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참선으로 피곤해진 밤에
차 달이며 무궁한 은혜를 느끼네."
차(茶)를 마시는 생활은 스님들의 일상(日常)이다. 소승 또한 출가한 후에야 비로소 차를 마시고 우려낼 줄 알게 됐다. 위 제목인 ‘명선(茗禪)’의 글씨는 동갑내기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초의(草衣, 1786~1866) 선사에게 써준 것이다.
두 분은 차를 매개체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추사의 부친 김노경은 유서 깊은 유학자 가문의 아들이 절간의 중과 교류를 걱정하여 하루는 일지암(一枝庵)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요즘 부모와 옛 부모의 심정은 시간만 다를 뿐, 자식 걱정은 똑같은 모양이다. 추사의 부친은 초의 선사에게 일지암의 유천(乳泉)을 물었다. 차의 기본이 되는 물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다. 이는 곧 초의 선사의 살림살이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내가 사는 산에는 끝도 없이
흐르는 물이 있어
사방 모든 중생의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각자 표주박을 하나씩 들고 와
물을 떠 가거라
갈 때는 달빛도 하나씩
건져가라.”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오염된 삶은 욕망의 충족을 추종하지만, 늘 목이 마르기 마련이다. 물은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질료(質料)이다. 순간 달콤한 음료는 목을 즐겁게는 해도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다. 순수한 물만이 인간성의 상실을 복원할 수 있는 원료이다. 초의 선사는 이런 물이 무한정 솟구치는 샘이 있었다. 누구나, 어느 때나 와서 마실 수 있다. 갈증을 해소한 자는 덤으로 ‘깨달음의 달빛’도 가져가게 된다. ‘one plus one!’
좋은 물을 고르는 안목은 차를 즐기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다사(茶事)에 밝았던 고려 말의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은 ‘찻물 샘(茶泉)’에 이런 시를 남겼다.
“松根去古蘇(송근거고소)
石眼溶靈泉(석안용령천).”
“오래된 이끼 속으로 소나무 뿌리 뻗었고
돌구멍으로 싱그러운 물이 솟아오르네.”
고송(古松)의 뿌리가 뻗은 곳은 맑고 청아한 물이 있음이요, 돌구멍에서 솟아오른 물은 석간수(石間水)로 최고의 찻물이자, 식수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갖춘 샘에서 솟아나는 물이라면 차의 맛을 충분히 살려 줄 것이다.
“久坐成勞永夜中(구좌성로영야중)
煮茶偏感惠無窮(자다비감혜무궁).
一盃卷却昏雲盡(일배권각혼운진)
徹骨淸寒萬慮空(철골청한만려공).”
“밤새도록 참선으로 피곤해진 밤에
차 달이며 무궁한 은혜를 느끼네.
한 잔에 혼미함이 다 걷히니
온몸에 맑은 (차의) 기운 퍼지자
모든 시름이 사라지네.”
수행승에게 있어 차의 음용(飮用)은 단순히 맛[味]의 추구가 아니다. 차는 치열한 수행을 위한 보조수단이다. 청아한 한 잔의 차는 용맹정진을 가능하게 해주는 피로회복제이다.
“茶者水之神(다자수지신)
水者茶之體(수자다지체).
非眞水 莫顯其神(비진수 막현기신)
非眞茶 莫顯其體(비진다 막현기체).”
“차는 물의 신(神)이요
물은 차의 체(體)이다.
좋은 물이 아니면 차의 신묘함이
드러나지 않고
좋은 차가 아니면
차의 근본을 엿볼 수 없다.”
소승은 영국의 유일한 조계종 사찰 연화사에서 잠시 주지를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중국의 보이차나 한국의 녹차를 맛보는 것은 아주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볼 일차 한국에 들어가는 신도에게 돌아오는 길에 마실 차를 구해달라 부탁했다. 아니면, 고국에 있는 도반들에게 국제적인 탁발을 했다. 차를 보내 달라고. 귀한 차를 구한 기쁨은 슬프게도 받을 때뿐이다.
영국에서는 모든 차 맛이 일미(一味)가 된다. 영국의 물은 석회질이 다량 포함된 물이기 때문이다. 차가 아무리 좋아도, 물이 받쳐주지 못하면 원재료의 차 맛을 느낄 수 없다. 반대로 물이 아무리 좋아도, 차가 좋지 않으면 향기로운 맛을 음미할 수 없다. 그래서 차를 즐기는 도반들은 좋은 물을 구하기 위해서 한두 시간 수고로움을 마다하고 운전을 해서 물을 길어온다.
추사는 초의 선사에게 많은 편지를 썼다. 척박한 제주도 유배지까지 찾아온 선사의 마음에 늘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靜坐處茶半香初(정좌처다반향초)
妙用時水流花開(묘용시수류화개).”
“고요히 앉아 차를 마시는데
반나절 후에도 그 향은 처음 그대로이고
묘한 마음을 쓸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듯하네.”
커피는 둘이 마시면 좋은 차요, 우리네 전통차는 혼자 마시기 좋은 차이다. 녹차는 처음에 맛으로 마시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향으로 음미한다. 마치 좋은 도반은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그 깊이를 알 수 있게 되듯이…. 마음 씀씀이는 물 흐르듯, 꽃이 피듯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작위적인 마음은 여운이 없이 사라지는 메아리이다. 인위적인 마음 씀씀이는 행위는 있으나, 인간적인 체취는 없는 건조한 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차를 마시는 행위는 단순히 시간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차를 통해 자아(自我)의 본질까지 추구하는 탐구의 시간이다. 차로 몸가짐을 다스리고, 그 행위는 선(禪)으로 향해 깨달음을 얻는 귀중한 시간이 된다. 끝으로 민족시인이자 애국시인인 노산 이은상의 차시(茶詩)를 감상해 보자.
“무등산 작설차를
돌솥에 달여 내어
초의선사 다법 대로
한 잔 들어 맛을 보고
또 한 잔은 빛깔 보고
다시 한 잔 향내 맡고
다도를 듣노라니
밤 깊은 줄 몰랐구나”
석두 스님
1998년 법주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봉암사 등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불광사, 조계종 포교원 소임을 역임했으며, 현재 봉은사 포교국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