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교의 결합은 성공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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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교의 결합은 성공적인가?
  • 이상헌
  • 승인 2022.01.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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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국정토

트랜스휴머니즘에서 활용하는 기술적 수단들을 방편으로 불교적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은 우리 삶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는 ‘고(苦, duhkha)’에 관한 통찰이며, 누구나 각자의 노력으로 이 보편적 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의 운명처럼 생각되는 고로부터의 해방과 더 나은 세상, 더 행복한 삶으로 인류를 인도한다는 자신들의 목표가 불교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더욱이 인간을 비롯해 삼라만상의 무상함을 주장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인간의 현재 상태를 완성된 것, 고정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하고 진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자신들의 주장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세 가지 목표에 있어서 자신들과 불교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인간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 개인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고양한다는 목표다. 둘째는 인간이 직면하는 온갖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고통 없는 행복한 삶을 얻으려는 목표다. 셋째는 인간 현재의 상태를 더 높은 상태, 이를테면 열반의 경지로 고양하는 목표다.

불교는 깨달음의 과정에서 방편을 활용하는 데 인색하지 않으며, 깨달음의 방편으로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불교는 세상 어떤 종교보다도 과학기술에 친화적이다. 그래서 목표의 공통성에 기초해 트랜스휴머니즘을 불교와 결합하는 시도가 가능하다고 일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믿는다.

 

고로부터 해방되는 하나의 길: 몸의 한계 극복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간 모든 고의 뿌리를 인간의 자연적 본성, 특히 생물학적 한계에서 찾는다. 질병과 노화, 신체에 기초한 욕구와 자연 본성에 뿌리 박은 심리 등이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이다. 이들은 이러한 고의 원천을 인간의 자연적 한계라고 규정하며 우리가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이라고 여긴다.

지금까지 인류는 한계에 맞서고 장애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리고 드디어 인류는 자연적 한계와 장애로부터의 해방을 꿈꿀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바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 덕분이다. 생명공학, 더 나아가서 나노기술의 발전으로 의료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면 인간은 모든 질병을 극복하는 날을 맞이할지 모른다. 더욱이 우리의 자연적 몸과 기계의 결합, 다시 말해 사이보그화를 통해 인간은 신체적인 고통과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제 남은 문제는 질병과 노화, 온갖 부정적 자연 본성과 심리를 우리의 운명적 한계로 여기는 잘못된 믿음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바로 이런 믿음을 참이라고 여긴 전통적인 사고로부터 탈피하려는 움직임이다.

전통적으로 서양 사상은 마음과 몸의 이원론을 가정했으며, 몸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현대에 들어와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상학적 관점이나 포스트모던적 몸 이해 방식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몸은 마음 혹은 정신에 비해 낮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플라톤은 몸으로부터의 해방이 진리와 행복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칸트 역시 몸의 자연적 충돌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의 힘을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트랜스휴머니즘은 서양 사상의 주류 전통과 맥이 닿아 있다. 사이보그화는 인류의 숙원이었던 몸으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붓다는 몸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트랜스휴머니즘은 몸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말하며, 그래서 몸의 우연성을 강조하고 몸의 형태학적 자유를 추구하지만, 불교는 몸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지지하지 않는다. 더욱이 질병 대부분을 극복하고 몸을 기계화하는 것으로 일체의 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피상적이다. 인간의 고는 몸의 자연적 한계가 아닌 무상함으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신체를 마음대로 변형하고 대체 가능한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된다고 해서, 다시 말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말하는 몸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룬다고 해서 모든 욕망이 소멸하고 평온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간 향상의 역설

붓다는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불행의 근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임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우리 몸은 거부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석가세존이 출세간해 수행의 길에 들어섰을 당시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 우리 몸을 억압하고 몸으로부터 비롯한 욕망을 제거하는 수련법이 유행했다. 석가세존 역시 온갖 고행(苦行, tapas)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올바른 수행의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고행에 몰두하는 수행법은 몸이 감각적 욕망의 근원이라는 생각에 근거한다. 몸을 학대함으로써 몸에 뿌리를 둔 감각적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을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격리하려는 시도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몸을 한계와 결함 등의 관념을 통해 인간 고통의 원천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기술적 수단을 동원해 몸의 한계를 극복하고 몸을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몸으로부터 비롯한 제한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상상한다. 이는 석가세존 당시 극단적인 고행을 감행한 수행자들과 비슷한 가정을 몸에 대해 하고 있다고 보인다. 

