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 북한산의 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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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 북한산의 산신
  • 윤선아
  • 승인 2021.11.24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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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북한산 산신 품다
북한산 보현봉에서 바라본 문수봉 아래 문수사. 
북한산 주변 지역에서는 북산산신을 대상으로 오래전부터 산신제를 지내왔다. 사진 유동영.

눈 닿는 곳곳마다 산 아닌 곳 없는 이 땅에서 산은 삶의 터전이자 의지처였다. 국토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진 자연환경과 지리적 특성은 자연스럽게 산에 대한 경외와 숭배로 이어졌으며, 하나의 신앙대상으로 발전했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이 1,908세의 수를 누리고 아사달의 산신이 됐다는 국조 신화 속에서, 산신이 우리 민족 신앙생활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 잡아 왔음을 알 수 있다.

북한산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성북구, 종로구,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져 있는 산이다. 주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동북쪽 인수봉과 동남쪽 만경대가 삼각을 이루고 있어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행정상의 공식 명칭인 ‘북한산’을 사용하되, 개별 사례의 관습적인 표현이나 문헌 사료의 원문을 인용할 때는 ‘삼각산’이라는 표현을 병행하고자 한다.)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삼은 이래 북한산은 수도의 진산(鎭山, 도읍지나 각 고을을 진호한다고 생각한 산)으로, 서울 어디서나 그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북한산 청하동문(靑霞洞門). 
일붕 스님이 이 근처에서 기도했다고 전한다. 사진 유동영.

 

예부터 이어진 북한산의 위상

북한산은 일찍부터 역사 현장에 등장한다.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온조왕 즉위년 기사에 따르면, 온조와 비류가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온 태자 유리를 피해 여러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날 때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폈다는 내용이 나온다. 부아악이 바로 지금의 북한산이다. 예나 지금이나 북한산은 서울, 경기 일대에서 가장 높고 뛰어난 명산이었음이 틀림없다.
사전(祀典, 국가 주요 제사 대상의 절차와 의식을 정리한 제도)이 정립되면서 북한산은 국가 명산대천(名山大川)의 하나로 제사 대상이 됐다. 일찍이 신라에서는 북한산을 소사(小祀)로 제사 지내던 24개 명산대천 중 하나로 정했다. 조선에 이르러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며 수도의 진산으로서 북한산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직후인 1393년(태조 2) 명을 내려 나라의 명산대천, 성황(城隍), 해도(海島)의 신을 봉하면서 삼각산을 지리산, 무등산, 금성산, 계룡산, 감악산 등의 신과 함께 호국백(護國伯, 나라를 지키는 으뜸가는 산)으로 봉했다. 또 조선의 사전 체계가 정비되면서 삼각산의 신은 한강, 송악산, 지리산 등의 신과 함께 중사(中祀) 대상이 돼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흠향(歆饗, 천지 신령이 제물을 받아서 먹음)을 받았다.

조선은 국가 제사에 대한 의례서로 『국조오례의』를 편찬했고, 각 제사에 대한 세부 절차와 의식을 규정했다. 다른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 절차는 「제악해독의(祭岳海瀆儀)」로 통일돼 있지만, 삼각산에 제사를 지내는 시기와 절차는 「제삼각산의(祭三角山儀)」라는 별도의 조목으로 구성돼 있다. 조선에서 북한산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왕조는 기우(祈雨)와 기설(祈雪)을 할 때 반드시 삼각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태종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약 400여 년간 120차례에 걸쳐 삼각산에서 기우제나 기설제를 지낸 기록이 확인된다. 또한 1704년(숙종 30) 기우제 절차를 개정하면서 가뭄이 심할 때는 가장 먼저 목멱산, 한강, 삼각산에 3품관을 보내도록 했다. 

이처럼 농업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가뭄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이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가 기원했던 기도처가 바로 북한산이었다. 신라에서 시작해 조선의 국가 제사에서 완성된 북한산과 북한산에 좌정한 산신의 위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많은 사람에게 북한산 산신의 기도효험을 믿게 했다.

