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모습의 지장
너희는 알아두어라. 이름을 지장이라고 하는 보살마하살이 있다. 그는 이미 과거의 무량무수한 대겁에 오탁악세의 무불세계에서 끊임없이 중생들을 성숙시켜 왔는데, 이제 그가 바로 팔십백천 나유타의 보살들과 더불어 여기에 와서 나에게 친근 공양하고, 아울러 이 큰 모임의 대중들과 함께 수희하기 위해 그의 권속들을 대성문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신통의 힘을 나타냄이니, 이야말로 지장보살마하살의 그 헤아릴 수 없는 수승한 공덕을 장엄한 것이다.
__ 『대승대집지장십륜경』 중에서
지장보살은 왜 다른 모습일까
사찰을 방문하면 종종 ‘왜 지장보살만 다른 부처님과 보살들과는 다른 모습이지?’하고 의문이 드는 경우가 있다. 지장보살이 스님의 모습을 하는 데에는 붓다가 지장보살을 ‘사문의 형상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붓다의 설명은 지장보살의 구도자적 자세와 수행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불화와 조각에서 접하는 지장보살은 민머리의 성문(聲聞)형 이외에도 석장(錫杖 혹은 육환장)과 여의보주를 들고 있다. 이 지장보살의 지물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먼저 여의보주는 『대방광십륜경』에서 ‘지장보살의 손에 여의주(如意珠)가 들려있다’는 구절을 근거로 지장보살의 지물로 정착했다. 그렇다면 석장은 어떠한가. 미리 답을 하자면, 도상적 근거는 지장삼부경을 비롯한 경전에서 찾을 수 없다. 석장을 지닌 지장보살상은 멀리 둔황 막고굴 벽화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중국에서 석장을 언급한 기록은 『환혼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환혼기』에는 당나라 양주 개원사 승려 도명(道明)이 저승에 가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돌아와 지장의 모습에 대해 “…석장의 금환을 울리며 운수행각을 하고 있었다”라고 묘사한 데에서 유래한다. 이후 지장보살의 지물은 일반적으로 석장과 여의보주로 정착했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문헌상, 『삼국유사』 「관동풍악발연수석기」의 “지장보살이 와서 손으로 금석장(金錫杖)을 흔들며 가지를 주니 손과 팔이 회복됐다”와 『송고승전』의 「진표전」에서 “지장보살이 현신하여 손으로 쇠로 된 석장(錫杖)을 흔들면서…”에서 처음 등장한다. 지장보살이 치료의 역할을 담당하고, 이때 사용한 지물이 석장으로 등장한다. 치료와 관련해 석장의 유래는 진흥왕 대에 신라에 유입한 것으로 판단하는 『관정경』에서 찾기도 한다. 『관정경』에는 병을 치료하는 법사의 지물로 우권구마(牛卷驅魔)라고 하는 지팡이가 필요한데, 이 지팡이가 지장보살의 상징으로 굳어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고려불화 속 지장보살
고려시대에 제작된 지장보살도는 독존도 11점,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과 함께 그린 병립도 4점, 삼존도와 시왕권속도 등 10점, 총 25점이 전하고 있다. 독존도는 지장보살만을 그린 것으로 입상(11점)과 좌상(2점) 모두 존재한다. 이들 독존도 대부분은 현 소재지가 일본 네즈 미술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 해외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만나보기 어렵다. 우리가 사찰의 전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장시왕도 등은 고려시대의 지장도에서 확대 변화하기 때문에 고려불화 속의 지장보살도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먼저, 지장독존도는 모두 지장보살이 연화족좌 위에 서서 한 손에는 운수납자를 상징하는 석장을, 다른 한 손에는 여의보주를 들고 있다. 