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수륙재, 고려 왕실과 조상 위한 국가 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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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과 불교] 수륙재, 고려 왕실과 조상 위한 국가 제례
  • 민순의
  • 승인 2021.10.2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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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도 막지 못한 망자 향한 위로
진관사 수륙재. 태조 이후 연산군 대까지 100년이 넘는 동안 진관사에서는 총 32회 이상의 수륙재와 기신재(忌辰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에서 올리는 재)가 개설됐다.

●일러두기: 이 글은 2017년 『불교문예연구』 제9집에 게재된 필자의 연구논문 「조선전기 수륙재의 내용과 성격 - 천도의례(薦度儀禮)의 성격 및 무차대회(無遮大會)와의 개념적 차별성을 중심으로」를 요약·수정했습니다. 

 

수륙재의 기원과 변천

수륙재는 일반적으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佛法)을 강설할 뿐만 아니라 음식도 베푸는’ 불교 행사로 알려졌다. 중국 남송대 지반(志盤)의 『불조통기(佛祖統記)』에 따르면, 수륙재는 중국의 양무제(梁武帝, 464~549)가 꿈속에서 만난 신승(神僧)으로부터 “수륙대재를 설행해 무량의 고통을 받는 육도 중생을 구제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의문(儀文)을 만들어 505년(천감 4) 금산사(金山寺)에서 친히 수륙도량(水陸道塲)을 개설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그러나 당송대 이전에는 수륙재 설행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양무제의 설화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최근에는 수륙재가 본디 인도의 시아귀회(施餓鬼會, 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로움을 겪는 아귀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베푸는 법회)에서 비롯됐으리라는 추정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에서 수륙재가 설행된 것으로 전해지는 첫 기록은 고려 광종 때의 일이다. 최승로(崔承老, 927~989)의 시무 28조에는 광종이 “귀법사(歸法寺)에서 무차수륙회(無遮水陸會)를 열고, 매번 부처에게 재를 올리는 날이 되면 반드시 걸식하는 승려들을 공양하고, 때로는 내도량(內道場)의 떡과 과일을 걸인[丐者]에게 내주었다”고 한다. 또 광종 21년(970)에는 혜거 국사(惠居  國師, 899~974)의 건의로 수원의 갈양사(葛陽寺, 현재의 용주사)에 수륙도량을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선종 7년(1090) 무렵에는 송으로부터 『수륙의문』을 들여오고, 이를 설재(設齋)하기 위한 수륙당(水陸堂)을 보제사(普濟寺)에 건설하기도 했다. 비록 화재를 당해 성과를 보지는 못했으나, 수륙당을 별도로 지으려 했다는 데에서 국가가 수륙재를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국행 의례의 하나로 편제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전기 국왕의 의지에 따라 주로 국가 주도하에 설행됐던 수륙재는 무신 집권기에 들어 민간 사찰을 중심으로 집단위령제의 성격을 가지며 시행되기도 했다.

조선 태조 4년(1395)에는 개성 천마산 관음굴(觀音堀), 거제 현암사(見巖寺), 삼척 삼화사(三和寺)에서 기록상 조선시대 첫 번째의 국행(國行) 수륙재가 설행됐다. 국행이라는 말 그대로 국왕의 친명에 의해 국가의 공권력과 재정을 동원해 실시된 의식으로, 한 해 전 그 일대에서 모반죄로 몰려 바다에 수장당한 고려 왕씨 일족을 추복(追福,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빎)하기 위해 치러졌다. 금물(아교에 개어 만든 금박 가루)로 『묘법연화경』 3부를 써서 왕이 친히 내전에서 전독(轉讀, 경전의 글귀를 소리내어 읽거나 읊조림)하고, 『수륙의문(水陸儀文)』 21본을 간행해 무차평등대회(無遮平等大會, 차별 없이 평등하게 널리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행하는 불교 의례)를 세 곳에 베풀었으며, 상기 『묘법연화경』과 『의문』을 1부와 7본씩 세 사찰에 나누어 보관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연례적으로 수륙재를 설행할 것이 지시됐다.