경기 고양 무량사 약사전에 모셔진 산신탱화. 검은색 두건을 쓰고 흰 치마저고리를 입은 중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북한산 산신이 여신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마을 단위로 봉행된 북한산 산신제

국토의 65%가량이 산지로 구성된 지리적·환경적 특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산신을 숭배하는 신앙이 있었고, 마을 단위의 산신제가 봉행돼 왔다. 산신제의 목적은 주로 마을의 풍요와 지역민의 안녕에 있었다. 신앙 대상은 마을이 위치한 주산의 산신이었다.

북한산 역시 역사적으로 명산이었기 때문에 북한산이 위치한 주변 지역에서는 북한산신을 신앙 대상으로 삼아 오래전부터 산신제를 지내왔다.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우이동, 평창동, 구기동, 돈암동, 정릉동, 경기도 북한동 등에서 산신제를 활발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경기 고양 원효암에 조성연대를 알 수 없는 양각으로 조각된 여산신이 모셔져 있다. 윤선아 제공.

도당제, 산제, 산신제, 대동제, 산고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산신제의 제의 시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전국적으로 제의 시기는 음력 정월 초에서 보름 사이, 3월, 10월에 집중된다. 새해가 시작될 때 지역민과 마을의 평안을 빌거나(정월), 양의 기운이 가장 성할 때 복을 기원하거나(3월 삼짇날),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추수 감사(8~10월)의 의미로 산신제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북한산 주변 지역 또한 음력 3월, 8월, 10월에 산신제를 지내왔다고 알려져 있다.

산신제의 제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대체로 ‘강신(降神)-초헌(初獻)-독축(讀祝)-아헌(亞獻)-종헌(終獻)’으로 이어지는 유교식 제례 절차에 따라 지낸다. 무속인이 제의를 주관하는 ‘도당굿’으로 설행되거나, 우이동 ‘삼각산도당제’처럼 유교식 제례와 굿이 혼합된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수도권의 급속한 개발과 도시화, 기독교의 유입으로 수도권과 지리적·행정적으로 일치하는 북한산 일대 산신제 대부분이 소멸했다. 남아 있는 몇몇 산신제는 지역 주민이 중심이 돼 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산 좌우에 각각 위치한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신제와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삼각산도당제다.

북한산 치성터. 노승대 제공.
북한산 백운대 제단. 노승대 제공.

 

유교·무속 두 형태로 설행된 북한동 산신제

북한동은 북한산 서편에 있으며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속한다. 북한동은 1711년(숙종 37) 계파 성능 스님이 숙종의 명을 받아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마을로 알려진다. 2004년 기준 113세대, 184명의 주민이 거주했으며, 북한동 주민들은 북한산 22개 주요 산봉우리에 살며 등산객을 상대로 상점이나 식당을 운영했다.

하지만 2008~2010년에 실시한 북한산지구철거정비사업으로 북한산성 내 거주했던 북한동 주민들은 북한산성 아래 이주단지 등으로 거주지를 옮겨간 상태다.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산신제를 설행하는 시기와 형태에 변화가 생기고 단절될 위기를 맞았으나, 원주민을 중심으로 북한동 산신제를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북한동 산신제는 언제부터 지내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북한동 주민들 증언을 정리해 보면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지낸 것으로 보인다. 제의 대상은 북한산 산신이며, 마을 전체의 안녕과 태평, 개인의 건강과 평안, 등산객의 무사고와 소원성취를 기원했다. 산신제는 유교식과 도당굿 두 가지 형태로 설행됐다.