육체적 고통을 중심에 둔 수행법은 고행의 역설을 피하기 어렵다. 쾌락을 탐닉할수록 감각적 욕망을 향한 갈애가 커지는 것처럼 감각적 욕구를 억제할수록 이에 대한 갈애도 커진다. 다이어트를 위해 빈번하게 굶는 사람은 식욕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지 식욕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한 끼를 굶고 먹는 밥은 매 끼니 먹는 밥보다 더 맛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먹는 쾌락이 더 커질 것이다. 그만큼 식욕의 갈애를 이겨내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고행을 하면 할수록 고행 수행자의 내면에서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잠재성향이 더 커질 것이다. 그만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는 게 더 힘들어질 것이다. 고행은 하면 할수록 더 큰 고행이 될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고행 수행자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과학기술 수단을 활용해 인간 향상(human enhancement)을 꾀하는 길이다. 우리 몸의 유전적 구성에 변화를 가하거나 우리 몸을 기계와 결합해 신체 능력을 강화하고, 약물 혹은 뇌 보철 등을 이용해 좀 더 영구적인 방식으로 정서적 쾌감과 통제 능력을 증대시킨다. 그리고 인공지능과의 결합으로 지능을 인간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려 인간의 진화를 도모한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런 방식 또한 고행 수행자들이 빠지는 역설을 모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예상처럼 인간 향상을 통해 자연적 몸의 한계를 극복하고 몸이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보다 끝없는 향상의 욕구에 시달릴 공산이 크다. 마음대로 몸을 변형하고 대체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몸으로부터 해방되기보다 오히려 몸에 더 얽매이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향상의 역설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고로부터 해방되는 또 하나의 길: 불멸 추구

트랜스휴머니스트는 노화와 죽음이라는 자연적 사실을 불변하는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노화와 죽음을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미래에는 결국 이겨낼 장애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생명에 대한 궁극적 이해와 최종적인 공학적 처치 혹은 사이보그화를 통해 영원한 젊음과 생명을 얻는 날을 고대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보기에 인간 본성은 현 단계에 고정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이 인간의 전모가 아니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 있으며, 자연적 진화 이외에도 문화적 진화와 기술적 진화 방식을 취할 수 있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의미의 존재론적 불확실성은 우리의 운명이 아니다. 고통의 완전한 제어가 가능하듯 죽음 또한 우리의 선택 영역에 포함될 것이라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주장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을 불교와 결합하려는 이들이 주장하는 사이보그 붓다는 모든 인간적 결함을 극복한 불멸의 존재인 듯하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이러한 주장은 죽음을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의 원천으로 이해한 근대적 사고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붓다는 생로병사라는 자연적 현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은 깨달음을 통해 무명을 극복하고 존재의 참된 본성을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일체 만물의 무상성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 세상에는 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없다. 생과 사도 마찬가지다. 생과 사를 거듭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모든 생명의 본성이다. 이러한 무상성을 이해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불멸에 대한 욕망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의 무상함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영원한 젊음과 불멸을 얻는다고 해도 온갖 욕망과 집착, 번뇌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허락한 수명을 과학기술 수단을 동원해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은 욕망, 변치 않는 젊음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 죽지 않고 영원히 삶고 싶은 욕망은 존재에 대한 갈애다. 몸의 부분들을 바꿔가면서, 혹은 몸을 기계로 대체하거나 몸의 존재 양상을 바꿔가면서 불멸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 본성 깊숙한 곳에 숨은 갈애의 표출이다.

 

깨달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유한성을 참을 수 없었던 듯하다. 인간의 고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유래하며, 그 조건을 혁신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고통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듯하다. 인간 조건의 혁신은 곧 초월을 뜻한다. 모든 인간적인 한계와 결함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포스트휴먼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휴먼은 초월적 존재다. 서양사상에서 전통적으로 초월자는 신을 가리키지만, 지금은 종교적 의미의 신이 죽은 시대다. 신의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신적 존재가 바로 포스트휴먼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우리 밖에 우리를 초월해 있는 신적 존재를 가정하는 대신에 우리 자신을 신으로 승격시키려는 계획이다. 그들이 신적 권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말이다.

불교는 초월을 말하지 않는다. 더욱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목표인 ‘포스트휴먼 되기’는 외재적 초월, 존재론적 초월로 봐야 한다. 초월과 관련해 붓다의 가르침을 해석하면 그것은 외적 조건의 초월이 아니라 내적 상태의 초월, 즉 내재적 초월이다. 번뇌로 가득한 일상적 마음 상태에서 깨달은 마음 상태로 넘어가는 길은 기술적 수단을 활용한 인간 향상이 아니다. 올바른 수행의 길은 몸의 변화가 아니라 궁극적인 마음의 변화를 목표로 한다. 

고의 근원인 갈애는 고행과 같은 억압적인 방법으로도, 우리 몸의 기술적 변형이나 향상을 통해서도 근절되지 않는다. 갈애는 단계적인 정신 수행을 통해 그 뿌리를 서서히 제거하는 방법으로만 없앨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지난할 것이다. 갈애의 뿌리가 그만큼 깊기 때문이다.

희로애락이 점멸하는 일상적 삶을 초월해 열반(nirvana)으로 나아가는 길은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인연으로 생기고 소멸하며 고정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 없이 과학기술로 인간 향상을 꾀한다고 해서 열반에 이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헌
서강대 전인교육원 교수. 저서로는 『융합시대의 기술윤리』,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등이 있다. 「붓다의 시선으로 본 인공지능」, 「칸트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포스트휴먼」 등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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