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k yourself. Ask a Good Knowing Advisor
여러분이 영화 스님의 도량에 명상을 배우러 온다면, 여러분에게 가장 먼저 결가부좌 자세부터 알려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가부좌 자세만 고집한다고 생각하거나 결가부좌로 앉지 못하면 우리 도량에 올 수 없다고 말입니다. 사실 결가부좌 외에도 수행에서 진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진정으로 자세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어째서 결가부좌 자세로 앉을 수 없는 걸까요? 왜 불편한 자세를 거부하는 걸까요? 진정으로 자세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앉아도 괜찮고, 앉지 않아도 괜찮아야 할 것입니다. 안 그런가요?
게다가 여러분에게 충격적일 수 있는 소식도 하나 있습니다. 사실 결가부좌 자세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깨닫기 위해서 결가부좌 자세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결가부좌부터 가르칩니다. 왜일까요? 그건 결가부좌 자세에 여러 가지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상의 자세 중 결가부좌가 으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결가부좌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이 자세가 더 빨리 효과적으로 수행에서 진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이 자세로 계속 앉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어려운 자세로 앉기 시작하면 곧 자신의 추한 모습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결가부좌 자세와 같은 불편한 상황에 처하면 자동으로 피하고 싶어집니다. 우리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추한 생각과 모습을 위장해버립니다. ‘자세가 중요한가? 난 할 수 있는데 그냥 하기 싫은 거야!’ 이렇게 숨기고 위장하기 시작하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장한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믿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타인이 알거나 모르거나 그런 게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을 인정하고 정직해질 용기가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왜 거짓말을 했지?’, ‘왜 화가 났을까?’, ‘왜 마음이 불편할 것일까?’ 이런 마음이 자기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간단합니다. 아무것도 어려울 게 없습니다. 타인이 알든 모르든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집착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반대로 집착은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우린 보통 갖고 싶은 걸 얻지 못해서 불행합니다. 괴로워합니다. 집착은 괴로움의 한 형태입니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거기엔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걸 지혜라고 부릅니다.
정말로 집착이 없다면, 예전에 마음을 번뇌롭게 했던 그것이 있거나 없거나 더는 번뇌롭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집착의 원인을 찾고 그걸 떨어뜨리기 위해서 관(觀, 관은 또한 위빠사나이기도 합니다)을 하는 것입니다. 관조반야 속에서 그걸 합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피자에 집착이 큽니다. 그래서 피자를 먹고 싶은데 먹을 수 없거나, 맛없는 피자를 먹으면 큰 번뇌가 생깁니다. 만일 피자에 대한 집착이 더 없다면, 그건 앞으로 다신 맛있는 피자는 먹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으로 절대 피자를 먹지 않을거야”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집착을 떨어뜨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피자에 대한 집착이 없어. 다 내려놓았어”라고 말한다면, 내려놓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건 아직 집착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게 여러분의 아상입니다. 여러분의 아상이 ‘아! 난 이미 내려놓았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집착을 떨어뜨리지 못했는데 떨어뜨렸다고 억지로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에겐 스승이 필요합니다.
너도나도 불교 수행은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탐진치를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건 그냥 이론상 그렇습니다. 수행이나 명상을 하고, 선정의 각 단계에 도달하면서, 우리에겐 각각의 단계와 관계된 특정한 탐진치가 있습니다. 각 단계의 특정한 탐진치를 해결해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예로 명상, 요가, 절 같은 다양한 영적 수행법을 실행합니다. 그러면 욕계에서 초선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일시적으로 음식, 잠, 섹스에 대한 집착을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선의 경계에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이런 집착에 대한 노예이긴 하지만, 일시적으로 이 세 가지 문제를 떨어뜨렸습니다. 이 초선 경계에서 빠져나오면 다시 평범해집니다. 이렇게 초선에 들어가면 여러분은 어떤 특정 문제를 극복합니다. 그리고 다음 정진 기간에는 이선으로 올라갈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삼선과 사선엔 각기 더 강력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어떤 것도 우리에게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기통제입니다.
이런 설명도 사실 아직 이론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읽으면서 ‘맞아, 맞아’라고 동의할 수 있지만, 실제로 수행하면서 그걸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론과 수행은 다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음식, 섹스, 수면욕을 극복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론상으로 ‘난 뭘 해야 하는지 알아’가 아니라 미친 듯이 꼼지락거리고 좌충우돌하면서도 지침에 따라서 앉아서 명상하고, 괴로움을 견디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삼매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삼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삼매에 들어가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것은 그냥 이론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이치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어도 실행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훌륭한 선지식의 가르침이나 불교의 이론을 공부하면서 그걸 이해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읽으면서 바로 이해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면 안 됩니다. 성자의 훌륭한 가르침을 읽거나 들은 후 10년, 20년 계속 괴로움을 참으면서 실행해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르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아직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수행에서 변화를 원한다면 겸손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를 찾아가서 잘 물어봐야 합니다. 수행해서 이해하거나 알아낸 것을 말하지 마십시오. 대신 “나는 깨달음을 모릅니다. 아라한도 모릅니다. 그건 내가 있는 곳에서 아직 너무 멉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뭘 하면 지금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지 배우는 것입니다”라고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진정한 수행자라면 질문할 권리가 있습니다. “내가 다음으로 가려면 뭘 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주변 사람들이 지침을 받아서 최선을 다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받은 지침을 모두 실행했는데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지침이 명료하게 전달되지 못했다면 계속 물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귀중한 인생을 수행에 투자하길 원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달라고 용기있게 물어보십시오.
사진. 현안 스님
현안(賢安, XianAn) 스님
출가 전 2012년부터 영화(永化, YongHua) 스님을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매년 선칠에 참여했다. 2015년부터 명상 모임을 이끌며 명상을 지도했으며, 2019년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했다. 스승의 지침에 따라서 2020년부터 한국 내 위앙종 도량 불사를 도우며 정진 중이다.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에서 상주하며, 문화일보, 불광미디어, 미주현대불교 등에서 활발히 집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어의운하, 202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