조선 초 왕씨 추선(追善) 목적의 수륙재는 명백히 태조 이성계의 살육으로 점철된 개인사와 그의 돈독한 불교 신앙에 기인하지만, 동시에 고려 후기 수륙재가 갖게 된 집단위령제 성격을 반영한다. 추선 목적 수륙재가 조정 대신들의 별다른 반대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개국 초 조선인의 종교적 심성이 적어도 죽음에 관한 한 불교적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왕실부터 민간까지 설행된 수륙재

조선 전기의 국행 수륙재가 고려 왕실에 대한 추선만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례가 바로 태조 7년(1398)부터 기록에 나타나는 진관사의 수륙재다. 권근(權近, 1352~1409)의 「진관사수륙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는 “내(태조)가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조종(祖宗)의 적선에서 나온 것이므로 조상의 덕에 보답하기 위해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 또 신하와 백성 중 혹은 국사에 죽고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엎어져도 구원되지 못함을 생각하니, 내가 매우 근심한다. (중략) 그래서 옛 절에다 수륙도량을 마련하고 해마다 재회(齋會)를 개설해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에게도 복되게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는 내용이 나와, 수륙재 목적의 한 축이 조상의 추복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진관사가 왕실의 조상 추선 의례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수륙재 전담 사찰이었음은 문종 즉위년에 “진관사는 곧 선왕(先王)을 위해 수륙재를 베푸는 곳”이라고 명시한 『실록』 기사에서도 명백히 확인된다. 태조 이후 연산군 대까지 100년이 넘는 동안 진관사에서는 총 32회 이상의 수륙재와 기신재(忌辰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에서 올리는 재) 등의 개설이 기록되고 있다.

진관사에는 수륙재 설행을 위한 별도의 공간으로 수륙사(水陸社)가 조성됐다. 「진관사수륙사조성기」에 따르면 3칸의 집이 3단으로 마련되어, 중・하의 두 단은 좌우에 각각 욕실(浴室) 3칸이 있고, 하단 좌우 쪽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영혼의 위패를 두는 곳) 8칸씩을 설치했다고 한다. 또 대문・행랑・부엌・곳간을 갖추었고 시설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총 59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진관사 수륙재가 상중하 3단의 시식공궤(施食供饋)를 중심 재차로 두고[3단의 집, 부엌・곳간], 영가에 대한 관욕(灌浴)과 대령(對靈)의 절차 또한 갖췄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관사 수륙재는 문종 즉위년(1450) 조선의 법령으로 공식 규정돼 『등록』에 오른다. 이는 수륙재가 어엿한 국행 의례로서 위상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수륙사(水陸社)터 주춧돌, 민순의 제공.
수륙사터, 민순의 제공.

이처럼 조선 전기 왕실의 국행 수륙재는 왕씨 일족 등 무주고혼(無主孤魂)에 대한 위령제 성격의 추복과 함께 선대인 등 특정인에 대한 추선 또한 주된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존속(尊屬)의 조상뿐 아니라 요절한 비속(卑屬)의 가족을 위한 추선 수륙재도 설행됐다. 태종 이방원 내외가 재위 18년에 요절한 막내아들 성녕대군을 위해 진관사에서 베풀었던 수륙재가 대표적이다. 

사실 이는 왕실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조상 또는 망자에 대한 추도를 목적으로 수륙재가 광범위하게 설행됐다는 사실은 태종 대 “이적(李逖)은 망모(亡母)의 제사로 인해 백주(白州)의 서산사(西山寺)에서 수륙재를 베풀고 있었다”는 『실록』의 기록에 잘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태조실록』에는 “성문 밖 세 곳에 수륙재를 베풀어 역부(役夫)로서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했다”는 기록도 있어 비록 왕가의 조상은 아니지만, 무주고혼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특정 망자를 위한 수륙재가 국초부터 자연스럽게 설행됐음을 알 수 있다.

진관사는 왕실의 조상 추선 의례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수륙재 전담 사찰이었다. 문종 즉위년 “진관사는 곧 선왕(先王)을 위해 수륙재를 베푸는 곳”이라고 명시한 『실록』 기사에서 확인된다.

 

