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흘림기둥 무량수전이 빼어난 영주 부석사에서 ‘극락 가는 길’ 도중에 있는 안양루와 범종각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비지정문화재인 ‘봉화 청암정(奉化 靑巖亭)’, ‘영주 부석사 안양루(榮州 浮石寺 安養樓)’, ‘영주 부석사 범종각(榮州 浮石寺 梵鐘閣)’ 등 3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경북 영천시에 위치한 ‘영천 인종대왕 태실(永川 仁宗大王 胎室)’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등재된 부석사 내 자리한 문루(門樓, 문 위에 세운 높은 다락)다. 국보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의 형식이며 16세기 사찰 문루 건축의 대표적 사례다.
조선 중기 문신 김령(金坽, 1577~1614)의 문집 『계암일록(溪巖日錄, 작성연대 1615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浮石寺 安養樓 重刱記, 작성연대 1644년)」 등 문헌자료에 따르면, 안양루는 단층의 강운각(羌雲閣)이었다. 1555년 화재로 강운각이 소실되자 그 자리에 현재의 안양루를 지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안양루는 ▲ 사찰의 진입 축(軸)을 꺾어 무량수전 영역에 진입하도록 배치한 점 ▲ 누마루 아래로 진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 ▲ 공포와 대들보의 구성 등에 조선 중기 또는 그보다 이전에 사용된 오래된 기법이 남아 있는 점 등을 고려해 역사·예술·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사찰 문루 건축이라는 게 보물 지정 예고의 이유다.
함께 보물로 지정 예고된 영주 부석사 범종각도 영주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종각이다.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의 형식을 가진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건축이다.
범종각은 『계암일록』, 「부석사기(작성연대 1651년)」등 문헌자료에 ‘종루(鍾樓)’, ‘종각(鐘閣)’으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부석사 종각 중수기(작성연대 1746년)」에 따르면, 1746년 화재로 소실돼 이듬해인 1747년에 중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청량산유록(淸涼山遊錄, 작성연대 1780년)」 등 문헌자료에 의하면 범종각 내부에 쇠종이 있다는 기록이 있지만, 19세기 이후 해당 범종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은 ▲ 일반적으로 종각이 사찰 좌우에 배치되는 것과 달리 사찰의 진입 중심축에 위치한 점 ▲ 아래층 가운데 칸을 지나 계단을 거쳐 안양루로 통하는 형식인 점 ▲ 지붕의 포와 포 사이에 놓여 무게를 받치는 부재인 화반을 덩굴나무 모양의 파련초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점 ▲ 지붕 내부에 범종각 재건 당시 것으로 판단되는 단청이 남아 있는 점 등 역사·예술·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며 보물 지정 예고 이유를 밝혔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봉화 청암정은 안동권씨 충재종택 경역 내에 있는 정자다. 인근에 있는 석천계곡의 석천정(石泉亭) 등과 함께 현재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청암정기(靑巖亭記, 작성연대 1682년)」, 「선생수서목편식(先生手書木片識, 작성연대 1724년)」 등 문헌에 1526년 충재 권벌이 살림집의 서쪽에 세운 사실이 기록돼 있다.
16세기 사대부들이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개인적인 장수(藏修, 책을 읽고 학문에 힘씀)와 유식(遊息, 몸과 맘을 쉬면서도 학문에 맘을 두는 것)을 위한 개인 거처를 집 주변이나 경치 좋기로 이름난 곳에 정자 형태로 짓는 방식을 가거(家居)라 일컬었는데, 봉화 청암정은 이러한 사대부 주거문화를 선도한 대표적 사례다. 또 안동권씨 가문과 인근 지역의 크고 작은 일을 논의하는 회합의 장소로도 사용되는 등 오랜 기간 역사적 자산으로 인식됐다.
문화재청은 보물로 지정 예고한 ‘봉화 청암정’, ‘영주 부석사 안양루’, ‘영주 부석사 범종각’에 대해 예고 기간 30일 동안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한편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는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 12대 임금인 인종(仁宗, 재위 1544~1545)대왕이 태어난 지 6년이 지난 1521년(중종 16)에 의례에 따라 건립됐다. 태를 봉안한 태실(胎室)과 1546년(명종 1) 가봉(加封, 자손이 왕위에 오를 때 태실의 위엄을 더하고자 격식을 높임) 때 세운 비석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종은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 재위 기간이 짧아 곧바로 가봉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