유교식 산신제는 마을 주민들이 ‘산제’ 또는 ‘산고사’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매년 음력 8월 초하루와 10월 초하루에 설행됐다. 음력 8월 초하루에 지내는 산신제는 주요 제물이 ‘소’였으며, 해가 넘어갈 즈음인 오후 6시 무렵에 지냈다. 본디 북한산성 내 행궁지 주변 큰 아름드리 소나무 밑에 단을 쌓고 지냈지만, 6·25 전쟁 당시 행궁지에서 많은 군인이 죽었고, 이로 인해 부정을 탔다는 이유로 의상봉 아래 바위로 제단을 옮기게 됐다. 산신제는 밥(노구메)을 지어 진설(제사나 잔치 때, 음식을 법식에 따라 상 위에 차려 놓음)했으며,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읽은 다음 한 번 절을 했다. 소지(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를 올린 다음 음복하고 의상봉에서 내려오는 데 2시간가량 소요됐다. 의상봉에서 산신제를 지낸 후에는 내려와 대서문에서 한 번 더 제사를 지냈다. 대서문이 의상봉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있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한 번 더 제사를 지냄으로써 부정한 것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자 했다.

10월 초하루의 산신제는 노적봉 밑에서 지냈다. 8월 초하루에 지낸 산신제와 달리 흑돼지 한 마리를 제물로 사용했다. 노적봉에 올라가는 거리도 멀고 힘이 들어서, 북한동 도당굿을 주관하는 무당의 조언으로 1998년 중성문 문루에서 노적봉을 향해 산신제를 지내게 됐다. 8월 초하루 산신제와 달리 대서문에서 제를 지내지 않았다.

북한동에서는 연중 지내는 2번의 유교식 산신제와 별도로 3년에 한 번씩 무당을 초빙해 도당굿을 지냈다. 도당굿은 부왕사지 우측 계곡 건너에 있는 산신각(또는 굿당)에서 설행됐는데, 모두 12거리 굿으로 부정굿부터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도당굿은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굿 날짜가 정해지면 모든 사람이 몸을 정갈히 하고 부정한 것을 보지 않았다. 굿은 아침 10시에 시작해 오후 5시에 끝났으며, 굿이 끝나기 전 대서문에서 마지막 굿판을 벌였다. 

마을 단위에서 베풀어지는 산신제는 1년에 한 번 택일해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북한동 산신제는 연중 2번 설행되는 특징이 있다. 원래 북한동 자연촌락 중 의창과 중창(현 중흥사지 부근) 주민들은 행궁지에서, 하창(현 북한동역사관 자리 추정) 주민들은 노적봉에서 산신제를 지내왔다. 그런데 전쟁 중에 의창과 중창 주민들이 하창으로 대거 이주하고 의창과 중창 마을이 군 통제지역이 되면서 하창 마을에서만 산신제를 2번 지내게 된 것이다. 북한동 주민 중에는 북한산 산신이 여산신이어서 욕심이 많아 1년에 두 번 산신제를 지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우이동 삼각산도당제

북한산 동편에 있는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서는 ‘삼각산도당제’라는 이름으로 산신제가 거행된다. 유교 제의인 도당제(삼각산도당제에서는 도속제라는 명칭으로 불렀다)와 무속 제의인 도당굿으로 구성된 우이동 산신제는 삼각산도당제전승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되며 지역민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삼각산도당제는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서 매년 3월 3일에 봉행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음력 3월 2일에는 마을 주민이 중심이 된 안반고사(굿하기 전날 밤 떡을 빚으면서 굿이 잘 풀리기를 기원하는 고사)와 산신제로 구성된 도속제를 지냈고, 다음날인 3월 3일에는 무당이 중심이 된 도당굿(황토물림-부정거리-산신청배-본향맞이-불사거리-장군거리-별상거리-대감거리-신장거리-제석청배-작두거리-제석거리-사냥놀이-군웅거리-소지-산신배웅)을 지내며 산신제를 지내왔다.

