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는 4대 불교성지로 불리는 산이 있다. ‘보현보살의 성지’ 아미산, ‘문수보살의 성지’ 오대산, ‘관세음보살의 성지’ 보타산이다. 나머지 한 곳은 어딜까? ‘지장보살의 성지’ 구화산이다. 구화산이 지장성지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가진 까닭은 신라 왕족 단 한 사람의 영향력이다. 바로 중국이 ‘지장보살의 화신’이라 추앙하는 지장(地藏) 김교각(金喬覺, 696~794)이다.
김교각은 훗날 성덕왕이 된 김흥광의 아들로 알려졌다. “세상에 유가(儒家)의 육경과 도가(道家)의 삼청 법술이 있지만 불문(佛門)의 대의가 마음과 맞는다”라고 했던 김교각은 구법의 길에 오른다. 반려견 선청(善廳)을 데리고 당나라 땅을 밟은 그해가 719년, 24살 때였다.
김교각은 안휘성 구화산으로 들어갔다. 고승 533명의 전기를 수록한 『송고승전』에 따르면, 현재의 화성사 동쪽 골짜기 절벽의 동굴에서 흰 흙과 약간의 쌀을 섞어 먹으며 정진했다. 이 같은 정진에 감복한 사람들이 절을 지어 시주했는데, 화성사다. 점점 김교각의 법력이 높다는 명성이 널리 퍼지자, 바다 건너 고국인 신라는 물론 중국 각지에서 찾아와 그에게 법을 구하기도 했다.
이 무렵, 김교각에게 깊이 감명받은 이가 있었으니 민양화와 그의 외아들 도명이다. 김교각에게 매일 가르침을 받던 도명은 부친 민양화와 함께 김교각을 친견했고, 민양화 역시 법문에 깊이 감화된다. 시주의 의사를 밝힌 그에게 김교각은 몸에 걸친 가사로 덮을 만한 땅을 시주하면 절을 짓고 불법을 더 널리 펴겠다는 뜻을 전한다. 김교각의 가사는 구화산 전체를 뒤덮었고, 이에 민양화는 구화산을 시주했다고 한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지만, 얼마든지 시주하겠다는 민양화의 깊은 불심 그리고 그를 불법으로 안내한 김교각이 아니었다면 생기지 않을 전설인 셈이다. 그렇지않고서야 민양화와 그의 아들 도명을 김교각의 등신불 협시보살로 조성하고, 구화산 입구에 99m 지장보살상을 만든 중국인들의 믿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럼 언제부터 김교각은 ‘지장보살의 화신’이 됐을까? 99세로 입적한 그해로부터 3년 뒤, 그의 입적은 하나의 전설로 기록된다. 그는 “내 육신을 다비하지 말고 3년 뒤 열어보아 썩지 않았으면 개금하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제자들은 스승의 유언대로 3년 뒤 육신을 모신 고탑 안 돌 항아리를 열었는데, 살아있는 듯 안치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지옥을 비우지 않고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그의 서원과 삶이 지장보살의 대원(大願)과 같았고, 후세는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등신불은 현재 안휘성 구화산 호국월신보전 목탑에 안치돼 있다. 2004년 장쩌민 주석이 시찰할 정도로 유명한 성지다.
‘지장보살의 화신’이라는 추앙은 시성(詩聖, 역사상 뛰어난 시인) 이백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백은 “보살님 대자대비의 힘 끝없는 고해에서 구해줄 수 있나니. 홀로 오래고 오랜 겁을 지내며 고해를 소통시켜 중생을 구해주는데 이 모든 것은 지장보살의 덕성”이라고 찬탄했고, 근현대 중국불교사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홍일 대사는 “험한 물결, 거센 바람, 대자대비한 일생,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살으셨다”고 평했다.
한국에는 2007년 동국대 경주캠퍼스 정각원에 김교각 입상이 봉안돼 있고, 유물 200여 점이 남양주 백천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