얼굴은 정면을 보고 있지만, 몸과 발을 살짝 옆으로 비틀어 바로 이동할 것 같은 역동성을 보여준다. 이는 지장보살이 얼굴의 정면성을 통해 예배의 대상임을 알려주고, 몸의 방향을 통해 구제할 대상이 있으면 어디든 가서 구제한다는 구제자의 성격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다. 예배의 대상과 구제자의 모습은 비단 지장보살뿐 아니라 아미타내영도, 관음보살도(입상) 등 고려불화의 전반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지장독존도 좌상의 경우 그림 1의 <노영 필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 예배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하단에 위치한 부분도와 일본 양수사(養壽寺) 소장 2점이 전한다. 이들 불화 모두 지장보살이 반가부좌를 하고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을 취한다. 지장독존도 좌상은 구제자의 모습보다 전각 안의 예배 대상으로의 의미 변화를 말해준다. 실제 지장독존도는 삼존도, 지장시왕도, 지장시왕권속도 등 아미타불의 협시가 아닌, 독립된 예배 존상으로 확대·정착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가 사찰에서 지장전, 명부전 등 독립된 신앙공간 속에서 지장시왕도와 지장시왕권속도를 접할 수 있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지장병립도는 관음·지장병립도 3점(일본 서복사西福寺·남법화사南法華寺 소장, 한국 개인 소장)과 그림 2의 <아미타·지장병립도>(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1점이 전한다. 병립도 안의 두 존상은 서로 대등한 관계며, 도상의 크기 또한 비등하다. 관음과 지장 두 보살을 병립하는 것은 중국 양나라(502~557) 시기부터로 추정하는데, 문헌적 근거가 되는 것이 『대방광십륜경』이다. 다만 이때의 지장은 현세 구제를 의미하지만, 14세기에 제작된 고려불화 속 관음과 지장은 일반적으로 ‘현세(관음)와 내세(지장)’의 의미로 구분한다.
반면 〈아미타·지장병립도〉는 고려불화 안에서도 ‘불과 보살의 병립’이라는 파격성을 가지는 불화다. 연구자에 따라 부처님과 보살을 대등하게 볼 수 없으므로 아미타내영도처럼 관세음보살이 따로 제작됐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병립도의 도상 역시 지장독존도 입상과 유사해 구제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된 모습이다.
고려불화 속 지장삼존도(일본 원각사圓覺寺, 한국 개인 소장)는 좌우협시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배치했다. 여기에 제석·범천과 사천왕을 추가한 <지장보살도>(리움미술관 소장)와 지장도에 시왕과 판관·녹사 등을 추가한 지장시왕도, 지장시왕도에 선업동자(善業童子)와 마우·우두 등의 지옥의 옥졸들을 추가한 지장시왕권속도 10여 점이 전한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장보살도는 사천왕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명부신앙과 결합해 시왕의 역할이 강조되기도 한다. 또는 지장시왕도에 육보살을 더하는 등 도상 속 등장인물들의 변화가 감지된다.
고려 지장보살도 도상은 대체적으로 상하의 구분이 명확한 2단 구도를 취한다. 소재는 비단에 붉은색, 녹청색, 군청색을 주조색으로 중간톤의 채색과 함께, 문양과 필선 등에 금니를 사용해 윤곽선을 나타냈다. 조선에 이르면 비단이나 마(麻) 등의 소재를 바탕으로 금니 사용보다 녹색과 붉은색을 주조색으로 해서 좀 더 밝은 화면구성을 한다.
