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구의 부처님과 21기의 탑
발굴 조사 때 ‘운주사 기와는 하늘이 도와 만들 수 있었다’는 의미의 ‘운주사와은천조(雲住寺瓦恩天造)’라 새겨진 기와가 나왔다. 구름이 머물고 칠성과 여러 부처님이 계곡 곳곳에 나투니 운주사 계곡은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천상계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계곡은 마치 은하수와 같고 천불천탑은 그 안의 별과 같다.
운주사 서쪽 칠성바위 위의 와불을 두고 어떤 이들은 파주 용미리 미륵을 부부로 보는 것처럼, 운주사 와불 또한 부부불로 이야기한다. 앉아 있는 큰 부처님이 남자고 서서 시무외인을 한 왼편의 부처님이 여자라는 것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와불 진입로 오른쪽에 서 있는 부처님은 와불 사이에 태어난 자식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남자 부처님 오른쪽 바위에 바위를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석불입상이 와불에서 떼어낸 것이라면 삼존불을 조성하려다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이 된다. 하지만 그 옛날 250t이나 되는 무게를 무슨 수로 옮길 수 있었을까. 어쩌면 현재와 같은 모습 그대로가 완성체일지도 모를 일이다. 용케도 경사면 아래에 놓인 칠성바위의 국자 모양 바깥별은 북쪽의 와불을 향하고 있다. 북두칠성의 국자별이 북극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운주사 천불천탑 계곡의 중심에는 불감 안에 남과 북으로 등을 맞대고 앉은 부처님이 있다. 몸체는 비슷하고 광배는 화염문으로 동일하나 서로 다른 수인을 하고 있다. 북쪽으로 앉은 부처님은 누운 부처님처럼 가사 안으로 합장을 하고 정북으로 향해 있으며, 남쪽의 부처님은 오른쪽 무릎에 손을 올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15세기에 쓰인 『동국여지승람』은 남쪽 부처님을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북쪽을 향해 앉은 부처님을 미륵 부처님으로 봤다. 산 위에 누운 부처님이 굳이 경사가 져 일어서기 어려운 북쪽을 향해 있는 것은 불감 부처님과의 조화를 위해서는 아닐까. 불감 앞에 선 육층원형석탑은 마치 칠성바위를 올려놓은 듯하다. 현재는 육층으로 남아 있지만, 일제 강점기 때 찍은 자료 사진에는 칠층이었다. 계곡 중앙의 불감 부처님과 원형칠층석탑은 서쪽 사면의 북두칠성과 와불을 다른 형태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기우는 보름달 아래 합장한 사진 속 부처님은 북쪽을 향해 있는 부처님이다.
서쪽 큰 바위에 놓인 원형 돌덩이가 칠성바위다. 풀숲에 감춰진 돌을 찾아 선을 그어보면 하늘에서 땅 위로 떨어진 북두칠성 모양 그대로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나타나며 조선 전기까지 쓰인 형태다. 이렇게 큰 바위를 깎아 칠성을 표현한 곳은 운주사가 유일하다. 바위의 크기는 육안으로 느끼는 별의 밝기와 비슷하다. 이 칠성바위로 운주사가 과거에 의례를 행하던 사찰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운주사에는 주지스님과 예불 집전을 하는 스님, 두 분의 스님이 산다. 주지스님의 도량석은 대웅전을 돌아 남쪽 9층 석탑을 찍고 불감 부처님께 절을 올린 뒤에야 비로소 대웅전 마당에서 마무리된다. 곧이어 이어지는 종송과 대종 타종,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 등 두 스님의 여법한 예불은 본사인 송광사의 그것과 같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두 스님의 천불천탑을 향한 예불은 내내 한결같았으며 흐트러짐이 없이 지극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