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엔 방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좌선 또는 명상을 주 종목으로 채택한 것이 바로 선종입니다. 이 선종은 과거 대선지식들의 가르치는 방식에 따라서 5가지 법맥으로 나뉩니다. 이를 선종오가(禪宗五家)라고 부르는데, 여기엔 위앙종(潙仰宗),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과 법안종(法眼宗)이 있습니다.
이 다섯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위앙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앙종의 스승은 제자에게 온후하며 자상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가 부자처럼 친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드러난 한 단면만으로 평가한 것이며, 이들이 위앙종의 가풍에서 실제로 배우고 수련한 것은 아니니, 그 설명이 정확한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앙종이란? 남종선의 회양(懷讓, 677~744)의 계통에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가 선원에서 집단생활의 규범이 되는-후대에 ‘백장청규(百丈淸規)’라고 불린- 청규(淸規)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계통에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을 시조로 하는 임제종과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와 앙산혜적(仰山慧寂, 815~891)의 두 선승을 시조로 하는 위앙종(潙仰宗)이 성립했다.)
저도 위앙종의 가풍 속에서 훈련을 받고 있긴 하지만, 제가 본 것도 단지 일부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 스님이 제자들을 지도하는 것을 봐도 각 제자에 따라 대하시거나 훈련시키는 방법이 다릅니다. 영화 스님이 다른 제자에게 어떤 말을 했을 때, 제가 그 사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겪는 경험을 관찰할 뿐이지, 실제로 그 경험이 어떤지 내면에 대해선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앙종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아서 이 글에서 위앙종에 대한 일화를 소개해보기로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늘 친근하지만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옛 당나라 때 배휴 승상은 출가가 좋다는 것은 알았으나 승상의 책임이 있어서 직접 출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당시 선지식으로 알려진 위산 스님의 도량으로 보내서 출가하게 했습니다. 이 아들은 한림학사(학자)였습니다. 그건 지금으로 치면 국가 최고 대학교의 졸업생이었다는 뜻입니다. 위산 선사는 이 젊은 학자에게 ‘법해’라는 이름을 줬습니다. 아마도 뛰어난 학자이며 승상의 아들인 법해 스님이라면 뛰어난 지식, 능력, 인맥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산 스님은 그에게 큰 업무를 맡기거나 도량을 책임지게 하는 대신 매일 도량에 물을 길어오게 했습니다.
당시 위산 선사의 도량에 수천 명의 스님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 긷는 일은 매우 힘든 노동이었습니다. 그때는 상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우물까지 걸어가서 물을 통에 담아서 어깨에 지고 와야 했습니다. 법해 스님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대중이 새벽 예불하는 시간부터 물을 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물 긷는 일만 했습니다. 대중(도량에 상주하는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가서 물을 들고 올라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물을 낭비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법해 스님은 3년간 물 긷는 일을 했습니다.
법해 스님은 똑똑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도 아무런 지침도 받지 않았습니다. 불경을 읽거나, 좌선한 적도 없이 일만 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나요? 뛰어난 학자의 신분으로 그런 어려운 일을 한다면 억울하다고 느낄 수 있을 테지만, 법해 스님은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위산 선사는 심지어 3년간 그에게 말도 걸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밤낮으로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3년간 그만두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넌 물을 길어라”가 유일한 지침이었습니다. 영화 스님은 이것이 바로 위앙종의 훈련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에게 내려진 유일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니 법해 스님은 비범한 사람입니다.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禪)의 정신입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선 수행을 한다면 편안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서 수행할 기회가 있다면, 위산 선사가 법해 스님에게 준 지침처럼, 우리에게도 하기 어려운 일을 시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 어려운 과제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게 어렵고 번뇌로워도 그만두면 안 됩니다. 그만두지 않고 어려운 과제를 계속하려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번뇌를 놓아야 합니다. 번뇌를 버리지 않으면 그 일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법해 스님이 여가가 조금 생겼습니다. 법해 스님은 다른 스님들이 뭘 하고 있는지 호기심이 생겨 몰래 선당(선방)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스님들이 선당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스님은 머리를 숙이고 잠자고 있었고, 어떤 스님은 눈을 뜨고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법해 스님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물 긷는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데, 이 스님들은 낮잠이나 자고, 딴짓을 하는구나. 저런 스님들을 위해서 이렇게 일하고 있다니.’
