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한번쯤 수덕사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고
평생 오지 않았던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붉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비록 이튿날 아침 깨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생에 하룻밤쯤 수덕여관 산당화에 기대어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맺은
열매에 다시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하략… )”
격동의 근대 수덕여관이 간직한 사연
여관(旅館), 외로운 나그네가 다음 목적지를 향하며 잠시 머무르는 공간이다. 근대 이전에는 주로 공적 기능을 지닌 역(驛)이나, 주막(酒幕)이 나그네의 쉼터였다. 교통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나그네의 공간으로 자리 잡은 곳이 여관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고 문화를 공유해 새로운 창조의 동기를 부여한 장소다.
충남 예산군 덕숭총림 수덕사 일주문 앞에서 작은 개울의 돌다리를 건너면 수덕여관(修德旅館)이다. 수덕여관은 1054m2(약 318평)의 터에 ㄷ자 형태로 지은 초가집이다. 예산군이 4억 원의 예산을 들여 방 7개와 툇마루, 온돌 등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인근에는 수덕사 선(禪)미술관이 있다.
수덕여관이 간직한 사연은 근대한국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부장적 중심의 남성 문화가 지배하는 근대기에 수덕여관은 자유로운 삶을 개척한 신여성들의 무대였다. 시대적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지만 근대화를 선도한 신여성들의 고통과 환희를 확인할 수 있는 상징적 공간이다.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은 대표적인 인물은 20세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근대여성 해방운동을 상징하는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일제 강점기 여성운동과 언론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김일엽(金一葉, 1896~1971) 스님도 있다. 동갑인 두 인물은 근대교육을 받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전개하고 불교에 귀의해 자유로운 삶을 도모한 공통점이 있다. 1930년대 후반 나혜석과 김일엽이 만나 진로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한 장소가 수덕여관이다. 이곳과 인연이 있는 또 한 명의 여성은 나혜석에게 그림을 배우고 수덕여관을 인수한 이응로(李應魯, 1904~1989) 화백의 부인 박귀희(1909~2001) 여사다.
김일엽 스님은 불가에 귀의해 출가 수행자의 삶을 살았고, 나혜석은 출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다 세상을 떠났다. 박귀희는 파리로 떠난 이응로 화백을 끝까지 기다리며 수덕여관을 지켰다. 김일엽 스님은 출세간에서, 나혜석과 박귀희는 세간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은 병든 몸이었지만 끝까지 자유를 갈망했고, 박귀희는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길을 걷다 세연(世緣)을 다했다. 누구의 삶이 옳았는지 제3자가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삶을 가꾸고 궁극적인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격동의 근대 한국, 삶의 길은 달랐지만 김일엽, 나혜석, 박귀희의 공통점은 ‘수덕여관’이다. 수덕여관의 원래 초가집이 언제 지어졌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1930년대 후반 나혜석이 김일엽 스님을 찾아와 이곳에서 만났으니, 최소한 90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 전부터 민가(民家) 또는 암자(庵子)로 이용했다는 증언을 감안하면 역사는 그보다 더 올라간다.
3인의 여성과 수덕여관
일제 강점기 용인 군수를 지낸 나기정의 딸인 나혜석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 교사를 지내고 예술가로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고, 경도제대 출신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해 프랑스 파리까지 여행했지만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남성 중심의 폐쇄적 봉건사회에서 버림받은 나혜석은 불교에 귀의하고자 수덕사에서 ‘고근(古根)’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러나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이 끝내 출가를 허락하지 않아 수년간 수덕여관에 머물렀다. 가끔 수덕사를 참배하고 그 밖의 시간에는 그림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수덕여관에서 <수덕사>와 <염노장>이란 작품을 그렸다. <수덕사>는 1940년 덕산면사무소 서기 고의화(高宜和) 씨에게 판매한 것으로 “자식들이 너무 보고 싶어 여비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팡이를 짚은 노(老) 비구니 정념(正念) 스님을 그린 <염노장>이란 그림도 남겼는데 두 작품 모두 수덕여관에서 탄생한 것이다.
