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실 발원 불상의 연구>
유근자 지음 | 1,000쪽 | 80,000원
제목에서 스트레이트하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조선시대에 왕실 발원으로 조성・중수된 불상에 대한 연구입니다. 엄청나게 다양한 자료를 참조했고, 복잡한 표도 많으며, 각주는 1,100개에 육박하고, 참고문헌은 22페이지에 걸쳐 나열됩니다. 결정적으로 페이지 수도 1,000페이지에 이릅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말해 본격적인 학술서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학술서”라는 말만 들어도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잠이 오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여러분이 떠올리는 “학술서”와는 달리, 뭔가 색다른 재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 왕실 발원 불상과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중에는 세조, 광해군, 영조 같은 유명한 인물들도 있고, 안양군, 봉보부인 백씨, 숙의 김씨, 상궁 홍씨 등등 생경한 인물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이런 저런 일이 벌어지는 법이지요? 이 책에는 그들이 만들어 낸 인간의 드라마가 담겨 있습니다. 저자 역시 은근히 이런 것을 의도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담당 편집자인 저 역시 이 책을 작업하면서 이 드라마를 발견하고 감상하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드라마들 가운데 몇 편을 소개해 볼까요?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는 자식을 얻고 싶어서 상원사 문수동자상 조성을 발원했지만, 끝내 자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광해군 부인 폐비 유씨는 여러 불사에 참여하며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지만, 남편은 물론 본인과 아들과 며느리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는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어린 딸들과 함께 상원사 목조제석천상 중수에 동참했지만, 정작 본인은 남편과 불화했던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파계사 관음보살상 중수발원문에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지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사도세자는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조선시대 왕실 발원 불상에는 근엄하기만 했을 것 같은 왕실 인물들이 겪었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들이 써 내려간 희망과 절망의 서사시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왕실 발원 불상은 미술품이기 이전에 왕실 사람들의 드라마가 응결된 오브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다채로운 사진과 함께 왕실 발원 불상의 복장 유물과 관련 문헌들을 꼼꼼히 분석하면서, 그 선연한 드라마를 인상적으로 펼쳐 보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학술서는 학술서이되, 여타 학술서에서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재미를 독자들에게 선사합니다.
제 방에는 책이 많이 있습니다. 한 권 두 권 책이 점점 쌓이다보니 이제는 뒹굴거릴 공간도 좁아지고 있습니다. 제 방을 찾은 사람들은 방도 좁은데 뭔 책을 자꾸 늘리냐고 한 마디씩들 하곤 합니다. 그래도 저는 제 방이 좋습니다. 그 많은 책들이 저마다 어떤 이야기를 도란도란 해 주는 듯한 느낌 때문이지요. 터키 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프랑스어로 말해 주기도 하고, 일본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독일어로 말해 주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한 책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방에 모셔 두니, 소설 중에 나오는 여우가 이렇게 제게 속삭여 줍니다. “내 비:밀은 이거여. 겁:나게 간단헌 거다잉. 맴:으로 볼 적에만 지대로 볼 수 있는 벱이여잉. 중요헌 건 눈에 안 뵈아.”
저는 지금 이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한 권을 제 앞에 세워두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책의 모습에서 이미 근엄한 포쓰가 좔좔흐르고, 무게감 넘치는 뽀다구가 작렬합니다. 책을 펼치면 뭔가 어려운 내용만 가득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어린 왕자>의 여우가 말해 주는 것처럼, “맴:으로 볼 적에만 지대로 볼 수 있는 벱”입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조선시대 왕실 사람들의 가려졌던 그러나 절절한 이야기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 즐거움을 만끽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 즐거움을 만끽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