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제천 무암사·정방사·신륵사
상태바
[지안의 문화이야기] 제천 무암사·정방사·신륵사
  • 노승대
  • 승인 2021.11.25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미 만추도 지나 한 해의 삶을 마감한 낙엽들이 고적한 산길에 소리 없이 떨어져 쌓인 채 건듯 부는 바람에도 이리저리 휩쓸리며 갈 길을 잃었다.

앞길을 알 수 없기는 다 마찬가지, 이럴 땐 조용한 산사의 풍경소리가 허전한 가을 마음에 위로가 된다.

제천에는 깊은 산속에 숨겨진 고찰들이 있다.

한국전쟁 때도 피해당하지 않은 보석 같은 곳이다.

무암사, 정방사, 월악산 신륵사가 바로 그 절들이다.

무암사는 큰 도로에서 바위산 속으로 좁은 외길을 따라 2km를 들어가야 한다.

금수산 줄기 화강암 지대여서 풍광도 좋고 물맛도 뛰어나다.

극락전은 1740년에 중수됐는데 특이하게 좌우벽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다 그려져 있다.

임진왜란 후 사찰들을 중건하며 화재방지 수호신을 모시는 풍속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방사는 이제 널리 알려졌지만 어느 때에 가더라도 우리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충주호와 함께 일망무제로 펼쳐진 산하를 호쾌하게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명당자리 아니던가.

월악산 신륵사 극락전은 이제 해체복원을 마치고 제 자리에 다시 당당히 섰다.

극락전은 물론 충북 유형문화재(제132호)이지만 극락전에 있는 벽화(136점)와 단청(150점)도

따로 유형문화재 제301호로 지정돼 있다.

그만큼 중요한 유물이니 문화답사의 즐거움을 배로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일행 4명은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충주호를 끼고 이곳저곳을 탐방하며 안복을 누린 후 귀경길을 서둘렀다.

해가 짧아진 것이 아쉬운 하루였다.

 

무암사 가는 좁은 외길은 산세와 풍광이 점입가경이다. 초입에는 집채만 한 바위 둘이 서로 기댄 채 내방객을 맞는다. 그 사이에는 디딜방아도 있었다.

 

층층한 돌을 밟고 구름산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세상인 듯 옛 절이 한가롭다. 비단을 수놓은 듯 만장봉 드높은데 종소리는 간간이 안개 숲속으로 떨어지네.

 

어느 선비가 지은 시처럼 무암사는 옛 정취를 지닌 절이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와 계단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정경을 보존한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법당에서 삼성각 올라가는 길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너무 반듯하게 가공한 석재들로 절의 조경이 바뀌면서 자연 친화적인 모습은 많이 줄었다.

 

삼성각 앞에서 바라다본 무암사 전경. 안개가 끼면 건너편 능선의 장군바위 뒤로 노장암(老丈巖)이 나타난다고 한다. 무암사(霧巖寺) 이름은 여기에서 생겼다.

 

정방사는 금수산 줄기인 신선봉(845m)에서 도화리로 뻗은 능선에 있는 절이다. 법당 뒤로 높은 암벽이 호위신장처럼 둘러서 있다. 신라 때 창건했다.

 

법당 뒤 암벽 아래에는 맑은 샘이 항상 솟아난다. 능선에 어찌 이런 샘이 있을까? 절이 들어서기 전부터도 이미 인근 사람들의 기도처였다.

 

우뚝 솟은 암벽과 샘이 있으니 자연스레 기도터가 됐고 한국전쟁 때도 인근 주민들은 이 절로 피신해 무사히 지냈다. 많은 이름이 암벽에 새겨져 있다.

 

구름이 머무는 집[유운당]은 요사채의 당호다. 주련은 더욱 좋다. “산중하소유(山中何所有) 영상다백운(嶺上多白雲) 지가자이열(只可自怡悅) 불감지증군(不堪持贈君).”

 

“산중에 무엇이 있는가? 산마루에 흰구름이 많네. 다만 스스로 즐길 뿐 그대에게 가져다줄 순 없네.” 도홍경의 시.

 

절에서 내려오는 길, 이제 가을의 끝이다. 벌거벗은 나무들과 마른 계곡도 겨울의 침잠 속에서 내년의 봄을 꿈꿀 것이다. 우리에게도 새봄은 늘 축복!

 

월악산 신륵사 마당에서 바라본 월악산 영봉(靈峰). 신령스러운 봉우리란 이름은 백두산을 일컬을 때 사용하지만 다른 산에는 없다. 월악산이 유일하다.

 

신륵사는 신라시대 창건으로 사명대사가 중수했다고 알려져 있다. 삼층석탑은 신라양식을 그대로 이었고, 상륜부가 남아있는 귀중한 탑. 보물 제1296호.

 

극락전은 언제 지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내부의 후불탱화가 1805~1814년경에 조성됐으므로 법당과 함께 단청, 벽화도 이때 중수됐다.

 

사명대사가 1604년 9월 초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하는 행렬을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의 성문 앞에서 맞이하는 관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 강대철 박사 제공.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상. 조선시대 후기에는 법당 내부 좌우 벽에 문수, 보현보살을 그렸다. 문수동자는 지혜를, 보현동자는 꾸준한 정진을 의미한다.

 

사진 강대철 박사 제공.

법당 앞, 뒤 빗반자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상을 그렸다. 자세히 보면 물고기와 연꽃을 조각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임진왜란 후의 양식이다.

 

사진 강대철 박사 제공.

제석천이 악사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다. 반대편에는 범천 그림이 있다. 제석천, 범천은 석가모니 당시 가장 센 신들로 불교에 귀의한다.

 

사진 강대철 박사 제공.

조선시대 후기에 민화가 절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벽화도 불교 관련 내용으로 채웠다. 법당 안팎에는 금강역사도 많이 배치했는데 내부의 금강역사들이다.

 

사진 강대철 박사 제공.

민간 유행 민화가 절집 벽화에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도 벽에 그려졌다. 거북 목조각도 수미단에 있으니 가면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