고려 지장보살도는 상호 표현, 채색의 운용, 문양의 형태와 시문 위치, 의습선 처리 등 표현과 기법면에서 유사성을 지적받는다. 예를 들어 지장보살의 상호들은 먹선 위에 붉은색으로 다시 필선을 그리고, 손바닥에는 금니 법륜(法輪)과 투명한 보주를 그려 넣었다. 지장보살의 동일한 팔찌 모양과 두건에는 금니 원문과 연주문을, 가사 바탕에는 금니 연화당초원문과 국화문을 공통적으로 그려 넣었다. 때문에 고려불화, 혹은 고려 지장보살도의 제작자들이 동일한 공방이나 인근 지역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불화·불상으로 본 두건지장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지장보살도의 경우, 성문형이 아닌 두건을 쓴 두건지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모습은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이마 부근에 다른 긴 끈으로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두른 후 양 귀 위에서 매듭을 맺은 후 다시 귀 뒤쪽으로 넘어가 어깨까지 늘어뜨린 모습이 일반적이다. 두건지장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사례를 찾기 힘들고, 한국에서도 여말선초라는 아주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불화와 조각을 제작했다. 두건지장의 원류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판과 중국의 돈황, 사천성, 운남성 지역으로 보고 있다.
두건지장의 한반도 유입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여기에서는 두건지장의 유입과 관련한 몇 개의 의견을 소개하겠다. 먼저, 두건지장이 중국 본토가 아닌 변방에서 조성됐다는 점에 착안한 설이다. 중생제도를 위해 옥외를 오랫동안 보행하는 지장보살의 성격상 변방에서 두건을 쓴 두건지장을 제작했고, 중국 장안을 위시로 한 중앙에서는 예배의 대상으로서 성문형 지장을 제작했다고 보는 의견이다. 다른 의견으로는, 중국 사천성 대족(大足)이나 운남성 등지에 두건도상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중국 강남을 통해 고려에 유입됐다고 보는 의견과, 티베트와 고려의 외교관계를 통해 유입됐다고 보는 의견, 고려 이전에 돈황에서 직접 유입됐을 것으로 보는 의견 등이 있다.
불상에서도 두건지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 낭산 마애삼존불상,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 영암 월출산 용암사지 금동지장보살좌상 등 불화보다 더 쉽게 두건지장을 접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은 단아한 둥근 얼굴과 목에서 어깨로 내려가는 부드러운 선, 상·하체의 균형감, 지물의 표현 등으로 미루어 제작 년대를 고려 후기로 보고 있다. 도솔암 지장보살상은 선운사 금동보살좌상(보물)과 두건을 쓴 모습, 목걸이 장식, 차분한 가슴표현 등에서 유사성이 제기되지만, 두건을 착용하는 방법이 이마에 두른 띠가 좁아지고 귀를 덮어 내리지 않은 상이성 때문에 다른 유형으로 보고 있다.
도솔암의 경우, 고려시대 지장보살도에서 자주 보이는 반가부좌 상태에서 결가부좌로 바뀌었으며, 발을 올린 오른발의 모습이 사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불상이다.
수인은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들어 작은 수레바퀴 모양의 물건을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려불화에서 자주 보는 석장과 여의보주를 들지 않는 도상적 특징을 가진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1476, 국보)는 고려불화의 양식과 조선불화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시각적 자료다. 이 벽화에서 지장보살은 주존이 아닌 아미타여래의 오른쪽(관람자의 입장에서 왼쪽)에 협시불로 등장한다. 지장보살의 위치는 항상 아미타여래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고려 지장병립도에서도 항상 동일한 위치에 배치한다. 벽화 속의 지장보살은, 두건을 쓰고 석장과 여의보주를 든 고려불화와 유사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무위사 벽화는 지장과 관음보살이 아미타여래의 어깨선까지 올라오고, 화면 상단 좌우로 각각 3인의 나한이 배치돼 고려불화의 2단 구도가 깨지기 시작하는 작품이다. 이후 제작된 조선 지장시왕도들은 권속을 상향 배치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도상으로 변모한다.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와 동일한 원형 구도를 취하고 있는 고려불화로는 일본 지은원(知恩院) 소장 지장시왕도(1320)나 화장원(華藏院) 소장 지장시왕도, 여전사(與田寺) 소장 지장보살도 등이 있다.
사진. 유동영
지미령
한예종 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일본 미술을 독특한 시각으로 연구하며, 아시아의 불교미술 교류에 관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