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 템플스테이
계룡산 자락에 있는 갑사는 재가자를 위한 ‘무문관(無門關)’을 운영한다. 스님들이 출입문을 잠그고, 배식을 위한 작은 문만 열어 놓고 수행하는 곳을 무문관이라 일컫는다. 올라온 사다리를 발로 차버려 퇴로를 없애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갑사 무문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소 2박 3일은 지내야 한다. 이동익 팀장은 무문관에 참여하는 참가자가 있으면, 하루에 꼭 4번은 방문한다.
“한 달에 6~8명 정도 방부를 들입니다. 템플스테이 초심자보다는 수행에 관심 있는 분들이 오죠. 묵언(默言)이 원칙이지만 도시락을 들여보낼 때는 일부러 말을 시키죠. 생사는 확인해야죠?(웃음)”
5년 전, 갑사 템플스테이 팀장으로 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무문관 템플스테이’다. 템플스테이가 정착하면서 사찰마다 특화된 프로그램을 고민할 때다.
“실제로 교도소 감옥에서 1박 체험한 변호사 이야기에 ‘이거다’ 생각했죠. 그분은 그 경험을 잊을 수 없어 특화된 마을 만들 꿈을 꾸기도 했다고 합니다. 무문관 템플스테이? 딱 감옥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아비를 알아보지 못하더이다
템플스테이와의 인연은 2002년 월드컵 때다. 즉, 템플스테이 시조(始祖)라는 말씀. 그전에 사찰 종무원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많았다고. 월드컵 때 내소사에서 템플스테이 참가객들을 맞이했는데, ‘이 길이 내 길이구나’라며 생각을 굳혔다. 월드컵 당시 외국인 10여 명이 찾았는데, 참여자보다 지방자치단체나 관계기관 직원들 호응이 더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한 곳은 세종 영평사다.
“당시 영평사 스님이 ‘종무원으로 올 생각이 없냐?’고 묻더라고요. 거절했죠. 그런데 얼마 후 템플스테이 담당자로 제안을 다시 하셨어요. 그때는 두말없이 갔습니다. 연꽃이 유명한 곳이에요. 가서 4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운영했습니다. 그 후 입소문으로 많이들 오셨죠. 넉 달 만에 집에 가보니, 애가 제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해요. 아비를 못 알아본 거죠.”
그 시절, 그렇게 지냈다. 이동익 팀장은 템플스테이 성과를 ‘참가자 비용’만으로 한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참가자 숫자에 허수가 있었다고. 밖에서 보기에는 그렇지만, 내부적 평가 지표로는 참가비용이 정확하다. 템플스테이 지출 비용 역시 정확히 잡아야 한다. 갑사는 ‘전기요금’, ‘공양간 비용’도 사찰 재정과 분리 정산한다. 그래야만 템플스테이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고. 또한 프로그램도 철저히 준비한다.
“템플스테이에는 비종교인뿐 아니라 타 종교인도 옵니다. 이분들에게 예불 참석을 강제할 수는 없죠. 담당 스님하고 사전에 이야기해서 참여자들을 저녁 타종 체험에 유도하면 예불까지도 거의 참석합니다.”
방마다 비치된 ‘월간 불광’
갑사에 처음 올 때 템플스테이를 진행하기 위한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나마 방 개수도 많고 시설이 나은 선방과 바꿨다. 주지스님의 배려였다. 무문관뿐만 아니라 각 방에는 몇 권의 불교책과 월간 「불광」이 꽂혀 있다. 참여자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이분들이 불교를 하나라도 더 알아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얼마 전 스페인 젊은 친구들이 많이 왔는데 힘들었어요. 재미있는 게 뭔지 아세요? 남녀를 구분해서 분리했는데, 잠시 쉬는 시간에 여성은 여성대로, 남성은 남성대로 거의 수영복 차림으로 잔디밭에 숙소 매트를 깔고 햇볕을 쬐고 있더라고요. 눈을 어디로 둬야 할지 민망했죠.(웃음)”
무문관에 들어가 본인이 ‘폐소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아는 사람도 있었다고. 참 많은 일이 벌어지는 곳이 ‘템플스테이’이다.
사진. 정승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