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과 에크하르트, 마음챙김으로 여는 일상의 구원
저작·역자 | 브라이언 피어스 지음
박문성 옮김 |
정가 | 22,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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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21-12-31 | 분야 | 종교일반 |
책정보 |
판형 신국판 (152×225mm)|두께 22mm 464쪽| ISBN 978-89-7479-987-8 (03200) |
종교간 대화를 통해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했다고 한 저자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 전통에 잠들어 있던 보석 같은 가르침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 불교도들은 마음챙김이라는 익숙한 수행이 불교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타당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챙김 수행이야말로 해탈로 가는 여정의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책 전반에 흐르는 두 종교의 조용하고 평온한 어울림은 자신과 다른 것에 마음을 여는 ‘관대함’ 덕분이다. 두 영성가의 지혜와 깨달음이 담긴 아름다운 언어들은 우리를 단순히 도량 넓은 인간이 아니라 균형 잡힌 인간으로 이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그리스도교와 불교도만이 아니라 분열과 다툼, 갈등으로 메말라가는 현대 사회를 구원해줄 깊은 물줄기가 되어 줄 것이다.
■ 저자 소개
브라이언 피어스 (Brian J. Pierce)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제도의 도미니코 가족수도회의 성소 담당자, 도미니코 관상수녀회 총장의 지도신부였다. 이후 전임 순회 설교사로 돌아왔다. 가톨릭과 불교, 두 종교의 영적인 생각과 지혜를 하나로 묶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2005년 출간한 이 책을 통해 종교간 대화가 서로의 목표와 영적 실천을 더 풍부히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저서로 『예수와 탕자 : 전적인 자비의 하느님(Jesus and the Prodigal Son: The God of Radical Mercy)』이 있다.
■ 역자 소개
박문성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9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국인이 가진 종교적 심성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1998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에 학부 편입, 2007년 논문 「『깨달음 달의 출현』의 해탈관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가톨릭대학교 동양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2007년부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위원회 위원으로서 종교간 대화에 참여해 왔으며, 2019년부터 동 위원회에서 총무를 맡고 있다. 역서로 『산스크리트어 통사론』이 있다. 약 15년간 번역에 매달린 이 책은, 불교경전 연구에 필수인 산스크리트어 문법서로, 타 종교의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서로의 진리를 평화롭게 나눌 수 있다는 평소의 신념이 담겨 있다.
추천사
한국어판 추천사
감사의 말
머리말
제1장. 관대함
1. 대화의 음악
2. 관대함의 실천
3. 대화의 위험
제2장. 마음챙김과 영원한 현재
1. 지금 이 순간
2. 귀향
3.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있다
4. 봄으로서의 깨어 있음
제3장. 성령의 숨결
1. 숨쉬기를 다시 배우기
2. 하느님 마음에서 흘러넘치는 생명수
3. 다양한 소리, 그러나 하나의 성령
4. 사랑의 마음
제4장. 물과 물결
1. 물에 흠뻑 젖은 근거
2. 바다의 물 한 방울
3. 세례와 살아 있는 물
4. 이름을 부름
5. 의지 또는 은총
6. 성사
7. 물 만지기, 하느님 만지기
제5장. 예수와 하느님
1. 사랑의 순례로서 삼위일체
2. 삼위일체와 상호의존적 존재
3. 위대한 숨
제6장. 그리스도
1. 은총
2. 하느님의 말씀
3. 붓다의 몸, 그리스도의 몸
4. 성체
제7장. 고통
1. 사성제(四聖諦)
2. 이욕(離欲)
제8장. 고통에서 오는 연민
1. 깊이 들여다보기
2. 연민, 위험을 무릅쓴 사랑
3. 사랑의 실천
제9장. 십자가라는 나무
1. 자유로 가는 길
2. 생명의 나무인 십자가
3. 십자가의 형상
4. 그는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제10장. 활짝 피어오른 사랑
1.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기
2. 비폭력적 사랑의 십자가
3. 무엇이든, 단지 있다
4. 평정심과 십자가
5. 옆으로 누워 있는 붓다
맺음말 : 여정과 발우
옮긴이의 말
미주
신은 누구인가? 신은 어디 있는가?
신은 어떻게 고통을 치유하는가?
그리고 구원은 무엇인가?
인류의 오래된 질문, ‘마음챙김’으로 답하다!