그러다가 2010년 11월 삼각산도당제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면서 그 절차와 내용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음력 3월 2일 저녁부터 음력 3월 3일까지 이틀에 걸쳐 지내던 산신제를 음력 3월 3일 하루 지내는 것으로 변경했고, 도속제라 불리던 산신제는 『국조오례의』 「제삼각산의」에 따라 내용과 절차가 격식을 갖추게 됐으며, 도당굿은 유교식 제사가 끝난 후 이어서 지내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제삼각산의」에 따르면 삼각산에 대한 제사는 축시(오전 1시~3시)에 지내지만, 삼각산도당제는 오전 10시에 시작한다. 삼각산도당제의 원활한 운영과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위해 시간을 변경했다고 이해된다. 삼각산도당제는 구심점이 돼 지역 주민 간 결속을 더욱 단단히 하며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

 

여성의 모습을 한 북한산 산신

선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신은 본디 대모신(大母神)의 성격을 띠어 고대에는 대부분이 여신이었다가, 유교 사상과 이념이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산신 자리도 남신에게 내어준 것이라 한다. 이러한 영향은 사찰 산신각에 남아 있는 산신탱화나 산신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대다수가 긴 흰 수염을 가진 백발 할아버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산 산신이 여산신이라 욕심이 많다는 북한동 주민의 증언이나 북한산 사찰에 봉안된 산신탱화나 산신상을 살펴보면 북한산 산신은 여신일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산 무량사 약사전에 모셔진 산신탱화다. 이 탱화는 순헌황귀비 엄씨가 기자(祈子, 아이 낳기를 기원함)를 발원하며 조성했다고 알려진다. 사찰 산신각에 모셔진 산신탱화는 1800년대 후반부터 조성됐다고 알려졌는데, 무량사 산신탱화는 현전하는 산신탱화 중 드물게 검은색 두건을 쓰고 흰 치마저고리를 입은 중년 여성의 모습을 한 여산신이다. 그 외에도 원효암에는 조성연대를 알 수 없는 양각으로 조각된 여산신이 모셔져 있다.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는 절집 산신재

산을 의지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산신제는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산 주변에서 전승되던 산신제 대부분이 단절된 상태다. 가장 활발하게 전승되던 북한동 산신제는 2010년 마을 주민의 이주가 결정된 후 그 실체가 희미해졌고, 우이동 삼각산도당굿은 지방 정부의 힘을 빌려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렇듯 민간 산신제는 산에 의지하며 살아가던 이들이 세상을 떠나고, 도시화가 가속되면서 소멸의 길로 나가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민간 산신제가 소멸해가는 지난 10~20년 사이 절집을 중심으로 한 산신재(山神齋)는 규모도 커지고 있고,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필자가 석사 논문을 준비하던 2016~2018년 사이, 북한산 사찰 대부분은 산신의 생일이라고 알려진 음력 3월 16일이면 산신재를 봉행했고, 코로나19라는 전 인류적 재앙 앞에서도 여전히 모두의 안녕을 위해 산신재를 봉행했다.

사찰 산신재는 1826년 백파 긍선 스님이 간행한 『작법귀감(作法龜鑑)』 「산왕청(山王請)」에 그 초기형태가 보인다. ‘결계(천수경 독송)-청신(유치, 청사)-찬탄-예경-공양-정근-축원’으로 구성된 산신재는 설행 절차와 시기, 제수 등 제의의 구성요소가 민간 산신제와 구별된다. 그러나 모두의 안녕과 무사를 빈다는 기도의 목적만큼은 민간 산신제와 다를 바가 없다. 도시화와 산업화와 기독교 유입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절집은 북한산 산신을 기꺼이 받아준 것이리라. 

북한산성 부암사지 건너편 굿당. 윤선아 제공.

 

윤선아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자 네이버 카페 ‘붓다와 떠나는 책여행’의 오랜 카페지기다. 어릴 때 노스님으로부터 받은 대윤이란 법명으로 불리길 좋아한다. ‘지금 현재, 요놈은 무엇인가’에 관심이 많아 뒤늦게 민속학에 입문했고, 2018년 고려대대학원에서 「북한산 사찰의 산신재 설행양상」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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