그래서 법해 스님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됐습니다. 아마 법해 스님은 처음 물을 긷기 시작했을 때에도 마음속에서 하루 종일 불평했을 것입니다.
‘나는 승상의 아들이야. 학자야 그런데 난 온종일 물을 길어. 다른 사람들은 앉아서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아, 코나 골아대고.’
그는 매우 번뇌로웠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만두면 난 스승을 저버리고, 아버지도 저버리는 것이야.’
위산 선사는 이를 알아차리고 법해 스님을 방장실로 불렀습니다.
“넌 이 절에서 몇 년을 머물면서 출가 수행자들이 네 공양 받을 자격이 부족하다고 원망하는구나. 넌 이제 이 산에서 머무를 필요가 없으니 당장 행장을 꾸려서 다른 절로 가라.”
법해 스님은 이렇게 절에서 쫓겨나게 됐습니다. 법해 스님은 짐을 챙겨서 위산 영우 선사에게 고했습니다.
“선사님 전 가진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땅히 어디로 가야합니까?”
그때 위산 선사는 그에게 팔원 반의 돈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어디든 원하는 대로 가라. 어쨌든 8원 반의 돈을 다 쓰면 그곳에 머물러라. 만약 이 돈을 다 쓰지 못하면 머물면 안 된다.”
법해 스님은 가는 길에 감히 돈을 쓰지 못하고, 걸식하면서 호남성에서 강소성까지 걸어갔습니다. 그 후 진강을 경우 하면서 양자강 위에 작은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섬에 산이 하나 있는 것을 보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흔들어 뱃사공을 불러 강을 건너는 데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뱃사공은 공교롭게도 더도 덜도 아닌 8원 반을 요구했습니다.
법해 스님이 산에 도착해 보니 높지도 않고, 매우 그윽하고 조용하기에 그곳에서 머물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산에 동굴이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가 보니 항아리에 몇 개에 금이 담겨있었습니다. 처음엔 그 금을 나라에 바쳤는데, 황제가 절을 짓는 걸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산을 ‘금산(金山)’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금으로 절을 지어서 오로지 선 수행에만 몰두했습니다. 법해 스님의 이 ‘금산사(金山寺)’는 나중에 위산 선사의 절보다 더 크고 유명해졌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금산사의 수행 가풍이 매우 뛰어나서 역대로 많은 조사 스님이 배출됐다고 합니다. 그 당시 법해 스님은 아직 구족계를 받지 못해서 사미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개산의 조사가 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속에 위앙종의 훈련법이 있다는 건 모릅니다. 이것은 오직 위앙종에만 있는 훈련법입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어떤 수행법으로 참선하나요?”, “화두로 하시나요?”, “능엄주를 하는 게 나은가요? 대비주를 하는 게 나은가요?” 위산 선사는 법해 스님을 한 문장으로 가르쳤습니다. “물을 길어라” 위산 선사는 다른 지침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멋지지 않나요? 위앙종에서는 모두 밤낮으로 일합니다. 우린 번뇌로워하는 대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쉬지 않습니다. 스승님은 일을 잘 해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번뇌가 일어나면 삼켜버립니다. 그리고 또 일합니다. 그것이 우리 위앙종의 전통입니다.
화엄경에 이르길, 문수사리보살이 코끼리왕이 돌듯이 선재동자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선재 선재라. 선남자여, 그대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고, 또 모든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보살행을 물으며 보살도를 닦으려 하는구나. 선남자여, 선지식들을 친근(親近)하고 공경함이 온갖 지혜를 구족하는 첫째 인연이니라. 그러므로 이 일에 고달픈 생각을 내지 말지어다.”
*참고법문: 영화 선사의 ‘현명한 자와 멍청한 자’(2018년 1월 15일)
현안(賢安, XianAn) 스님
출가 전 2012년부터 영화(永化, YongHua) 스님을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매년 선칠에 참여했다. 2015년부터 명상 모임을 이끌며 명상을 지도했으며, 2019년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했다. 스승의 지침에 따라서 2020년부터 한국 내 위앙종 도량 불사를 도우며 정진 중이다.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에서 상주하며, 문화일보, 불광미디어, 미주현대불교 등에서 활발히 집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어의운하, 202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