“모든 종교의 뿌리에는 하나의 수맥이 흐른다.” 종교간 대화를 통해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 진지하게 접근하면, 그 이웃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내 종교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는 종교간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풍요로운 결실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저자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는 틱낫한 스님이 설명하는 마음챙김 수행에 주목하는 한편, 불교의 마음챙김 수행을 연상시키는 ‘깨어있음’이라는 신앙적 실천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특히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목표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종교간 대화라는 관점에서 불교의 마음챙김과 그리스도교의 ‘깨어있음’을 비교하고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의 ‘깨어있음’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할 것과, ‘깨어있음’을 일상의 영성생활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이 책은 그것이야말로 우리들 자신의 삶으로 예수를 부활시키는 길이고, 제도권 교회에 갇혀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참된 생명력을 불어넣는 길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느님이 누구이고 어떻게 이 현실에 역사하는지에 대한 답변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된다. 영원한 하느님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만 현존한다. 우리는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실천함으로써 그러한 하느님과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을 통해 우리는 분열된 세계의 일치를 이루어 낼 수 있고, 서로의 경계를 초월한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으며, 불가항력적인 고통 속에서도 평정을 누릴 수 있다. 우리의 삶을 구원하고 우리의 시대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열리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과 불교도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다. 저자는 종교간 대화에 참여함으로써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했다고 고백한다. 저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 전통에 잠들어 있던 보석 같은 가르침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발견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도들은 이 책을 통해 마음챙김이라는 익숙한 수행이 불교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타당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챙김 수행이야말로 해탈로 가는 여정의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이웃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내 종교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는 대담한 여정
이 책의 저자인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Brian J. Pierce) 신부는 틱낫한 스님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된 불교 전통의 수행인 마음챙김(mindfulness)에 주목한다. 마음챙김 수행에서 영감을 받은 저자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여러 가르침, 특히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부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적 “깨어있음”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영성생활의 길을 찾아 나선다.
예수는 악마에게 사로잡힌 딸을 치유해 줄 것을 청하는 이방인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종교와 전통이 다른 이방인과 대화하는 것은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규범에 위배되는 것이었지만, 예수는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저자는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이 일화를 예수가 몸소 보여준 좋은 대화의 사례로 든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본래 있던 대화의 정신은 한때 희미해지기도 했으나 현대에 들어와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교회가 선포한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 우리시대」에 보이는 이웃 종교에 대한 존중의 태도로 부활한다. 그리고 40년 후,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종교간 대화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조하기에 이른다. 가톨릭 신부인 저자는 자신이 속한 전통 안에 숨 쉬고 있었던 이러한 대화의 정신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라는 범주를 넘어 불교의 가르침에 접근해 간다.
마음챙김으로 재발견하는 그리스도교의 ‘깨어있음’
틱낫한의 가르침을 통해 저자는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 수행을 발견한다. 마음챙김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일상의 매 순간을 생기 넘치고 깊이 있게 사는 것이다. 마음챙김을 통해 삶을 성심성의껏 살아가면 참된 삶을 맛볼 수 있다. 이것이 삶에서 일어나는 참된 기적이다.
불교의 마음챙김 수행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깨어있음’이 갖는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을 돕는다. 그리스도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깨어있음을 설명한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구원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취한 강생(降生)의 신비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깨어있음이다.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 그리고 신랑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열명의 신부들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 또한 이 깨어있음이다. 현대의 영성가인 토머스 머튼 또한 깨어 있으면서 주시하는 것이 영성생활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에크하르트는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민첩한 인식’이라고 부른다.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모든 일에서 자기 자신과 자기 내적 존재에 대한 민첩한 인식”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집중하여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인지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지금 이 순간에 숨겨진 경이로움을 보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오늘을 무엇이라 말할까?”라고 자문하고 “영원”이라고 답한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하느님이 영원이다. 바로 이 순간이 영원한 현재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과 공간은 오로지 지금 여기뿐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의 ‘민첩한 인식’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깨어있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
잠든 사람은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예수가 죽은 뒤 걱정과 슬픔에 사로잡혀 엠마오 마을로 가던 예수의 두 제자가 그들이 만난 나그네가 예수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삶의 온갖 걱정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도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 있는 하느님을 만날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성심성의껏 살아감으로써 참된 자기를 발견할 때 은총을 받게 된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두 제자는 자문한다. “우리의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예수의 두 제자의 마음속에 타올랐던 불길, 즉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만남은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항상 타올라야 한다. 그때 하느님 나라는 먼 곳에, 혹은 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존하면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즉 “하느님 나라는 바로 지금이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는 ‘이런 이런 것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윤리적 계명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 결과 영성생활이 즐겁고 마음 벅찬 삶의 한 형태임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의 깨어있음을 실천한다면, 즉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항상 인식하며 살아간다면 활기찬 영성생활을 되살려낼 수 있다.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의 힘 1 : 분열된 세계가 일치에 이른다.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머무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경험하며, 이때 우리에게 성령이 강림한다. 성령은 모든 것을 완전히 살아 있게 하고, 완전히 실재하고 하고,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성령은 분열된 세계를 하나로 일치시킨다. 성령이 이룩한 조화와 평화 속에서 우리를 서로 갈라놓는 경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행전 4장 32절)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아는 그 사람만이 평화를 안다.”
