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큰 보물’이자 ‘세계의 지보(至寶)’
현재 우리 사회는 코로나와 같은 국내외 사정으로 녹록지 않고 더욱 꼬여 들고 있는 듯하다.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 속에서 국내외 위기와 모순 때마다 슬기롭게 극복하고 유수한 문화·기록유산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온 다양한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팔만대장경판으로 알려진 국보 해인사 대장경판의 조성불사도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야만적인 몽골의 침략으로 수도를 옮긴 지 6년이 지나던 고려 고종 24년(1237) 정유년 어느 날, 국왕과 태자·공·후·백·재신·추신 및 문무 관료들은 당시의 임시 수도 강화경(江華京, 지금의 인천 강화군)에서 목욕재계하고 부처님께 향을 피워 올렸다. 고종 황제의 명령으로 백운거사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이라는 글을 부처님과 보살님께 경건하게 아뢰기 위해서였다. 이보다 1년 앞서 임시적인 국가기구로 설치·운영된 고려국대장도감에서 대장경판 전체 가운데 『대반야바라밀다경』 등의 일부 목판이 처음으로 순조롭게 판각됐기에, 국왕과 신하들이 이 사실을 부처님께 아뢨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고려 국왕과 문무 관료들이 함께 다시 발원한 대장경판의 조성으로 몽골 침략의 격퇴와 나라·왕실의 안녕 등을 염원했다. 초조대장경판의 조성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믿음을 다시 대장경판의 판각불사로 계승·이입한 염원이었다.
팔만대장경판의 판각불사를 국가적으로 시작한 이후 16년이 흐른 고종 38년(1248) 음력 9월 임오일(25일)이었다. 국왕 고종과 문무 관료들은 강화경 도성의 서문 밖에 건립된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으로 가서 대장경판 조성불사가 일단락된 것을 축하하는 경찬회를 열었다.
고종과 문무 관료들이 함께 발원해 국가사업으로 추진된 팔만대장경판의 조성불사에는 문인과 지식인, 불교계의 승계 소유 및 일반 스님, 하급 관료 및 지방의 토착 세력 등도 참여했으며, 미성년자까지 포함됐다. 조성사업에는 불교·유교의 사상과 함께 사회적인 계층·세대를 뛰어넘는 통합의식이 담겨 있었다. 당대의 다양한 불교 종파·사원들도 포함됐다. 이들 역시 국가·사회적인 염원과 함께 불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조성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 개별 경판을 직접 새겼다. 이들 스님과 세속의 일반인은 교속(敎俗)의 이원적인 협조체제를 유지하며 강화경의 고려국대장도감과 함께 각 지역에 설치된 분사대장도감에서 정성을 기울여 개별 경판을 판각했다.
1237~1248년 조성된 팔만대장경판은 13세기 중엽 이래 현재까지 그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3세기 중엽 팔만대장경판 조성불사의 이념적 명분을 제시한 이규보는 팔만대장경판을 ‘나라의 큰 보물[國之大寶·국지대보]’이라 평가했으며,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도은 이숭인(李崇仁)도 법보(法寶)로 여겼다. 성리학적 가치 질서의 기틀을 마련했던 조선 세종도 ‘우리나라 대대로 전래한 보물[我國世寶·아국세보]’로 표현하는 등 귀중한 기록유산으로 인식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지식인들도 대법보·국보로 인식했으며, 해방 이후 불교 지식인들도 세계적인 거대한 문화재이며 우리 민족의 진중(珍重)한 국보로 칭송했다. 북한도 귀중한 국보 및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중세사회 이래 팔만대장경판을 동아시아의 우수한 불교 기록유산으로 인식했다. 고려말 창왕 즉위년인 1388년 음력 7월부터 조선 전기까지 일본 유구국(오키나와)·대마도(쓰시마) 등지에서 80차례 이상에 걸쳐 팔만대장경판 목판 자체나 그 인출본(印出本, 인쇄본)을 청구했다. 청구 과정에서는 일본의 국보로 삼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했다.
세종 5년(1423) 음력 12월 일본 국왕이 세종에게 보낸 친서에서도 팔만대장경판을 법보로 표현했다. 세종 6년 정월에는 일본 사신이 팔만대장경판을 일본으로 가져갈 목적으로 단식하면서 죽을 각오까지 했다. 18세기 초기 일본의 학승 닌초(忍澄)는 팔만대장경판이 당시까지 조성된 동아시아 사회의 한역대장경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극찬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연구자조차도 팔만대장경판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세계의 지보(至寶)로 인식했다.
이러한 역사·문화적인 가치로 1934년 5월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의 기록유산 가운데 해인사 대장경판이라는 명칭으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됐으며, 1962년 12월 국보 제32호로 지정돼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2007년 6월에는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그 역사·문화적인 가치의 보편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보존·교정 등의 우수성 또한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교정의 우수성
팔만대장경판의 교정은 고종의 명령으로 개태사의 승통(僧統) 수기(守其) 스님이 전체적인 책임을 맡았으며, 승려 지식인 천기(天其) 스님 등도 함께 참여했다. 수기 스님 등은 당시까지 전하고 있던 송나라의 개보칙판대장경 및 요나라의 거란대장경과 함께 고려 현종 때 이래 조성된 초조대장경, 그리고 고려의 여러 사원에 전승되던 개별 불교 경전을 세밀하게 상호 대조해 교정본을 확정했다.
