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_프리다 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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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_프리다 칼로
  • 보일 스님
  • 승인 2022.03.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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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 그는 삶의 모든 고통과 운명과 예술을 정면으로 바라본 작가다. 

예술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을까. 2,500여 년 전, 괴로움을 완전히 없애는 길을 찾아 나섰던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깨달음을 통해 그 길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가 아닌 뭇 생명은 어떻게 괴로움을 이겨내고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뭇 삶들에게 살아있다는 건 여전히 그 자체로 고통이다. 고등동물이든 미물이든 마찬가지이다. 뭇 삶들의 수만큼 고통은 종류도 다양하고 그 깊이도 헤아리기 어렵다. 단지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 충족된다고 해서 괴로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물질적 풍요 속에서 맘껏 소비하고 안락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그건 잠시일 뿐, 결국은 다시 괴롭고 외롭다. 인간은 육체적 고통이 사라지면 이내 마음에서 비롯된 갖가지 속박 속에서 번민하게 된다. 때로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치고 힘들거나 외로울 때가 있다. 믿고 의지했던 신념의 붕괴,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회한 등으로 마음 아파하며 밤잠을 설치곤 한다.

여기 불의의 사고와 사랑의 배신 속에서 한평생 절망했고 고통받았지만, 예술을 통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걸었던 한 여인이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고통은 이 여인의 삶 전체를 들여다본다면 어쩌면 애교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불행을 견디며 살아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을까. 매일, 매 순간 상처받고 절망하면서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버텨야 하는 우리에게 이 여인의 삶은 위로이자 희망이다. 

“나는 죽지 않았어요. 살고 싶었고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 것이 끔찍하게 지루해서 무엇이든 해보기로 했습니다. 나의 그림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부서진 기둥(The Broken Column)>

 

‘평화’를 상징했던 그 이름

평생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 속에서 살다 간 여인, 바로 ‘프리다 칼로(1907~1954, Frida Kahlo de Rivera)’ 이야기이다. ‘프리다 칼로’라는 이름은 역설적으로 ‘평화’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의 일생은 전쟁과도 같았다.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그림은 인생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참호였다. 끔찍한 교통사고, 뒤이은 서른 번이 넘는 수술, 남편의 외도, 반복된 이혼, 세 번에 걸친 유산, 불행이 수도 없이 그녀의 삶을 할퀴고 지나갔다. 

평범한 사람이 일생에 한 번도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그녀에게 모두 일어난 것이다. 저주와도 같은 불운이 그녀의 삶에 집중된 것만 같았다. 6세 때 이미 소아마비 진단을 받았고, 꽃다운 청춘 18세에는 쇠창살이 몸을 관통하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로 인해 왼쪽 어깨와 오른쪽 발은 으깨어졌고 다리는 산산조각이 났다. 갈비뼈, 골반과 척추 세 군데가 부러지는 등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게 되었다. 사실상 목숨을 건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지지대를 통해 몸을 지탱했고,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침대의 캐노피에 거울을 달고 자화상을 그리기까지 했다. 온몸이 부서졌고 붓을 드는 게 신기할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병상에 있는 동안, 애틋했던 첫사랑마저도 떠나보낸 프리다 칼로는 더욱 외롭고 서럽게 혼자만의 아픔과 열정을 침대에 누운 채로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그녀의 1944년 작품 <부서진 기둥(The Broken Column)>을 보면, 고통과 삶에 대한 의지가 동시에 잘 드러난다. 교통사고로 갈기갈기 찢기고 무너져 내린 신체를 신전의 기둥처럼 생긴 척추가 지탱하고 있지만, 그 기둥마저 여기저기 금이 가 있어 위태롭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하다. 다만 붕대처럼 동여맨 보호대만이 간신히 그녀를 버텨내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얼굴과 몸 전체에 크고 작은 못들이 박혀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린다. 배경으로 삼은 황량한 들판이 쓸쓸함을 더한다. 

프리다 칼로는 이 그림에서 자신이 겪는 극한의 고통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너무나 솔직하다 못해 마치 고통의 화신이 되어버린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프리다는 이렇게도 살아내고 있음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비탄과 좌절만이 아닌 의지와 희망도 공존한다. 프리다 칼로는 사고 후 회복과 재활에 전념했고, 기적적으로 다시 걷게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후유증은 평생 그녀를 괴롭혔다. 그러던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온다. 디에고 리베라. 

