를 꼽는 것과 유사하다. 즉 불세계 중에서도 ‘탑 오브 더 탑(Top of the Top)’인 것이다.
서방 극락세계의 설계자
서쪽에도 다양한 불세계가 있는데, 이 중 최고가 극락이다. 즉 서방 불세계의 대표성을 가지는 게 극락이라는 말이다. 해서 극락은 ‘서방극락’이나 ‘서방극락정토’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한다.
극락은 풀이하면 즐거움이 지극한 곳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즐거움은 알고 보면 ‘공부의 즐거움’으로 ‘쾌락적인 즐거움’이 아니다. 쾌락적 즐거움이 있는 곳은 극락이 아닌 사후의 천당이다. 해서 극락의 선택권이 있어도 천당을 선호하는 분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극락이라고 했을까? 요즘 말로 하면 제목으로 낚으려는 낚시였을까? 쾌락이 좋기는 하지만, 이는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침내는 고통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즉 진정한 즐거움은 진리를 터득해서 대자유와 깨침을 증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극락의 예전 번역어인 안양(安養)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심신의 행복한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경기도 안양시나 불국사 극락전 앞의 안양문 등은 모두 여기에서 유래한다.
안양보다는 극락이 보다 자극적이며 이상세계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부여한다. 그러나 실상 극락은 진리로 나아감에 물러남이 없는 공부의 세계일 뿐이다. 해서 필자는 농담으로 ‘공부 싫어하는 분은 극락에 가면 힘들 수도 있다’고 말하곤 한다.
아미타불의 아미타는 인도말 아미타-유스(Amitā-yus)와 아미타-바하(Amitā-bha)의 공통 단어인 아미타를 대표성으로 차용한 것이다. 아미타(Amitā)는 ‘한량이 없다’는 의미로 유스(yus)는 ‘수명’, 바하(bha)는 ‘광명’이다. 즉 아미타-유스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 되고 아미타-바하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 되는 셈이다. 이로 인해 월정사나 석굴암에는 수명(壽命)과 광명(光明)의 의미를 차용한 수광전(壽光殿)이 존재하기도 한다.
수명과 광명은 아미타불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이 때문에 아미타불은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으며, 무량한 광명을 내뿜어 어두움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지혜를 펼쳐 내게 된다. 실제로 의상대사가 무량수불을 모신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는 탑이 없다. 이에 대해 원융국사탑비를 보면,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으므로 열반의 상징인 탑을 만들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서경』의 「홍범」편에는 우리가 익히 들어본 5복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런데 순서를 보면, 장수[壽] → 부귀[富] → 건강[康寧·강녕] → 덕성[攸好德·유호덕] → 편안한 죽음[考終命·고종명]이다. 즉 첫째가 장수다. 이는 의료가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장수가 얼마나 선호됐는지를 잘 나타낸다. 이 때문에 아미타불의 번역은 무량광불보다는 무량수불이 보다 선호된다.
석가모니가 사바세계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면, 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구상한 설계자다. 마치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랜드를 만들고 수많은 만화로 하나의 세계관을 정립한 것처럼, 아미타불 역시 극락세계를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신 것이다.
붓다가 되기 전 아미타불의 수행자 이름은 법장비구였다. 이때 총 48가지의 서원을 발하는데,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붓다가 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피나는 정진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극락은 지옥·아귀·축생의 고통받는 중생이 없으며, 대지는 평평하며 온갖 보물과 장엄으로 장식된 세계가 된다. 그리고 극락의 대중들은 모두 신통을 가지며, 금빛 나는 몸과 32상을 구족한 얼짱과 몸짱으로 구성된다. 또 이들은 모든 불세계의 부처님들을 공양하고 가르침을 배우며, 깨달음에 이르도록 물러나지 않는 대정진을 행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극락에는 미추가 없다(無有好醜·무유호추)’는 것이다. 외모에 대한 문제가 없는 곳이 극락이라는 말이다. 이는 외모지상주의 문제가 법장비구 때도 심각했다는 의미를 반증하고 있어 재미있다.
또 극락에 가는 방법으로 가장 간단한 것은 ‘나무 아미타불’, 즉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10번 이상 염불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49재나 천도재 때는 맨 마지막에 아미타불 염불을 행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하이패스를 열어 줄 경우 극락의 수준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해서 극락에 태어나는 이들 중 근기가 낮은 분들은 9품 연지에 존재하는 연꽃 속에서, 최대 12겁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간을 갇혀 있어야 한다. 이때 밖에서 들려오는 극락 불보살님의 가르침을 귀로 들으며, 내면을 씻고 성숙하게 닦아 나가는 것이다.
연꽃은 낮에는 피고 저녁에는 오므라들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이미지가 극락세계에도 차용돼 연꽃에서 태어나는 연화화생(蓮華化生)의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 이러한 모티브가 불교를 타고 우리에게 남긴 것이 『심청전』이다. 이 때문에 심청은 연꽃을 타고 환생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극락은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에 의해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다. 그러나 가고 나서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비로소 극락 대중이 될 수 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대학이 입학정원제를 취하는 것과 달리, 유럽식의 ‘졸업정원제 대학’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극락은 죽어서 가는 곳인가?
불교에서는 돌아가신 분에게 ‘극락왕생’, 즉 극락에 가서 태어나는 것을 기원해 주곤 한다. 이 때문에 극락을 천당과 같은 사후세계로 이해하는 분이 많다. 그러나 극락은 우리 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 억 국토 떨어져 있는 인간계일 뿐이다.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불보살님이나 아라한 같은 신통을 가진 분이 아니면 딱히 갈 방법이 없다.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10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지구와 같은 환경의 행성을 관측한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딱히 가서 확인해 볼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윤회론을 믿기 때문에 죽어서 그쪽 세계에 다시 태어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즉 극락왕생이란, 죽은 후에 극락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극락에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다.
자현 스님
동국대 강의전담 교수와 능인대학원대 교수를 지냈으며, 오대산 월정사 교무국장,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와 불교학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성공을 쟁취하는 파워 실전 명상』, 『지장 신앙의 성립과 고려불화 지장보살도』, 『사찰의 상징세계(상·하)』(2012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등 6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