이 과정에서는 기존 오탈자와 함께 빠진 내용까지 보완했으며, 새로 발견된 경전과 전통 불교 경전의 여부도 확인했다. 그들이 확인한 교감 내용 가운데 명확하게 확정할 수 없는 내용은 향후 다시 바로잡도록 흔적을 남겨 두는 등 탄력성도 반영했다. 팔만대장경판의 글자 수가 무려 5000만 자 넘는 방대한 분량이므로, 그들의 교정작업은 일반인 이상의 초인적인 집중력과 노력이 요구됐을 것이다.
교정작업에는 다양한 불교 경전에 대한 해박한 전문지식도 필요했으므로, 수기 스님 등은 그에 상응하는 불교 경전의 교학적인 지식도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당대 문인 지식인 동산수 최자(崔滋)가 지은 『보한집』의 「개태사승통수진(開泰寺僧統守眞)」에서는 수기 스님을 “학문과 식견이 넓고 정밀했으며, 교정을 자신이 번역하는 자세로 세밀하게 보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수기 스님은 『대방광불화엄경』(국보 제203호 『대방광불화엄경』 권6) 등을 소장했으며, 이러한 불교 경전을 교정했다. 교정한 내용은 팔만대장경판 개별 경전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돼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수기 스님을 비롯한 이들은 교정 내용을 전체 30권으로 구성된 『고려국신조교정별록(高麗國新雕校正別錄)』으로 편찬해 팔만대장경판 중 개별 경전의 한 종류로 편입시켰다.
『교정별록』의 각 권 제1장에는 “사문 수기 등이 고종 황제의 명령으로 교감하였습니다(沙門守其等 奉勅校勘)”라는 내용이 표기돼 있다. 수기 스님 등은 교정 과정에서 바로잡고 새롭게 확인해 전체 3권의 『대장목록』으로 편찬한 다음, 팔만대장경판 가운데 한 종류로 편입시키기도 했다.
팔만대장경판은 이러한 교정의 우수성으로 13세기 중엽 이후 새롭게 간행된 한역대장경의 핵심적인 원천텍스트로 활용됐다. 17세기 초기에 일본 상명사(常明寺)의 학승 슈존(宗存) 스님이 조성을 주도했다가 중단된 종존판(宗存版)대장경을 비롯해 19세기 말기의 대일본교정축쇄(大日本校訂縮刷)대장경 및 20세기 전기의 대정신수(大正新修)대장경과 함께 1980년대부터 시작된 대만의 불광(佛光)대장경 등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팔만대장경의 내용이 핵심적인 표준으로 활용됐다.
팔만대장경판에 담긴 교정의 우수성은 18세기 초기 여러 종류의 한역대장경을 대조·교정한 일본 정토종의 승려 지식인 닌초 스님이 남긴 기록에서도 그 객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닌초 스님은 팔만대장경판의 내용과 교정을 모든 나라의 대장경 가운데 견줄 만한 것 없이 뛰어난 판본으로 극찬했다. 닌초 스님은 17세기 중엽 간행된 일본 황벽판(黃檗版)대장경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18세기 초기 일본 교토 건인사(建仁寺)에 소장된 팔만대장경 인출본의 내용을 세밀하게 비교·대조해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지었던 승려 지식인이다. 때문에 팔만대장경판의 교정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할 수 있다.
과학적으로 온전히 보관된 대장경
팔만대장경판은 조성된 이후 13주기의 간지로 780년이 지나가고 있으며, 80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까지 거의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 다양한 조건과 노력으로 현재까지 보존의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팔만대장경판에는 13세기 중엽 조성사업 당시부터 개별 경판을 지속해서 보존할 수 있는 경험적 기술 역량이 반영돼 있었다. 개별 경판의 외형적 구성 형태와 개별 글자의 판각 형식, 그리고 원판의 좌·우에 끼워 넣은 마구리(손잡이)의 두께와 길이 및 형식, 장석의 장치 및 금속 성분 등에서는 개별 경판의 훼손과 마모 및 부식을 최대한 방지하고 지속해서 보존할 수 있는 당대의 경험적 과학성이 반영됐다.
이러한 경험적 과학은 최소 11세기 이래 고려의 사원 등에서 지속해서 계승되던 보존기술과 역량이었다. 팔만대장경판은 조성불사 당시부터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온 목판 출판·인쇄술을 집약적으로 담아 보존의 지속성을 기획·반영했던 것이다.
팔만대장경판은 고려 충숙왕 5년(1318) 음력 11월 이후부터 우왕 7년(1381) 4월 사이 해인사로 옮겨 보관되면서 보존의 지속성을 더욱 확보할 수 있었다. 해인사는 지리적인 조건이 전쟁과 같은 국가적 변란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이었으며, 훼손·분실된 개별 경판을 보수·보완할 수 있는 판각 역량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성리학적 이념으로 통치된 조선 전기에도 왕실이나 조정에서 팔만대장경판의 보존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세종은 팔만대장경판의 자체를 일본으로 넘겨주길 요청하던 일본 조정의 요구를 저지했으며, 세조도 국가조직으로 팔만대장경판의 보존을 지원했다.
성종의 지원으로 중수된 해인사 장경판전은 온도·습도와 일조 환경 및 환기·통풍 성능에서 팔만대장경판을 안정적으로 지속해서 보존할 수 있는 건축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해인사의 지리적인 조건과 판각 역량, 조선 조정이 구축하고 지원한 다양한 보존 시스템 등으로 팔만대장경판은 가야산 해인사로 옮긴 이후에도 지금까지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최영호
해인사 대장경판과 고려-조선시대 불교서지학 및 고려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의 판각사업 연구』 등 2권의 개인 저서와 공동저서 30권 및
60여 편의 논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