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승 색난의 대표작 4건, ‘데니 태극기’ 등 보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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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승 색난의 대표작 4건, ‘데니 태극기’ 등 보물 지정
  • 송희원
  • 승인 2021.10.25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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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사진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조선 17세기 조각승으로 이름을 떨친 색난(色難)이 만든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을 비롯해 ‘데니 태극기’ 등 태극기 유물 3건을 포함한 총 7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색난은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대표적 조각승이다. 대부분의 동시대 조각승들처럼 정확한 생몰연대와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관련 기록 등을 통해 1640년 전후 출생해 1660년대 수련기를 거친 후 1680년 조각승들의 우두머리인 수조각승이 돼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약 40년 넘게 활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색난은 동시기 조각승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인물로 색난의 작품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20여 건에 이른다. 또한, 솜씨가 뛰어난 장인이라는 뜻의 ‘교장(巧匠)’ 또는 ‘조묘공(彫妙工)’으로도 불렸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색난이 만든 불상을 선호했고 그의 조각 기술을 높이 평가했음을 의미한다.

보물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은 지금까지 알려진 색난의 작품 중 제작 시기가 가장 빨라 그의 작품세계에서 상징성이 큰 작품이다. 발원문을 통해 수조각승으로 활동한 40대(1680년, 숙종 6)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총 26구로 구성된 대규모 불상이다.

문화재청은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색난이라는 작가의 위상을 고려할 때 작품의 중요성과 상징성이 인정되고 조성 당시부터 지금까지 주요 존상(尊像)의 손실이 없고, 작품성도 뛰어나 17세기 후반 명부전 불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고흥 능가사 목조십육나한상 일부. 사진 문화재청 제공.

보물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은 능가사 응진당에 봉안된 불상 일괄로,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해 1685년 6월 전라도 홍양현 팔영산 능가사 승려 상기가 발원했고, 색난이 수조각승으로서 그의 동료·제자들과 함께 주도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고흥 능가사는 색난의 본사(本寺)이자 활동의 본거지로서, 이번에 지정된 보물은 그가 오래도록 머문 사찰에서 대단위 불사를 진행하고 남긴 작품이라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1698년 능가사 범종 시주, 1707년 능가사『선문염송설화』간행 시주, 1730년 능가사 기와 시주 등 이곳의 다양한 불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문화재청은 “주요 존상이 결실되지 않아 구성이 거의 완전하고, 나한상의 표정과 몸짓이 지물(持物, 불보살 등이 손에 지닌 물건)과 잘 어우러져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어 예술성도 탁월하다”며 “색난 조각의 형성과 발전, 그의 사승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해 은하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사진 문화재청 제공.

보물 ‘김해 은하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은 1687년(숙종 18) 제작돼 김해 신어산 서림사 시왕전에 봉안된 불상이다. 서림사 시왕전은 현재의 은하사 명부전을 가리킨다. 은하사 명부전 존상은 모두 21구로,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귀왕, 판관, 사자, 금강역사 등 거의 완전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이 불상은 경상도 최동부 지역인 김해 지역에 조성된 색난의 작품으로서, 주로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활동 영역을 파악하는 데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은 “존상의 완전성과 창의적인 도상(圖像), 그리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는 점에서 학술·예술적 중요성이 크며,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 한 획을 그은 색난의 전성기 작품이라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실입상. 사진 문화재청 제공.

보물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은 경북 예천 학가산에서 화엄사로 온 계파 성능이 장육전(丈六殿, 지금의 각황전覺皇殿)을 중창한 후 1703년 조성했다. 평균 높이 약 3.3m인 대형 왕실발원 불상으로서 색난의 50대 만년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현재 불상에 재복장된 발원문을 통해 7존의 불보살상은 수조각승 색난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인 충옥, 일기 등 24명의 조각승이 1703년 협업해 만든 사실을 알 수 있다. 석가여래좌상은 색난, 다보여래상과 문수보살상은 충옥, 아미타여래좌상은 일기, 보현보살상은 웅원, 관음보살상은 색난과 추붕, 지적보살상은 추평이 각각 주도해 조성했다.

문화재청은 “당시 최고 권위의 왕실발원 불상 조성에 색난과 그 제자들이 초빙된 것은 조각승으로서 그의 명성이 대단했음을 반증한다”며 “석가·다보·아미타여래 삼불상과 석가여래의 좌우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다보여래의 협시보살로 지적보살이, 아미타여래의 협시보살로 관음보살이 짝을 이룬 도상은 1665년 간행『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에 의거한 ‘법화거불(法華擧佛)’, 즉 법화신앙 바탕의 불교의식집에 등장하는 도상을 최초로 조각한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평했다.