“나는 일생 동안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열여섯 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이다. 두 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두 명의 프리다(The two Fridas)>

 

사랑보다 깊은 배신감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는 프리다 칼로의 마음에 뜨거운 인두로 새긴 화인(火印)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칼로는 21세 연상의 화가인 디에고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또한 그 사랑의 깊이만큼 철저히 배신당했다. 디에고와의 질긴 인연은 두 번의 이혼과 재결합을 반복하면서 이어졌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를 디에고 리베라는 아직 어린 티가 여전한 프리다 칼로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돌한 태도와 특별한 분위기에 반하게 된다. 그녀의 총명함과 솔직함과 젊음에 매료된 디에고 리베라는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다. 

프리다 칼로는 열성적인 스탈린주의자였던 어머니의 영향과 디에고의 영향까지 받아서 혁명가 기질이 다분했다. 지금도 하나의 설로 남아있지만, 사회주의 혁명의 권력 다툼을 피해 멕시코로 망명했던 레프 트로츠키와의 염문설도 충분히 상상이 가는 대목이다. 문제는 이 디에고 리베라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바람둥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프리다 칼로는 사랑의 힘으로 세 번에 걸쳐 임신을 시도한다. 교통사고로 몸은 이미 망가져 있었고 의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세 차례에 걸친 유산이었고, 다시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그녀를 옥죄었다. 그 과정에서도 디에고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웠다. 급기야는 프리다인 여동생과도 외도 행각을 벌인다. 결국, 프리다 칼로는 참다못해 이혼을 결심한다. 그래서였을까. 프리다 칼로는 더욱 그림에 몰입했고, 그 모든 아픔과 절망을 캔버스에 그려 넣기 시작한다. 그간 멈췄던 작품활동을 재개하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1939년 작품 <두 명의 프리다(The two Fridas)>는 프리다 칼로가 디에고와 이혼을 결심하는 과정에서의 정신적 고통과 혼란을 표현하고 있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을 멕시코 전통의상과 현대적인 의상을 입고 있는 두 자아로 대비시켜 내면의 갈등과 아픔을 묘사한다.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프리다의 심장은 찢겨 피가 흐르고 있고 멈추지 않으면 곧 위험해질 것이다.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오른쪽 현대적인 복장의 프리다는 건강한 심장이 뛰고 있으며, 건강해 보인다. 프리다 칼로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자신의 고통과 운명과 예술을 똑바로 정면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는 피하지 않겠다고,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살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것을 선언하는 듯하다.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서도 자신을 고통에서 지켜내겠다는 의지와 따뜻한 위로가 느껴진다. 그래도 여전히 먹구름과 같은 배경은 언제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칠지 모를 긴장감이 서려 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고독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사람이 어떻게 그 벽을 넘어서는지를 알 수 있다. 

<인생 만세(Viva la Vida)>

 

참혹한 현실에서 시작하다

누구나 위험과 두려움이 생기면 회피하거나 외면하려 한다. 누군가에는 현실은 행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 그 자체가 악몽이기도 하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프리다 칼로는 이렇게 반박했다. 

“사람들은 나를 초현실주의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꿈을 그리지 않았다. 나는 바로 나의 현실을 그렸다.”

아마도 이러한 시각차는 자신만의 인생 경험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되 너무나 적나라한 사실이어서 오히려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작품들이 가진 고유함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의 그림이 꿈인 듯 환상인 듯 보였을지 몰라도 그녀는 삶의 고통 그 자체였다. 고통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더욱 슬프고 아름답다. 그녀가 남긴 그림은 자신의 고통을 열정으로 활활 태워 우리를 위로한다. 삶은 그런 거라고, 자신은 알고 있다며 위로하는 듯하다. 1954년 7월 13일, 그녀는 죽음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이름인 ‘평화’를 얻는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그녀의 삶은 슬프다 못해 서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8일 전에 완성한 마지막 작품 <인생 만세(Viva la Vida)>. 프리다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수박 그림 속에 “Viva la Vida”를 적어 두었을까. 

프리다는 한창 디에고와 사랑에 빠졌을 때 밝힌 자신의 소원은 단 세 가지라고 말했다.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마지막으로 혁명가가 되는 것이었다. 세 가지 소원 중에는 이룬 소원도 있고 이루지 못하거나 이룰 수 없는 소원도 있었다. 세상 살면서 하고 싶은 대로 마음먹은 대로 다 되겠는가. 모든 것은 변하고 그 변화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한다. 그런데도 프리다 칼로는 “인생 만세”를 외치며 원망스럽고 비루한 삶이더라도 살아내야만 하는 가치가 있다고 말해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조금만 힘들고 불편해도 엄살을 떨기에 바쁘고, 심지어 삶이 지겹다거나 권태롭다는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기도 한다. 그러면서 또 시간을 낭비한다. 그럴 때마다 여기 프리다 칼로의 삶과 예술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그림에서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걸었던 한 인간의 장엄한 삶에 대해서 말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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