간소화된 수륙재 형식의 불교 상제례

조선 초 죽음 의례는 주로 불교식으로 행해졌다. 불교와 유교의 망자에 대한 태도와 죽음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 죽음은 망자를 불보살의 세계로 천도해야 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죽음 의례는 중유(中有, 사람이 죽은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시한인 49일을 넘어서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주자가례 도입으로 여말선초 상례와 제례의 구분이 일반화되면서, 불교의 죽음 의례도 불가피하게 49일의 시한을 넘기게 된다. 조선 초 국상을 전후한 시기에 행해진 불교식 죽음 의례에는 초재부터 7일마다 총 7회 열리는 ‘칠칠재(49재)’, 사망 후 100일째에 행해지는 ‘백일재’, 1주년 때의 ‘소상재(小喪齋)’, 2주년 탈상 때의 ‘대상재(大喪齋)’, 그리고 대상재 이후 매년 기일마다 행해지는 ‘기신재(忌晨齋)’가 있다. 대상재까지가 유교의 상례에 해당한다면, 기신재는 제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에는 여러 차례의 국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태조 5년(1396)에 있었던 태조 계비 신덕왕후의 상사(喪事), 태종 8년(1408) 태조의 상사, 태종 12년(1412) 정종비 정안왕후의 상사, 세종 1년(1419) 정종의 상사, 세종 2년(1420) 태종비 원경왕후의 상사, 세종 4년(1422) 태종의 상사 등이다. 이 일련의 국상을 거치는 과정에서 국가 왕실의 불교식 상례인 추선 의례(칠칠재, 백일재, 소상재, 대상재)와 불교식 제례인 기신재가 고려 말부터 전 계층에 친숙해져 있던 수륙재 형식으로 정리됐다. 또한 국행·대부·사·서인으로 등품(等品)을 나누어 재물(齋物)을 법제화해 간편화된 수륙재가 법령화됐다. 불교식 상제례인 추선 의례를 수륙재 형식으로 설행한다는 것은 특정 망자의 추천(追薦) 의식에 무주고혼과 육도윤회의 중생 모두를 거두어 먹이는 재차(齋次)를 의도적으로 삽입한다는 뜻이고, 그럼으로써 그 공덕을 추천재(追薦齋)의 주인공이 되는 망자에게 회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수륙사(水陸社)가 있는 사찰에 면세(免稅)의 수륙위전(水陸位田)을 지급해 국행의 수륙재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으로 삼도록 했는데, 이 내용은 이후 『경국대전』에 명시해 국법으로 엄히 규정했을 정도였다. 세종 6년(1424) 사사(寺社)・사사전(寺社田)・항거승(恒居僧) 개혁 때 결정된 바에 따르면, 국가 공인 선종 사찰 18개소 중 개성 관음굴과 북한산 진관사에 각각 수륙위전 100결씩, 전국적으로 총 200결의 수륙위전이 지급됐다. 언급한 바와 같이 관음굴은 고려 왕씨를 위한 수륙재 설행 사찰이고, 진관사는 상대적으로 왕실의 추도 의례를 염두에 두고 수륙사가 설치된 곳이었다.

진관사 수륙재. 진관사 수륙재는 문종 즉위년(1450) 조선의 법령으로 공식 규정돼 『등록』에 오른다. 이는 수륙재가 어엿한 국행 의례로서 위상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국행에서 폐지, 민간에서 부흥

이후 15세기 동안 불교식 상제례로서의 수륙재는 『주자가례』에서 제시한 유교식의 가묘제(家廟制)와 병행해서 진행됐다. 성종 대에는 사림의 득세로 왕실과 사대부층에 유교 문화가 확산했고, 칠칠재부터 대상재까지 열 번의 의례와 기신재 형식으로 행해졌던 수륙재는 점차 관료사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연산군은 재위 초반 부왕인 성종의 칠칠재와 소상재를 더는 수륙재로 설행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 사림파 신료들의 완강한 반대에 봉착했다. 1494년 12월 25일 성종 승하 다음날부터 제기된 수륙재에 대한 문제 제기는 향후 1년간 지루하게 이어지며 군신 간 권력 관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됐다. 왕은 번번이 선왕에 대한 효심을 내세워 이를 물리치려 했으나, 신료들은 상제례 자체의 폐지가 아니라 상제례의 불교식 설행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며 임금의 의지를 꺾었다. 결국, 미약하게 이어지던 불교식 상례로서의 국행 수륙재는 연산군 10년(1504) 인수대비의 칠칠재를 끝으로 더 행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중종 11년(1516) 6월 2일 “기신재를 베푼 것은 전조(前朝)에서 시작돼 상하가 모두 재를 베풀어 복을 비는 것에 익숙해지고 드디어 습속이 된 것이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이교(異敎)를 깊이 배척해 풍속이 점점 바르게 돌아가나, 기신재의 일만은 지금까지 구습을 따라 폐지하지 않았으므로 (중략) 이 뒤로는 선왕·선후의 기신재를 영구히 혁파하여 거행하지 말라”는 임금의 분부에 따라 기신재로서의 수륙재도 영구히 폐지됐다.

이처럼 국행에서 사라진 수륙재는 이후 16세기 중반을 거치며 도리어 민간에서 활발하게 부흥했다. 전국 각지의 사찰에서 간행한 수많은 『수륙의문』의 존재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명종 대 문정왕후와 허응당 보우의 불교중흥 시책에 따라 전국 수백여 곳에 왕실 원당이 세워지고, 각 지역의 불사를 위한 재정과 인프라가 확보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륙재는 왜란과 호란이라는 민족적 위기를 거친 일반 대중의 종교적 추구에도 부합했다. 조선 초 고려 왕실과 조상을 위한 국가 제례로 시작한 수륙재는 이렇게 한국인의 종교 심성 기층에 더욱 뿌리 깊게 자리하게 됐다. 

 

민순의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종교학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 「조선전기 도첩제도 연구」를 통해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존속한 한국불교 도첩제의 면면을 살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백년대계본부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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