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자(鬼子)의 어머니는 늙은 귀신의 왕 반사가(般闍迦)의 아내로서 1만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큰 역사의 힘이 있었다. 제일 작은 아들의 이름이 빈가라(嬪伽羅)였다.
귀자의 어머니는 흉악하고 요사하며 사나워서 사람의 아이들을 잡아먹었으므로, 사람들은 걱정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 아들 빈가라를 붙들어다 발우 밑에 숨겨 두었다. 귀자의 어머니는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이레 동안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근심하고 번민했다.
어떤 이가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를 아는 지혜를 가지셨다.”
그 말을 들은 귀자의 어머니는 부처님께 나아가 아이 있는 곳을 물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1만 명 아들 중에서 겨우 한 아들을 잃었는데, 왜 고민하고 근심하면서 찾아다니느냐? 세상 사람들은 아들 하나나 혹은 셋이나 다섯을 두었는데 너는 그들을 잡아먹지 않았느냐?”
귀자의 어머니는 아뢰었다.
“만일 지금 제가 빈가라만 찾으면 다시는 세상 사람들의 아들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곧 귀자의 어머니에게 발우 밑에 있는 빈가라를 보여주셨다. 그는 신력을 다하였으나 발우를 들어낼 수가 없어 다시 부처님께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지금 삼귀오계(三歸五戒)를 받고 목숨을 마칠 때까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네 아들을 돌려주리라.”
귀자의 어머니는 부처님의 분부대로 삼귀오계를 받았다. 부처님께서는 그 아들을 돌려주면서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부터 계율을 잘 받들어 가져라. 너는 가섭 부처님 때 갈니왕(羯膩王)의 일곱째 딸로서 굳게 공덕을 지었지마는, 계율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귀신의 형상을 받은 것이다.”
_ 『잡보장경』 「귀자모실자연」 각색
너는 엄마 없니?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던져 헌신하는 엄마가 나온다. 특히 모친역을 맡은 김혜자 씨가 결국 자기 자식 대신에 누명을 쓴 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너는 엄마 없니?”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문화적 문법의 핵심을 파고드는 명대사다. 이 대사는 흡사 이렇게도 들린다.
“너는 너를 지켜주는 신 없니?”
오늘날은 특히나 유능하고 든든한 수호신 같은 엄마가 없으면 속상한 시대다. 자식만 풍요로운 서비스를 받지 못해 속상한 게 아니라 엄마도 속상하다. 자식을 신처럼 지켜주지 못하는 엄마는 죄인이 된다. 심지어 자식을 유기하기까지 한다면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도 같다.
이처럼 모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조건의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자식을 위해 잘 기능하는 엄마가 있어야 자식도 인간이 되고 엄마도 인간이 된다. 엄마는 마치 인간이 인간일 수 있도록 인간을 책임지는 신적인 존재인 것만 같다. 표현 그대로 모신(母神)이다. 그리고 이 모신이 자식을 위해서라는 신성한 명분을 걸고 각종 특권과 반칙을 행사하게 될 때, 그것은 귀자모신(鬼子母神)이 된다.
귀자모신은 자기 자식을 위해 남의 자식을 먹이로 주는 존재다. 그렇게 오늘 저녁 식탁에 올라갈 먹이 앞에서 귀자모신은 연민 어린 촉촉한 눈빛으로 “너는 엄마 없니?”라고 묻는다. <마더>가 공포영화인 이유다. 공포영화의 주역은 귀신(鬼神)이다. 귀신은 죽어서도 자기 뜻대로 하려는 집요하고 권력적인 사념이다. 모든 신은 이 일방적 권력을 내재한다. 폭력적이다. 그래서 신이 많은 세상은 끔찍하다.
이 시대에 만연한 모신(母神)의 현상은 ‘과잉모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비하적 표현으로 우리는 ‘맘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 단어가 정당하다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해당 단어의 성립에 있어 엄마라는 의미에 벌레[蟲]라는 의미가 합성된 이유를 우리는 이해해볼 수 있다. 해당 단어가 바퀴벌레처럼 집요하게 우리의 경계를 침범해 들어오는 장면을 연상시킬 때, 그것이 우리에게 대단히 위협적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과잉모성’은 위협이다. 그것은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더 많은 아이의 안녕을 위협한다. 고대부족사회에 성립된 하나의 신은 그 신을 부모처럼 섬기며 숭배하는 부족에게는 수호신이지만, 다른 부족들에게는 악신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한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하나의 부족임을 천명하고 있는 까닭에, 자연스레 ‘어머니’라는 표현은 절대적으로 선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의심받지 않고 도전받지 않는다. 엄마라는 마음작용이 ‘악신’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이것은 은폐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가장 소외시켜 서럽게 만드는 소재는, 그 영향력은 강대하지만 철저하게 은폐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너는 엄마 없니?’라는 말이 암시하는 ‘엄마 없는 세상’은 다른 의미로 우리가 속상한 이유가 된다. 엄마가 은폐됨으로써 그 권력은 뒤로 숨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폭력성을 보장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이 모성의 숨은 폭력성을 노출하기 위해 현명한 방법을 취한다. 은폐의 원리 그대로 귀자모신의 자식을 숨긴 것이다. 그럼으로써 귀자모신의 폭력성을 스스로 알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알려진 폭력성은 귀자모신 역시도 폭력의 희생자일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모성에 신성을 강요하는 가부장의 폭력
‘과잉모성’은 사실 가부장의 그림자다. 가부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모성도 더욱 과잉된다. 그림자는 더욱 진하게 드리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 경향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제가 그 근간이 되는 유교 사회이기 때문이다. 계급의 재생산과 사회의 유지를 위한 기능은 모성에 전담된 임무다. 소위 신사임당이나 한석봉 어머니와 같은 예로써, 자식을 올바른 선비로 키워야 하는 일이 엄마의 자격을 판정한다.