성령의 힘이 이루어 낸 일치 속에서 우리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병에 걸린 채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고통받는 이의 비참한 모습이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나를 모욕하고 해치려는 이의 분노에 찬 얼굴이 그리스도의 얼굴임을 본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체입니다.”(1코린토 12장 27절) 이러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하게 된다.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은 사랑의 마음에서 하나가 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는 매 순간이 성령에게 개방된 순간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이 일상에서 역사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랑은 성령이다.”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의 힘 2 : 고통을 무릅쓴 사랑을 감행한다.
틱낫한은 마음챙김의 한 형태인 ‘깊이 들여다보기’를 실천하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집중된 상태에서 사물 또는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정서적 색안경을 벗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깊이 들여다보기’를 행할 때 우리의 눈은 기만과 이기주의와 죄로부터 치유된다. 그리고 비로소 하느님의 눈 부신 빛으로 이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눈으로 이웃의 고통을 들여다볼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연민이 싹튼다. 누군가에 대한 연민의 마음 갖고 산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고통을 수반할 가능성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에 따르는 고통이야말로 연민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다.
예수의 삶은 고통을 무릅쓴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은 소외되고 가난하며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환자를 끌어안았고, 창녀와 간음한 사람을 용서했으며, 죄인 또는 세리와 함께 식사했다.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그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하느님이 사랑하는 방식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권력에 도취된 당시의 지배층은 예수의 행동이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였고, 결국 그들은 예수를 죽였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고통을 무릅쓰는 것임을 증명한다. 하느님은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들의 아픔을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고통받는 그들에게 다가온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의 힘 3 : 고통 속에서도 평정을 누린다.
에크하르트는 하느님 안에 굳건히 뿌리내린 내린 삶, 즉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고통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즉 ‘빈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빈 마음’으로 살아갈 때 결과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기도와 일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내면의 평온과 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단지 있는 것”일 뿐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평정심은 고통을 낭만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한순간의 삶만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에크하르트식으로 말하면 고통은 하느님 안에 있고, 고통이 하느님이다. 따라서 고통은 원수가 아니고, 억제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우리의 일부일 뿐이다.
평정심 수행은 영성생활이란 고통 없는 삶이 아니라 고통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말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고통을 극복해야만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일 뿐이다. 해방은 다른 곳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실현된다.
<마음챙김에서 찾는 참된 신앙 Q&A>
Q. 불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공통의 영성적 기반이 있는가?”
A.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은 그리스도교의 ‘깨어있음’과 통한다.
Q. 하느님은 어디에 있는가?”
A. 하느님은 영원하지만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현존한다.
Q. 하느님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A.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실천할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Q.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A.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Q. 구원은 언제 오는가?”
A. 구원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지금 이 순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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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말
나는 종교간 대화의 여정 덕분에 더 나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더 나은’이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있다. 나는 다른 영성전통의 가르침과 수행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을 비추어 보았고, 이제는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유랑하는 순례자다. 때로는 내가 시작했던 그날만큼이나 길이 어둡고 불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자신의 현존과 예수의 현존과 하느님의 현존과 붓다를 비롯한 시대를 초월한 많은 남녀 선인들의 현존을 느끼면서 나는 그들과 함께 걷는다. 현존은 현재 순간을 성심성의껏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더 현실화된다. 태이는 내가 현재 이 순간에 머무는 법을 익히도록 도와주었다. 태이는 자신의 마음과 영성전통의 문을 내게 열어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내 자신의 영성여정에서 더 온전하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_431~432쪽
■ 영어판 추천사 중에서
“책 읽기를 마치자 내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그것은 현명한 벗과 함께한 시간과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벗이 되었다고 느낄 대부분의 독자와 함께한 시간에 대한 기쁨이다. 하지만 나는 조용하고 평온하게 가야 할 여정이 남아 있다는 느낌 또한 갖게 되었다. 이 여정은 다음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사람처럼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오직 지금뿐이라는 것을 알고 매 순간들을 살아가는 것이다.”
- 티모시 래드클리프Timothy Radcliffe, OP (전 도미니코수도회 총장. 순회 설교사, 신학 교수)
■ 한국어판 추천사 중에서
“이 책이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이어 주는 교량 역할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이는 종교들이 심층에서는 서로 통한다는 필자의 평소 지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출판을 크게 기뻐하며 적극 추천하고 싶다.”