한동안 수덕여관에 머물던 나혜석은 해인사와 다솔사 등 산사(山寺)를 전전해야 했다. 몇 차례 행방불명 끝에 1944년 서울 인왕산 청운양로원에서 ‘최고근’이라는 이름으로 발견됐고, 1946년 12월에는 한 행인의 등에 업혀 남부병원에 들어와 그해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다. 1998년 4월 20일자 「조선일보」는 “1948년 12월 서울 용산의 시립병원(자제원慈濟院)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고 보도해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숙제다. 관보 사망기록은 4281년(1948년) 12월 10일.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바라보는 김일엽 스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1959년 11월 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흘러간 별들’에서 일엽 스님의 회고를 청취한 기자는 이렇게 전했다. “애욕의 순례자이기도 한 나혜석은 사랑을 잃고 인생마저 잃어 몸부림치다 끝내 수도하는 일엽(一葉) 시인을 찾아 수덕사까지 와서 ‘비승비속’의 생활을 영위했으나 여의치 못하게 되자 그 후 해인사를 찾아 말년을 어렵게 보내다 그곳 땅속에 영원히 묻혔고….”
한편 수덕여관은 한국미술이 서구사회로 향한 전진기지이며 산실(産室)이었다. 나혜석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청년 화가 이응로가 이곳에서 그림을 배웠다. 전통적인 한국사상을 담아 창조적으로 계승한 작품으로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서양인들에게 호소력 있게 전하는 기반을 닦은 곳이 수덕여관이다. 이응로는 1944년 수덕여관을 구입해 작업실로 사용하고, 한국전쟁 때는 피난처로 삼았다. 「조선일보」는 1952년 10월 21일자 ‘이화백(李畵伯) 작품 감상회(鑑賞會)’ 기사에서 이응로 화백이 10월 15일부터 11월 15일까지 예산 수덕사 밑 자택에서 전시를 개최한다고 전했다. 여기서 자택은 수덕여관이다.
나혜석과 김일엽에 이어 수덕여관과 인연이 깊은 인물은 이응로의 부인 박귀희 여사다. 1959년 이응로 화백이 스물한 살 연하의 제자와 돌연 파리로 떠났지만 부인은 수덕여관을 지켰다. 동백림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서 구금된 이응로를 수발하고, 석방 뒤에는 수덕여관에서 정성을 다해 간병했다. 이때 이 화백이 수덕여관 너럭바위에 문자추상암각화를 새겼는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모습을 표현했다”며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몸을 추스른 이응로는 더 이상 수덕여관에 머물지 않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박귀희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수덕여관을 운영했다. 매정하게 떠난 남편을 기다릴 뿐 원망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숙박과 식당을 겸해 수덕여관을 지켰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 김일엽 스님, 나혜석과 달리 현실에 순응(順應)하는 전통적인 한국 여인으로 살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정한 마음과 정갈한 음식에 반해 수덕여관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예술인의 자취와 역사를 인정한 충청남도가 수덕여관을 도(道) 지정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하고, 2007년 보존상 문제로 전면 해체 복원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수덕여관 개축 당시 발견된 이응로의 습작 50여 점은 인근에 지은 수덕사 선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세간·출세간이 소통한 ‘역사의 정류장’
수덕여관은 1970~1980년대 전국에서 찾아온 불교인과 관광객이 주로 이용했다. 1970년 6월 2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즐거운 주말을 -장항선을 따라’라는 기사에서 수덕여관은 이곳을 대표하는 여관으로 등장한다. 그 무렵 수덕사 앞에는 수덕여관을 비롯하여 덕숭, 금강, 덕수, 서울, 별장 등 6개 여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덕여관과 덕숭여관은 격(格)이 높아 예약해야 이용 가능했다. 숙박요금은 1박에 1,500원과 2,000원, 3,000원으로 등급이 나누어져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국내 관광(觀光)이 본격화되면서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찾는 이들의 발길도 늘었다. 서산 서광사 주지 도신 스님은 “어린 시절, 어른 스님들을 모시고 수덕여관에서 공양하고 절에 방사(房舍)가 부족해 서울에서 온 손님들과 같이 잔 기억이 있다”면서 “전통적인 기품을 간직하고 있어 다른 여관과는 차별화된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수덕여관은 지금까지 격동의 한복판에서 다양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수덕여관과 인연 맺은 이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피안(彼岸)으로 사라졌다. 근현대 격동기를 거치며 한국 신여성의 환희와 아픔, 만남과 이별을 기억하고 있는 수덕여관. 성(聖)과 속(俗)이 교차한 공간이며,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이 소통한 ‘역사의 정류장’이었다.
정호승 시인의 <수덕여관>이란 제목의 시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일생에 한번쯤/ 수덕사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고/ 평생 오지 않았던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붉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비록 이튿날 아침 깨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생에 하룻밤쯤/ 수덕여관 산당화에 기대어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맺은 열매에/ 다시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하략…)”
사진. 유동영
이성수
동국대 대학원에서 「20세기 전반 유학승의 해외체험과 시대인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명대 겸임교수,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연구소 위원을 지냈고 현재 「불교신문」 기자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