이는 사실 단순한 역할에 대한 판정이 아니다. 존재론적인 판정이다. 엄마 자격이 없으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잘못된 존재로 판정된다. 자식을 잘 키우는 일 외에는 여성에게 다른 가능성이 모두 봉쇄된 까닭이다. 어디에도 정당한 자기의 자리가 없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는 자식 키우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적 문법이 세습되어 온 한국 사회의 구조 속에서, 엄마들의 교육 열풍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단순히 자식을 위한 서비스의 일환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변호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인 까닭이다.
형식적인 유교주의가 만들어낸 무수한 억압의 기제들이 있다. 억압은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유교주의에 입각한 가부장 자체는 생명을 죽이려는 의도를 내재하면서, 동시에 엄마들에게는 생명을 살려내라는 임무를 부여한다. 모순적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수많은 모성은 이 가부장의 모순을 대신 온몸으로 떠안고 마치 시지프(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영원히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 인물)처럼 버텨낸다. 엄마들을 이처럼 모순의 희생양으로 제단에 올림으로써 사회의 명맥은 가까스로 유지된다. 가부장적 사회의 유지에 공헌한 엄마는 신처럼 예찬받는 데 반해, 그렇지 않은 엄마는 악마적 존재로서 통렬하게 비난받는다. 죄책감만 여성의 가슴을 가득 메워간다. 진정 끔찍한 일이다.
신은 폭력적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신이 되기를 요구하는 일은 더욱 폭력적이다. ‘신성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엄마를 예찬하는 문화는 사실 엄마에게 가장 거대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허울 좋은 미명 속에 모든 구조적 모순을 다 밀어 넣은 채, 짐짓 시치미를 떼고 선비들은 시조를 읊으며 정쟁 놀이를 한다. 이 유교주의적 가부장의 수혜자들은 엄마의 골수를 빨아먹으며 자신이 잘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었다. 엄마를 신으로 만드는 일을 통해 엄마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해온 최고의 ‘등골브레이커(부모의 등골을 휘게 한다는 뜻)’들이다.
서구 심리학에도 이러한 엄마의 신성화 전략으로 인한 갈등을 묘사하는 개념이 있다. 릴리스 콤플렉스가 그것이다. 히브리의 설화에서 릴리스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아담과 대등하게 흙으로 만들어진 여성이다. 그래서 아담은 자신에게 종속되지 않는 릴리스를 불편해했고, 결국 릴리스는 지옥으로 가 사탄의 부인이 된다. 가부장에 종속되는 현모양처가 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끔찍한 교훈이다. 이처럼 릴리스 콤플렉스는 여성이 신성한 모성을 강요받는 가운데 자신의 정당한 여성성을 상실하는 경험을 일컫는 표현이다.
때문에 모성에 긴밀하게 요청되는 것은 탈(脫)신성화다. 탈우상화라고도, 탈주술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술적 사고를 깨는 것은 사실적인 지혜다. 붓다는 모성을 탈신성화하는 이 지혜를 실천적으로 안내한다.
모성 자리에 계율을, 엄마 자리에 자비를
붓다는 분명하게, 계율이 없었기 때문에 귀신이 되었다고 귀자모신에게 말한다. 정확하게는 계율이 없던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계율이 없던 것이다. 가부장제도 계율이다. 그러나 그 계율은 생명을 억압하는 계율이다. 귀자모신은 이 생명을 죽이는 계율에 봉사하며 눈을 흐리고 있던 존재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있으면서, 자신을 정말로 신인 것처럼 착각해 온전한 생명의 아이들에 대한 폭력을 자행하던 존재다.
폭력의 희생자가 다시금 폭력의 집행자가 되는 폭력의 연쇄적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 이 고리는 가부장에 대한 반대로 모계사회를 이뤄야 깨지는 게 아니다. ‘과잉모성’을 극복하기 위해 명징한 부권을 강화해야 깨지는 것도 아니다. 표면적인 가부장과 이면적인 모성이 위치한 그 자리에 다만 계율이 와야 한다. 진짜 계율이 와야 한다.
진짜 계율이란, 이상적인 관념을 추구하며 만들어낸 당위의 규칙들로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 실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진짜 계율이다. 나의 아이를 잃으면 슬프듯이, 남의 아이를 잃게 하면 그도 나와 똑같이 슬프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진짜 계율은 이 시대의 핵심키워드인 내로남불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이것은 남의 자식을 나의 자식처럼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관점은 여전히 1만 명의 자식을 가진 귀자모신의 입장이다. 나의 자식을 인간의 아이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내가 구원해야 하는 나의 자식이 아니라 나를 깨우치는 인간의 아이다. 그 어떤 인간도 나의 자식을 위해 죽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엄마인 나도 바로 그 인간의 아이며, 나의 자식도 바로 그 인간의 아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결코 희생할 수 없는 소중한 인간의 아이들이다. 이처럼 내로남불이 극복되고 모든 것이 일치되는 계율 속에서 바라볼 때, 그 계율의 자리는 그대로 자비의 자리가 된다. 인간 전체를 향한 상냥함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귀자모신은 붓다와의 만남을 통해 모든 인간의 아이에게 내려앉는 자비의 상징이 되었다. 모성이 계율로 전환된 자리에서, 엄마 없는 세상은 자비로 가득한 세상이 되었다. 신이 없어도 괜찮다. 서로에게 자비로운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 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 상담자, 실존상담자.