-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예수』 역자)
“곳곳에서 보석들이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책과의 대화가 막을 내렸다. 그 사이에 내 인생의 키가 훌쩍 자라 있음을 느낀다. 삶의 기적이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린 무수히 경험하고 있다.”
- 도법 (실상사 회주,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 대표. 『붓다, 중도로 살다』 저자)
“바야흐로 이런 종류의 책이 대중의 손에 잡힐 때가 되었나 보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변하는 세상을 누가 말릴 것인가?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 이현주 (목사, 번역가.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집입니다』 역자)
“이 책은 불자 혹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종교적 체험으로 ‘건너감’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
리고 새로운 통찰과 함께 자신의 종교로 ‘되돌아옴’에 이르게 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 박재찬 안셀모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사제. 『토마스 머튼의 수행과 만남』 저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사는 것, 하느님의 견고한 사랑에서 안식을 얻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이 참으로 갈구하는 바라고 믿는다. 그런 사랑을 느끼려면 깨어 있는 상태로 주의를 기울이면서 살아야 한다. 태이가 가르치는 마음챙김 수행이 바로 그것이다. _89쪽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이것은 지금 이 순간에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것이다. 즉 지금 여기에서 눈을 부릅뜨고 하느님의 현존과 섭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태이는 마음의 산란함과 태만이 마음챙김 수행을 방해하는 적이라고 규정한다. 에크하르트는 집착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기다리는 자유를 앗아간다고 경고한다. 지금 여기에 깨어 있으면서 눈을 부릅뜨고 사는 것이 영성적 자유의 문을 여는 열쇠다. _101~102쪽
일상에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실천하려 할 때마다, 우리는 매번 장애물을 만난다. 또 그것을 넘어가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곤 한다. 태이는 매일 마음챙김 수행을 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챙김 수행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과 만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이웃이 지닌 마음과 만날 수 있다. 그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_137쪽
씨앗과 같은 우리는 ‘충만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존재 그 자체까지 완전히 성장한다. 물방울이나 물결이 “바다가 된다.”라는 에크하르트와 태이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그저 소멸하는 것일까? 우리가 하느님에게 녹아들어 가면 무슨 일이 일
어날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 에크하르트는 지혜를 지닌 스승의 재치와 유쾌함으로 답변한다. 물 한 방물은 바다에 떨어진 다음 “하느님을 찾는다. 자기 자신을 찾는 것과 하느님을 찾는 것은 실제로 하나의 행위이며 같은 행위다.” _154쪽
그리스도인은 의문을 갖는다. 어떻게 하느님께 돌아간단 말인가? 그러면 태이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인도 이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다. 마음을 다한 영성수련을 통해 삼위일체가 신학서적의 굴레에서 벗어나 일상 안에 실재할 수 있다. _214쪽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느님이 된다. 에크하르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원성 혹은 분열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한다. “내가 하느님을 알면 나는 참된 그가 되고 그는 내가 된다. 더 나아가 하느님은 내가 되고 나는 하느님이 된다. 그와 나는 완전히 하나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고 하느님 안에 있는 내 모습이다. 요한의 첫째 서간 4장 8절처럼, 하느님은 사랑이고 사랑이 곧 하느님이다. 우리가 지닌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사랑 자체인 하느님 안으로 들어간다. _220쪽
마더 데레사는 몇 년 전, 어느 젊은 수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어느 날 캘커타 거리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오후에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데레사 수녀는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빛나고 광채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다녀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젊은 수녀가 대
답했다. “저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고 왔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해 보라고 했고, 수녀는 거리에서 만난 남자의 구더기로 득실거리는 몸에 난 상처를 닦고 소독해 주었다고 말했다. “저는 세 시간 동안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졌습니다.” 그 젊은 수녀는 그 순간 그곳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음을 알았다.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을 보고 어루만질 수 있는 장소 중 하나가 가난한 사람의 몸이다. _261~262쪽
끝없는 고통의 소용돌이에 붙들린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현재 순간에 온전하게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나 공포에 집착하고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들을 돕는 유일한 방법은 단순하게 현재 순간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다. 즉 공원 산책과 아이의 웃음과 벗의 방문 및 치료 마사지 등이 강박관념을 내려놓고 몸의 확실한 근거를 다시 느끼도록 도울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강조한다.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현재에 있는 모든 것에 눈을 떠야 한다. _299쪽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진흙을 우리 삶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집착하지 말자.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연꽃을 가꿀 수 있는 기회로 볼 수 있다.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날 수 있으면, 내 안에서도 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도 피어날 수 있다. 이욕이 의미하는 것은 진흙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미지의 어둠에 우리의 뿌리를 깊게 내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적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것이다. 즉 연꽃이 피어나길 기다리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참으로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녔다면, 진흙탕 같은 세계 한가운데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예수가 치유한 소경처럼 부르짖을 것이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코복음 10장 51절) _316쪽