이어서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은 40여 년 동안 수화승으로 활동한 조각승 색난의 거의 마지막 시기 작품으로, 숙련된 기량과 원숙함이 반영된 그의 기념비적인 대작이자, 도상학적으로도 의의가 크다는 점, 수준 높은 조형성과 기술적 완전성을 갖췄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이상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등 4건의 작품은 ▲관련 자료를 통해 조성시기와 배경, 제작자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점 ▲동일작가 작품 중 대표성과 상징성이 있다는 점 ▲주요 존상의 결손이나 변형이 작어 완전성이 뛰어나고 작품성도 우수하다는 점 ▲제작 당시부터 원봉안처를 벗어나지 않아 유래가 뚜렷하다는 점 등에서 보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와 더불어 국가등록문화재의 가치를 재평가해 ‘데니 태극기’를 비롯해 ‘김구 서명문 태극기’, ‘서울 진관사 태극기’ 등 태극기 유물 3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이번에 지정된 태극기 3건은 19세기~20세기 초 제작된 것들로, 일제강점기 혹독한 시련 속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문화재이자, 우리 역사 최초로 국기 제작이 시도되고 변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한민국 역사를 대표하는 유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문화재청은 독립운동사료를 포함한 근현대문화유산에 대한 적극적인 역사·학술 가치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2019년부터 전문가 자문 등을 거쳐 국가등록문화재들에 대한 검토를 시작해 작년에 「말모이 원고」 등 한글 관련 문화재 2건을 보물로 지정했으며, 이후 두 번째로 태극기 3건을 이번에 보물로 추가 지정했다.

보물「데니 태극기(데니 太極旗)」는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가 소장했던 것으로, 1891년 1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것을 1981년 그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기증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 태극기의 존재는 1977년 미국인 역사학자 로버트 R. 스워타우트(Robert R. Swartout) 교수에 의해 오리건 대학교에 보관된 ‘데니문서’가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데니 태극기’는 세로 182.5cm, 가로 262㎝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기 제정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라는 점에서 뜻깊은 사료다. 제작기법 측면에서도 근대문물이 밀려오던 19세기 말 정세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당시 서양 국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참조한 것으로 ▲전통적인 손바느질이 아닌 상하 90cm 정도 크기의 넓은 폭의 면직물을 바탕재료로 하여 재봉틀을 사용해 박음질했다는 점 ▲청색·홍색 태극과 청색의 4괘를 부착하는 데 있어 바탕천을 오려내고 두 줄로 박음질해 멀리서도 문양이 또렷하게 보이도록 시각적 효과를 꾀한 점 등 초창기 국기 제작법을 적용해 매우 정교하고 정성껏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은 ‘데니 태극기’의 보물 지정 사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기를 제정해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외교적 노력을 증명하는 유물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을 향한 열망의 상징이 된 태극기의 기원을 보여준다는 점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한 미국인 외교관 가문이 90여 년 넘게 간직해 오다 우리 정부에 기증함으로써 진정한 호혜의 상징이 되었다는 점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큰 태극기라는 점 등이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 사진 문화재청 제공.

보물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1941년 3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金九, 1876~1949)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에게 준 것이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 신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이 태극기를 전했고,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안창호 유품’ 중 하나로 1985년 3월 11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됐다.

세로 44.3cm, 가로 62cm 크기의 비단 천에 청색과 홍색 천으로 태극을 만들어 붙이고, 흑색 천으로 4괘를 덧대어 제작한 소형 태극기이다. 깃대는 오른쪽에 천을 덧대어 만들었으며, 괘는 가로 상단에 건괘와 감괘, 하단에 이괘와 곤괘가 배치돼 있다. 깃대와 괘의 사이에는 김구 선생의 친필로 묵서 4줄 143자가 쓰여 있고 마지막에 ‘김구(金九)’라고 새겨진 작고 네모난 인장이 찍혀 있다.

문화재청은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19세기~20세기 초 제작 태극기 중 제작 시기가 정확히 알려진 유일한 자료라는 점 ▲대한민국의 독립을 열망한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한 신념이 대표적으로 담겼다는 점 ▲매우사 신부로부터 안창호 선생의 부인이 태극기를 전달받기까지 상황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어 전래 경위가 분명하다는 점 ▲194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극기의 제작규정을 통일하기 직전에 제작돼 태극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역사·학술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고 밝혔다.

서울 진관사 태극기 앞면. 사진 문화재청 제공.

보물 ‘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2009년 5월 26일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 안쪽 벽체에서 발견된 것으로,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이 함께 발견됐다. 신문류는 「경고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신대한』·『독립신문』 등 5종으로,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 발행된 사실로 미루어 진관사 소장 태극기 역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진관사 태극기’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태극기로, 불교 사찰이 독립운동의 배후 근거지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며 “형태상으로도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부분과 4괘를 검은색 먹물로 덧칠해 항일 독립의지와 애국심을 강렬하게 표현했으며,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사례라는 점에서 항일 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밝혔다.

이어서 ▲불교계 등 다양한 계층에서 주도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 ▲항일 정신을 형태상으로 강력하고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점 ▲함께 발견된 독립신문류를 통해 태극기의 변천사와 그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학술적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해 문화재에 담긴 의미를 보물 지정의 중요한 이유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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