고통과 사랑의 관계는 연민으로 요약된다. 연민은 사랑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함께 고통의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이다. 결혼한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부모, 그리고 남을 섬기는 삶을 선택한 사람에게 연민은 일상이다. 타인과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참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연민은 삶의 방식이다. 그들은 타인과 함께 그리고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위험을 감수한다. 즉 이웃과 함께하는 삶이 가져다 주는 대가를 기꺼이 치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우리가 만든 이미지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구축된 작고 자기중심적인 세계를 선택하게 된다. 즉 우리는 사랑을 위해 살거나, 아니면 영성적으로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_318쪽
연민을 선택한 삶을 살면, 우리는 이미 사랑이 고통을 수반할 가능성을 받아들인 삶을 사는 것이다. 자녀를 키워 본 부모에게 이것은 그리 대단한 계시가 아니라 그저 삶의 현실일 뿐이다. 태이는 “사랑은 고통에서 생겨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종교적 자기학대가 아니다. 모든 훌륭한 영성전통에 있는 깊은 통찰이다. _322쪽
태이가 말하듯 예수는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과 삶은 살아오면서 던져 왔던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것은 진리로 살아온 그의 존재 자체였다. 최종적으로 그의 진리는 죽음이다. 그러나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_351쪽
순교한 산살바도르 대교구장 성 오스카 로메로 또한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고 연민을 행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할 것임을 알았다. 피살되기 3년 전, 이미 많은 사제와 수도회의 수사와 수녀,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가 피살당했다. 그는 위험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고통을 피하는 대신 교구민과 함께하기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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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죽기 몇 분 전 로메로는 강론 중에 말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 존재합니다. …… 그것이 그리스도인을 독려하는 희망입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사람은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 하나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_372~373쪽
그들에게 십자가에 걸린 시신은 종교적 예술작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죽은 아들이었다. 갓난아기였을 때 영양실조로 죽어 간 그들의 아이들이었다. 치료약도 희망도 없이 암으로 죽어 간 그들의 이웃이었다. 채찍질 당하여 피범벅인 예수의 시신은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그들의 조국이었다. 수 세기에 걸친 빈곤과 부패와 군사 쿠데타와 외채 및 내전의 결과로 그들의 조국은 죽어 가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정치적 힘을 갖지 못한 그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한 것이었다. 상처 입고 피범벅인 인간 예수의 시신에 입 맞추고 얼굴에서 피를 닦아 내며, 죽은 예수를 부활시켰던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 일이었다. _387쪽
에크하르트가 말했듯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고통받고 “하느님은 고통받는 우리와 함께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인 임마누엘(이사야서 7장 14절; 마태오복음 1장 23절)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고통을 회피하는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하는 하느님이 아니다. 유대-그리스도 전통 전체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위대한 진리를 담고 있다. 즉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복음 28장 20절) 이 진리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았을 때부터 파스카로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약해진 하느님만이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고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이 신뢰하도록 말할 수 있다. 그곳에는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수치스럽게 삶을 마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랑하는 길을 선택하고 걷는 하느님만이 남는다. 그렇게 하지 않는 신은 거짓 신이다. _388쪽
낫트리와 예수는 가해자가 지닌 고통을 아주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상대가 갖는 분노와 폭력 뒤에 숨겨진 인간적 면모와 존엄성을 엿보았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동시에, 그런 끔찍한 행동을 한 가해자에게 숨겨진 인간 존엄성과 하느님의 모상을 묵상해야 한다. _391쪽
평정심 수행은 영성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영성생활은 고통 없는 삶이 아니라, 고통 안에서 자유로운 삶이다. 평정심은 고통 가운데서도 침착함과 초연함을 유지하게 하는 내면의 자유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더 이상 고통을 하느님으로부터 철저한 고립과 단절을 야기하는 ‘영적 내침’으로 경험하지 않게 된다. _404~405쪽
이 글을 마치면서 나는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 “나는 도착했다. 나는 고향에 돌아왔다.”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그것을 복수로 말하고 싶다. “우리는 도착했다. 우리는 고향에 돌아왔다.” 이것은 결코 여정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오늘은 구원의 날이다. 이 순간이 영원한 현재다. _4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